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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칠 교수의 일기는 1993년 〈역사앞에서〉란 제목으로 창비에서 출간되었다. 이 일기는 1945년 11월 29일자 뒤쪽부터 남아있었는데, 그 앞의 일기가 사라진 것으로 보였다. 유물을 보관하고 있던 필자의 아들 김기목(통계학·전 고려대) 교수가 사라진 줄 알았던 일기를 최근 찾아냈다. 1945년 8월 16일에서 11월 29일(앞쪽)까지 들어 있다. 중앙일보는 이 일기를 매주 토요일 원본 이미지를 곁들여 연재한다. 필자의 다른 아들 김기협(역사학) 박사가 필요한 곳에 간략한 설명을 붙인다.



11월 26일 개다. [1시 반]

아침에는 고조선 이야기.

오후에 염병준(廉炳俊) 군이 와서 공부를 좀 해보겠으니 향방(向方)을 가르쳐달라고 해서 대단히 기쁘게 여겼다. 거세(擧世)가 모두 맘이 들떠서 갈팡질팡하는 이즈음 우리 조합 직원들 사이에 향학열이 부쩍 왕성해짐은 참으로 유쾌한 일이다. 내가 이들을 지도해 나가야겠다는 책임을 느낄 때 새삼스레 삶의 보람을 느끼기조차 한다.

염 군에게 들려준 이야기의 요령

한꺼번에 와락 어떠한 성취를 기하지 말고 서서히 장구한 시일을 두고 근기(根氣) 있게 나가도록 하라.

학문은 탐광(探鑛)과 달라서 졸부의 길은 없고 장구한 시일의 노력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그 대신 노다지를 캐어내지 못했다고 여태까지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건 절대로 아니다. 구극의 목적은 설사 달하지 못할지라도 노력한 만큼 진경(進境)이 있을 건 물론이다. 백리의 길을 나서서 오십리밖에 못 갔다면 공연한 수고가 될는지 모르나 우리가 이퇴계 선생 같은 사람이 되기를 기하고 수련하는 중에 그 반이나 3분 1밖에 가지 못하고 우리의 목숨이 다한다 할지라도 수련한 만큼은 우리를 보다 나은 경지로 끌어올리게 된 것이다.

학문을 하는 것은 반드시 학자가 되는 것만이 능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현재보다 좀 더 보람있는 인생을 건설함에는 또 진정한 삶의 길을 찾으려면 학문의 길밖에 아무런 다른 방편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학문에 침잠함으로써 제절로 성격을 도야해서 어떠한 절대경에 이를 수 있을 것이요. 사람이 항상 잡념에 사로잡혀 있다거나 되고말고한 동무들과 섭쓸려서 술이나 마시고 세월을 보내느니보다는 날마다 선현 선배의 말씀을 듣고 그와 더불어 함께 나갈 수 있다는 것은 여간한 행복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학(學)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더욱이 앞으로는 간판도 아무것도 없을 것이요 오직 실력이 모든 것을 결정할지니 오늘날 우리가 다만 얼마라도 더 공부해서 실력을 기르는 것은 타일 활동할 소지를 배양함이 된다. 그렇지 않더라도 오매에 염원하던 광복이 이루어지려는 오늘날 우리들은 모두 다 부지런히 우리 힘을 닦고 길러서 타일 조국을 위해서 일할 준비를 쌓을 의무가 있다. 그러함에도 모두들 기분이 들뜨고 허영과 안일과 모리(謀利)에만 정신이 팔려서 착실한 생각으로 자기연마에 잠심(潛心)하는 사람이 적은 것 같으니 이러고서야 10년 후, 20년 후의 조선을 누가 떠메고 갈 것인가.

차라리 오늘날은 우리들의 모든 부족함을 일본 학정(虐政)의 결과라고 하자. 그러나 그때에 있어선 무얼로 구실을 삼을 것인가. 텅 비인 민족의 두뇌로 어떻게 격렬한 국제경쟁 무대에 서서 우리의 조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제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삼천만 하나하나가 모두 자기수련에 치중하여야 한다. 그래서야만 조선의 앞날엔 희망과 광명이 비칠 것이다. 수련의 길만이 가장 잘 조국을 위하는 길이며 이것이 무엇보다도 열렬히 조국을 사랑하는 소이(所以)일 것이다.

