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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가 가상자산 산업에 시동을 걸었다. 그간 반쯤 제도권 밖에 놓여 있던 시장이 국정의 한가운데로 들어오고 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 인선부터가 시그널이었다. 실무형 인재라기보다 방향을 바꾸는 사람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재명 대통령도 공약집에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발행과 유통 등 활용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어떤 정책은 돈의 흐름을 바꾸고 어떤 정책은 산업의 판을 흔든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 화폐의 성격 자체를 바꾸는 정책도 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그렇다. 이건 단지 암호자산 산업을 위한 규제가 아니다. 성큼 다가온 디지털 화폐 시대에 ‘원화가 작동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 수 있느냐는 문제다.

이쯤에서 본질적인 질문이 하나 있다. “그렇다면 왜 굳이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만들어야 하는가.” 그냥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 쓰면 안 되는 걸까.
‘디지털 화폐 주권’의 문제여기에 답하려면 디지털 화폐의 세계에서 주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봐야 한다. 최근 미국 재무부 TBAC는 스테이블코인이 사실상 달러의 디지털 확장 수단이 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블록체인 생태계에서의 결제, 송금, 저장 기능은 이미 USDT나 USDC가 장악하고 있다. 많은 신흥국에서는 이미 스테이블코인이 자국 통화를 밀어내고 있다.

문제는 한국도 예외가 아니라는 데 있다. 디지털 세계는 국경이 없고 사용자는 빠르고 편리한 수단을 선택한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없으면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국내에서 사실상 기축통화처럼 기능하게 될 날이 올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결제 시장의 주도권을 잃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통화의 주권을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디지털 자산이 금융의 기본 단위로 전환되는 이 시점에서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없다면 한국은 글로벌 자산 네트워크에서 점점 주변부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한국 정부가 구상 중인 스테이블코인 제도는 초기에 은행 중심 모델을 채택할 것처럼 보였다. 이는 일본이나 유럽이 먼저 제도화한 선례에서 기인한 자연스러운 선택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구조적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에 한국은 민간 중심의 확장을 택할 것으로 보인다.

은행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규제 수용성과 금융안정성 면에서는 유리하지만 확장성과 글로벌 연동성에서는 본질적인 제약을 안고 있다. 은행 인프라는 퍼블릭 블록체인 기반의 스마트컨트랙트, 디파이(DeFi), 글로벌 결제 생태계와 호환되기 어렵다. 리워드 설계에도 제약이 많아 사용자 유인을 끌어내기 어렵고 국제 경쟁에서도 우위를 잃을 수밖에 없다.

반면 미국 등에서 빠르게 시장을 확장한 스테이블코인은 대부분 자본시장 기반 모델이다. 민간 기업이 발행을 주도하고 준비자산은 MMF나 단기 국채 등으로 구성된다. 상환은 스마트컨트랙트 기반으로 자동화되며 회계 감사도 외부 전문기관을 통해 수행된다. 이렇게 구조화된 신뢰는 기술적으로 실시간 검증 가능하며 글로벌 연동성을 자연스럽게 확보한다. 결국 핵심 쟁점은 ‘누가 발행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구조가 작동하는가’에 있다. 구조를 통해 신뢰가 실현되는 시대, 정책의 기준 또한 구조 중심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에서 또 하나의 큰 이슈는 ‘담보 자산’과 관련한 논쟁이다. 미국의 경우 단기 국채, 현금 등 안정적인 자산만 담보로 인정되지만 한국은 단기채 비중이 작고 통안채 활용에도 제약이 있다. 결국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담보 구조는 제도 설계의 핵심 변수가 될 것이다. 이와 함께 스테이블코인을 지급수단으로 볼 것인지 투자자산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 회계처리, 세무체계, 이자 허용 여부 등도 달라진다.
스테이블코인이 ‘금융’이 될 수 있는가지난 6월 5일 미국 스테이블코인 발행사 서클(Circle)이 나스닥에 상장했다. 공모가는 31달러, 첫날 종가는 83.2달러로 마감해 단 하루 만에 주가가 168% 뛰었다. 단순한 기술주 상장을 넘어 스테이블코인 기업이 금융시장에 어떤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이벤트였다. 서클은 USDC라는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한다.

