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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호미 카라스, 중산층 연대기
한 시민이 23일 서울 시내 부동산 앞을 지나고 있다. 연합뉴스


포목상 아리스티드 부시코가 프랑스 파리에 1852년 문을 연 백화점 '르 봉 마르셰'는 쇼핑 문화의 지각 변동을 일으켰다. 당시 집으로 상인을 부르던 일부 부유층을 제외하곤 대다수는 시장에서 상인들과 물건값을 옥신각신 흥정해야 했다. 그러나 '르 봉 마르셰'에선 누구나 깨끗하고 편안한 공간에서 다양한 상품을 정가에 살 수 있었고, 이런 전략은 대성공을 거둔다.

부시코의 성공을 뒷받침한 건 19세기 초반 새로운 계층의 등장이었다. 귀족도 아니고 농부도 아닌 중간 부류 집단. 타고난 신분에 관계없이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열망'을 동력으로 일하고, 새로운 물건과 경험을 소비하기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여는 계층. 바로 중산층의 출현이었다.

신간 '중산층 연대기'는 미국 싱크탱크 브루킹스 연구소의 호미 카라스 선임 연구위원이 쓴 중산층의 세계사다. 1800년대 초반, 극소수였던 중산층은 등장하자마자 단숨에 선망의 대상이 됐고 '두꺼운 중산층 만들기'는 국가를 막론한 정치인들의 단골 공약으로 자리 잡았다. 저자는 "세계 전체적으로 중산층이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빠르게 늘어나고 있고 아마도 2030년을 전후해서 50억 번째로 중산층에 진입하는 사람이 나오리라 예상한다"며 "이 책은 중산층의 확산이 미래 세대의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운명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한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중산층 기준은 '소득' 아닌 '지출'

책 '중산층 연대기'의 저자 호미 카라스 브루킹스 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자는 세계은행 보고서에서 '중진국 함정 이론(저소득 국가가 중간소득 국가까지 올라가는 데는 성공하지만, 이후 고소득 국가 진입에 실패하는 현상과 구조적 원인을 설명한 이론)'을 처음으로 정립한 중산층 연구의 권위자다. 연합뉴스


중산층에 대해 논하려면 먼저 중산층을 정의해야 한다. 저자는 중산층의 기준을 1인당 일 지출이 12달러(약 1만6,000원)에서 120달러(약 16만3,000원) 사이인 사람으로 규정한다. '소득' 대신 '지출'을 기준으로 삼는 건, 가족의 자산이나 은퇴 여부 등 생애 주기를 고려하지 않는 소득보다는 지출이 개인의 생활 수준과 그가 속한 계층을 더 정확히 가늠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같은 대학생이라도 중산층 이하라면 생계를 위해 스스로 돈을 벌어야 하는 반면, 중산층 이상은 부모로부터 용돈을 받아서 일할 필요가 없을 수 있다. 이럴 경우 소득은 전자가 더 많지만 지출은 적을 가능성이 높다.

카라스의 기준에 따르면 한국 중산층은 1975년 전체 인구의 12%에서 2000년 90%로 급증했다. 경제학자로서 40년간 글로벌 중산층 연구와 신흥국 및 개발도상국의 지속가능한 경제성장 방안에 대해 천착해 온 저자는 이 대목에서 "중산층의 규모로 봤을 때 미국이 100년 걸린 과업을 이 나라는 대략 25년, 즉 단 한 세대 동안에 이뤄냈다"며 "극적인 사례"라고 강조한다.

6일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에서 바라본 아파트 단지 모습. 연합뉴스


'남부럽지 않게 살기'라는 끝없는 열망



책은 전례 없는 성취에 가려진 그늘도 조명한다. 한국을 필두로 한 동아시아 국가에서의 중산층 확산은 외형적 성장에 치우쳤다는 지적이다. 일본의 20대 여성인 다카하시 마쓰리가 광고 회사에서 매주 거의 100시간씩 일하다가 2015년 크리스마스에 자살한 사건, 한국의 기록적인 최장 평균 노동시간, 중국의 '탕핑족(躺平族 ·가만히 드러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청년들)'을 사례로 든다. 다카하시가 마지막 남긴 글은 "왜 이다지도 사는 것이 힘든가?"였다. 청년들의 팍팍한 삶이 저출생-고령화로 이어지는 건 동아시아 국가의 공통된 현상이다.

특히나 "남부럽지 않게 살기(keeping up with the Joneses·사회적 계층이나 재화의 축적을 이웃과 비교하는 경향)의 전통"이 강한 한국 사회에선 중산층이 돼도 치열한 경주서 벗어나기 어렵다. 과도한 입시열, 부동산 투기 등 여러 사회 문제는 중산층의 '상대적 박탈감'을 피하기 위한 몸부림에서 주로 기인한다. '세습 중산층 사회'의 저자인 조귀동 명지대 경제학과 객원교수는 해제에서 "중산층은 성장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분배의 문제"라며 "결국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지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책은 경제적 풍요가 만족스러운 삶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상기시키며 중산층 편입 이후 삶의 방식과 방향에 대해 고민거리를 던진다.

중산층 연대기·호미 카라스 지음·배동근 옮김·조귀동 해제·아르테 발행·372쪽·3만원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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