그러나 당장 아쉬운 걸로 영어자나 깨치고 오케이나 하고 할로-를 배우는 것이 공부가 아닐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의 제일 급선무는 자기를 알아서 잃어버린 자기를 다시 찾는 것이다. 나라(國)는 국제정세의 전변(轉變)통에 물러올 수도 있지만 잃어버린 자기는, 마음의 조국은 결코 타력으로 구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참된 마음으로 공부함으로써만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조선학을 배워서 자기의 얼굴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역사와 한글과 기타 모든 조선의 사상(事象)을 정확하게 파악하기에 힘쓰라. 그리하여 기만과 가식의 일정(日政) 하에서 왜곡된 조국의 얼굴을 바로잡고 삼천만이 다 잘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편협한 국수주의에 엉키고 뭉쳐지란 의미는 절대로 아니다. 우리는 너무나 우리를 모르고 또 잘못 아니 우선 우리부터 먼저 똑바로 알고 그런 연후엔 어느 방면으로든지 뻗어나감이 좋을 것이다. 그리하여 될수록 세계의 신지식을 많이 흡수하여 열국의 사이에서 당당히 어깨를 겻고 트는 빛나는 조국을 건설하라.

세상에는 흔히 나는 계단을 밟아서 학교도 가지 못했고 따라서 기초지식이 없으니 애써 공부한들 무슨 소용이리오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공부라는 개념을 잘못 파악한 것이다. 공부는 반드시 학자가 되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고 또 남과 겨뤄서 그보다 뛰어나려고만 하는 것이 공부가 아니다. 공부를 그렇게 공리적으로 해석하는 건 아예 잘못이다. 공부는 문자를 통한 자기수련을 쌓아서 보다 나은 자기를 건설하려고 하는 것이니 만인에게 다 균등하게 문이 열려 있는 것이다. 공부는 높은 교양을 지닌 사람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그러한 귀족적인 것이어서는 못쓴다. 만인이 다 뜻만 가지면 용이히 제 힘에 맞는 공부의 길이 열릴 것이다. 색다른 외국어나 어려운 과학서를 사서(辭書)와 씨름해 가면서 읽는 것만이 공부라고 생각함이 잘못이다. 자미있는 동화나 품(品) 높은 소설을 읽으면서 그중에서 보다 나은 인생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진정한 공부일 것이다. 그러는 중에 제절로 힘이 붙어서 차츰 어려운 것을 읽게 되는 것은 자연한 일이지만 한평생 소설 독자로 마치더라도 술 먹고 노름하고 지내는 것보다 얼마나 아름답고 건설적인 일생일는지 모른다. 만일 그러는 중에 옳고 바른 인생의 길을 터득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훌륭한 공부는 없을 것이다.

또 세상에는 말하길 내가 만일 뛰어난 재주라도 타고났다면 모르거니와 나 같은 평범한 머리를 가지고서야 애써 공부한들 무슨 신통한 구석이 있으랴 하는 사람이 있다. 이 또한 공부의 개념을 잘못 파악한 사람의 말이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공부는 일부 특권계급의 독점물이 아니고 만인의 것이다. 재주가 있으면 더욱 좋지만 재주가 없어도 물론 좋다. 우리는 흔히 재주가 너무 지나쳐서 공부에 잠심하지 못하고 외도로 들어가는 사람을 보았지만 근기 있는 노력을 계속함에도 재주가 모자라서 공부를 못하고 말았다는 사람을 듣지 못하였다.

더욱이 한문으로만 나가던 옛날 같으면 여간해서는 문리(文理)를 얻을 수 없지만 그것은 기형적 현상이니 말할 것도 없고 앞으로 우리 한글로써 건설하는 문화엔 만인이 참여할 수 있는 것이고 또 그러해야만 진정한 국민문화일 수 있고 그 문화 자체가 정상적인 번영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재주가 없어서 아무리 애써도 한글을 깨칠 수 없소 하는 저능자라면 별 문제려니와 그렇지 않은 한 삼천만 모두가 신문화 건설의 일원일 수 있고 또 그래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누구나 힘쓰면 힘쓴 그만치, 근기 있고 줄기차게 나아가면 나아간 그만치 문화의 감로수를 얻어 마실 수 있을 것이요 거기엔 아무런 재능의 차별대우가 없을 것이다. 이것이 문화의 본연의 자태이고 또 우리 한글이 가장 잘 거기 적합한 형태를 갖추었으므로 세계에서 제일 우수한 문자라고 일컫는 것이다.