그 구조는 기존 은행 시스템과는 완전히 다르다. 예금보험 대상도 아니고 지급준비금 의무도 없다. 대신 서클은 자사의 준비자산 전량을 단기 국채와 현금으로 유지하고 있으며 준비금의 대부분은 블랙록이 운용하는 머니마켓펀드에 담겨 있다. 현금은 BNY멜론, JP모간 등에 보관되고 딜로이트를 통해 매월 준비금 증명 보고서를 공개한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거버넌스의 변화다. 과거 코인베이스와 공동 운영하던 센터(Centre) 재단은 해산됐고 현재는 서클이 발행과 운영 전권을 모두 갖는다.

스마트컨트랙트 키 관리까지 직접 수행하며 운영 독립성과 일관성을 확보했다. 코인베이스는 여전히 서클의 지분을 일부 보유하고 있지만 발행 주체는 단일화됐다.

문제는 ‘스테이블코인 기업이 상장사로서 어떤 자격을 갖는가’다. 서클은 미국 각 주의 송금업 라이선스를 보유하고 있지만 은행이 아니기 때문에 기존 금융사와 동일한 기준으로 보장받지는 못한다. SVB 파산 당시 일부 예치금이 묶였던 경험도 있어 법적 책임보다는 ‘신뢰 기반 자발성’에 기댄 구조라는 점은 여전히 논란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클의 상장은 스테이블코인을 금융 인프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서클의 USDC는 실시간 결제, 자산운용, 디파이 인프라에 가장 많이 사용되며 자금세탁방지(AML) 및 컴플라이언스 체계도 테더보다 훨씬 엄격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제도 친화적인 기업으로 간주된다.

서클의 상장은 한국에도 시사점을 던진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민간 중심으로 발행하려면 이와 같은 투명성과 거버넌스가 전제돼야 한다.

현재 국내 정부가 추진하는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당장 결제 및 송금 시스템에 변화를 줄 수 있다. 블록체인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거래 규모는 이미 비자(VISA), 마스터카드 같은 글로벌 결제 네트워크를 넘어섰다. 기존 간편결제, 지급결제 시장의 플레이어들에게는 위협이자 동시에 새로운 기회가 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가장 큰 수혜를 받을 산업은 ‘디지털 지갑 인프라’를 이미 확보한 간편결제사들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스테이블코인을 단순 유통이 아니라 서비스 전반에 녹여낼 수 있는 플랫폼 구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영역은 금융자산의 토큰화다. 단기자금 운용 수단으로 MMF, 국채, 부동산 수익증권 등을 블록체인 기반으로 유통시키는 움직임은 이미 해외에서는 시작됐다. 스테이블코인은 이들 자산의 거래 단위를 담당하며 실시간 결제와 자동 상환의 기술적 기반을 제공하게 된다. 이 변화는 기존 증권사, 자산운용사 등 금융사 전반에 위협이자 기회가 될 것이다.

금융의 국경이 사라지고 자금의 이동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면 기존의 물리적 금융 인프라보다는 디지털 API 인프라가 핵심 경쟁력이 된다. 기존 금융기관들이 적극적으로 생태계에 편입되지 않으면 기술 기반 플랫폼 기업들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제 기술이 아니라 구조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누가 발행하느냐보다 어떤 구조가 글로벌 시장에서 작동하는가가 중요하다. 디지털 머니의 질서는 제도적 권위보다 기술적 구조와 시장 호환성이 좌우한다. 결국 지금의 선택은 단지 정책이 아니라 디지털 경제에서의 생존 방식을 결정하는 일이 된다. 한국은 빠르진 않았지만 아직 늦지는 않았다. 오히려 일본이나 유럽의 시행착오를 충분히 학습할 수 있는 시점이다. 중요한 건 의지다. 수용할 것인가, 주도할 것인가. 따라갈 것인가, 설계할 것인가.

조태나 유진투자증권 애널리스트

한경비즈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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