세상에는 또 말하기를 우리 같은 가난뱅이야 무슨 공부할 여유가 있나 하고 그리할 주제가 아니라고 자포자기해 버리는 사람이 있다. 이것도 물론 잘못된 생각이다. 공부는 유한계급의 유희물이 아니다.

문화국민이면 만인이 나눠 가져야 할 생명의 한 요소이다. 지식의 편지(偏知)는 부의 편재와 마찬가지로 사회를 암흑하고 음산하게 하는 것이다. 백성은 따르게 할 것이요 알릴 것이 아니라는 궁리는 간악한 정치가가 민중을 우롱하는 것이요 민중을 기만하고 그 고혈을 착취하려는 한 방편이다. 과거 40년간 일본의 조선 통치에 우리는 그 전형적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설사 통치자가 그러한 심뽀로 나간다더라도 우리 민중은 따르려고만 할 것이 아니고 알려고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쪽이 먼저 나도 가난하니 구복(口腹)이나 채울 길을 생각하겠소 하고 겸손하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공부는 그러한 차별적인 의미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내 자신을 바르게 성장시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바르게 살아나가려는 사람은 부자고 가난하고 간에 모두 공부를 해야 한다.

(공부라는 건 학교에 가는 것만이 아니요 또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는 것만이 공부가 아닐지니 그런 것은 모두 공부의 한 방편에 불과한 것이요 진정한 공부는 사람이 한평생을 두고 행주좌와(行住坐臥) 틈나는 대로 문자를 통해서 자기수련을 쌓아가는 것이요, 그러므로 부자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사람도 물론 할 수 있는 일이고 해야만 하는 일이고 공부는 만인에게 기회균등이다.)

옛날처럼 책이 희귀하고 비싸던 시절이면 또 모르지만 오늘날처럼 막걸리 한 잔 값이면 며칠 동안의 정신의 양식을 가두(街頭)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데도 가난하기 때문에 공부할 수 없다는 건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책을 구하기 어려운 예전에도 정말 좋은 공부를 한 사람들은 다 가난한 집에서 자라나고 또 평생 가난하게 지낸 사람들이 많다. 남의 책을 가까스로 빌려서 읽은 사람도 있고 끼니를 굶으면서도 책을 놓치지 않은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오히려 넉넉한 사람은 재산에 마음이 쓰여서 또 그 재산의 유혹으로 공부를 못하는 수가 많지만 우리네들 가난한 사람이야 언제든 그날의 일이 끝나면 마음 편히 책과 친할 수 있을 것이다. 부자는 비단 착한 길로 나아가는 것이 황소가 바늘구멍을 빠져나가는 것처럼 어려울 뿐 아니라 공부를 함에도 역시 그러한 것 같다.

세상에는 또 공부하기엔 나이 너무 많은 것을 탄식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아직도 소년기라면 오늘부터라도 곧 공부하길 입지(立志)하겠지만 벌써 나이 이십이요 삽십이 넘었으니 지금부터 시작한댔자 출발이 너무 늦어서 결국은 일모도원(日暮途遠)하고 말 것이니 아예 단념하겠다는 말이다. 이도 또한 생각이 부족한 말이다. 인생은 긴 마라톤이다. 백 미터나 2천 미터의 단거리 경주가 아니다. 남 먼저 스타트했다더라도 긴 인생의 도정에 있어선 끈기가 계속되지 않는 수도 있고 원력(元力)이 부족할 수도 있고 또 중로(中路)에 차질이 생기는 수도 있다.

스타트가 늦었더라도 끈기있게 준력차게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 성공의 월계관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질행자 선득(疾行者 先得)은 유한한 목적물을 두고 서로 아귀다툼하는 모리배의 원리일 것이다. 공부는 퍼내고 퍼내어도 마를 날이 없는 근원 갚은 샘이요 만인이 제 힘껏 져 날라도 조금도 줄지 않는 무진장한 황금의 산이다. 더욱이 결승점이란 금을 그어놓고 서로 앞서기를 다투는 그러한 옹색한 노름이 아니다. 사람들은 죄다 자기가 마음먹은 때부터 시작해서 제힘대로 제 노력의 값어치만치 인생의 황금로를 개척할 수 있는 것이요 보다 높은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언제 출발해도 늦어서 못쓴다는 법이 없고 시간을 마감해서 오후가 되었으니 들이지 않는다는 경계도 없다. 삼십부터라도 좋고 오십부터라도 좋은 것이다. 언제든 생각난 때부터 곧 시작해서 부지런히 노력만 하면 노력한 만치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옳은 길로 나아가고 착한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나는 남보다 뒤졌으니 또 기껏 애써도 남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니 아예 그만두고 이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겠다는 생각은 도저히 용허할 수 없는 생각이다. 더욱이 인생의 길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뒤로 물러서고 위로 올라가지 못하면 아래로 내려 떨어지는 것이니 제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향상을 지향하지 않으면 부지불식간에 조금씩 나락의 구렁텅이로 미끄러지는 것이며 조금이라도 더 깨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이미 깨친 것도 하나씩 둘씩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광명을 향하여 머리를 돌리라, 그렇지 않으면 암흑의 심연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 그 광명에의 길은 무얼까. 오늘부터라도 공부하길 입지(立志)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세상에는 흔히 환경이 순탄하지 못해서 공부를 못한다는 사람이 있다. 직업을 가지고 하루종일 품팔이를 하게 되니 뜻이 있어도 공부할 여가가 없다는 것이다. 또 환경이 너무 복잡하고 소란함을 핑계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가진 직업이 좀 더 시간의 여유가 있는 것이라면, 또 내가 사는 환경이 좀 더 조용할 수 있다면 공부를 할 수 있을 터인데 그렇지 못하니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도 이유가 닿지 않는 말이다. 공부는 결코 유한계급의 심심풀이가 아니다. 국민의 최후의 한 사람까지 공부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만드는 건 국가의 이상이겠지만 그렇다고 국민이 모두 그러한 환경에 있지 않는 한 향상에의 지향을 버리고 만다면 영원히 그 이상은 실현할 날이 없을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그러한 좋은 환경은 국민이 모두 각고면려해서 만들어내는 수밖엔 아무도 만들어다 주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이순신 선생은 임란 때 좋은 환경과 조건 하에서도 물론 일본 수군을 복멸하셨지만 정유재란 때는 원균(元均)이 패망해서 조선 수군의 선척이나 병졸이나 거진 다 없어져 버린 뒤에도 그 산일(散逸)을 수합해서 일본 수군을 전멸시킬 수가 있었다.) 사기가 떨치는 병대(兵隊)는 아무리 불리한 조건이라도 잘 극복하고 주어진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우리의 공부도 역시 그러하니 아무리 환경이 좋지 못하더라도 하루 한 시간이나 두 시간의 조용한 틈은 비집을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경험으로 미루어보면 새벽이 좋을지니 아무리 바쁜 사람이라도 새벽시간은 이용할 수 있을 것이며 아무리 소란한 주위더라도 새벽만은 잠잠할 것이다. 영국의 존 스튜어트 밀은 수십 년 동안 동인도회사에 근무하면서도 세계에서 제일가는 경제학자가 되었다 하니 그러한 큰 학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저 우리들의 지식견문을 높여갈 수 있는 정도의 독서는 어떠한 바쁜 직업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대개는 가능할 것이다.

[공부라는 건 학교에 가는 것만이 아니요 또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는 것만이 공부가 아닐지니 그런 건 모두 공부의 한 방편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본 한 바쁘다거나 혹은 분잡하다거나 하는 핑계로 독서를 게을리하는 사람은 바쁘지 않고 분잡하지 않은 좋은 환경에 있더라도 결코 공부하지 못할 사람들이다. 좋은 환경에 있게 되면 그들은 또 어떤 그럴듯한 핑계를 꾸며서 그날그날의 투안(偸安)을 탐하려 할 것이다.

또 더러는 공부할 생각이 간절하나 지도해 줄 이가 없고 따라서 향방을 모르기 때문에 공부를 하지 못한다는 사람도 있다. 일리있는 것 같기도 하나 이 또한 공부가 어떠한 것인지 모르고 지레 겁내는 사람의 말이다. 우리가 어떠한 여행을 함에 있어서 물론 안내서도 필요하고 대강의 노정도 미리 정하는 것이 편리하겠지만 언제든지 손을 이끌고 데려다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세밀한 여행기를 사전에 꾸릴 수는 없는 것이다.

가이드가 있으면 더 좋지만 없어도 길을 떠나보라. 중로에서 뜻밖의 사람을 만나 물어볼 수도 있고 또 대개는 자꾸 가는 중에 제절로 길을 알게 될 것이다. 공부도 이와 같아서 좋은 지도자가 있으면 더할 나위 없지만 그것은 만인이 다 바랄 수 없는 일이니 없는 그대로라도 근기 있는 노력을 쌓아가면 자연히 길은 트이는 것이다. 한 권 책을 읽고 나면 다음에 읽을 책은 제절로 알려질 것이다. 그리고 공부는 여행과 다른 것이 설사 지름길로 헤매는 일이 있고 노정을 그르치는 일이 있더라도 결코 무의미한 노력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힘쓴 만큼은 언제든지 제 보람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두들기라, 그러면 문은 열려질 것이다 하는 선성(先聖)의 말은 여기도 진리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는 구복(口腹)에 몰려서 공부에 마음 둘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수염이 댓 자라도 먹어야 산다는데 당장 양식거리가 걱정인 것을 어느 해가에 독서니 뭐니 할 계제가 되느냐, 그럴 여가가 있으면 한푼 돈이라도 더 벌어서 처자를 건사해 나갈 궁리라도 해야겠다고 그들은 말한다. 이러한 말들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물론 사실 그러한 사람도 없지 않겠지만 대개는 그렇게 군색하지도 않으면서 우유도일(優遊渡日)하는 핑계로 이런 소리를 곧잘 한다. 그러한 건 다시 거론할 필요도 없지만 설사 사실로 생활이 간구하더라도 그것만으로 향상에의 지향을 거부할 이유는 되지 않을 것이다.

민(民)은 이식위천(以食爲天)인 만치 구복이 위주가 되겠지마는 그렇다고 사람이 동물과 동렬에 내려서도 좋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날그날의 생활에 협위(脅威)를 받을지라도 어떻게 하면 가난한 중에서 좀 더 보람있는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을까 하고 모색하는 것은 동물이 아닌 인생의 특권일지며 또 의무일 것이다.

또 위에서 누누이 말한 바와 같이 공부는 결코 생활의 방도와 양립 못하는 것이 아니다. 옛날 한학자처럼 생활의 무능력자가 되는 것이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조반석죽(朝飯夕鬻)을 걱정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집에서도 새벽으로 독서성이 들리어 온다면 그 나라의 장래는 다행할 것이다. 또 물질적으로는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정신적으로는 얼마든지 넉넉할 수 있는 것이며 가난에 시달린 가족들끼리 모여서 깨끗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고 이야기하고 할 수 있는 것은 문화국민의 자랑이라 아니할 수 없다.

끝으로 또 한 가지 경계할 일은 나는 이만하면 어지간하다 하고 공부를 놓아버리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공부에의 길은 끝이 없는 것이어서 이만하면 족하다 하는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요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그러한 마음을 먹는 순간부터 자기도 모르게스리 퇴보를 개시하는 것이니 그러한 그릇된 생각을 가지는 사람이 있다고는 이념적으론 상정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실제로는 세상에 그러한 사람이 많다. 흔히들 교문을 나와서 취직을 하게 되면 내 학문의 수련은 이만하면 족하거니 생각하고 아주 책과 담을 쌓고 다시는 그와 교섭을 가지려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건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 중에도 많이 있으니 더욱 한심한 노릇이다.

이것은 물론 교육의 결함에 말미암은 것이겠지만 오늘날 사회의 저조(低調)는 여기 원인함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학교의 졸업증서는 학문에의 절연장(絶緣狀)이 아니고 이제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는 표적이어늘 모처럼 닦은 학문의 터전에 잡초가 길길이 자라나게 내버려 두니 그 개인은 물론, 민족국가로 보아서나 인류사회로 보아서나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민주주의자나 공산주의자나 모두 이론의 기초가 서지 않기 때문에 탈선을 곧잘 하고 기껏해야 공식론(公式論)을 고집해서 국가, 민생에 해독을 끼치고 그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긍해서 지성의 결핍이 통절히 느껴지는 것은 우리 민족 전체가 통혀 공부를 게을리하는 때문이 아닐까 한다. 빛나는 조국의 새 건설은 우리 민족 전체의 질적 향상이 무엇보다도 기본문제이다. 민족의 질적 향상은 민족을 구성하는 개인의 질적 향상을 기다려서만 가능하다. 그리함에는 무엇보다도 각인(各人)이 모두 부지런히 공부해야겠다. 삼천리 방방곡곡 가가호호에서 독서성(讀書聲)이 웅얼웅얼하고 우렁차게 들려오기를 간절히 대망(待望)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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