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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과도한 비실명화·수수료…높기만 한 ‘열람 장벽’
김정희원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교수(왼쪽에서 두번째)와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활동가들이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판결문 접근성에 관한 헌법소원 청구에 앞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왼쪽부터 강성국 정보공개센터 활동가, 김정희원 교수, 정보공개센터 조민지 사무국장·이리예 활동가. 강윤중 기자 [email protected]


인터넷 열람 서비스 등록된 판결문

2023년 47만건, 전체 사건 ‘3분의 1’

실명 검색은 전국서 단 한 곳만 가능


수십년 걸쳐 제도 개선되고 있지만

‘재판 심리 공개’하라는 헌법에 모순

법사회학 교수·변호사·활동가들

“재판 공개 원칙 미충족” 헌법소원

이 대통령도 ‘공개 범위 확대’ 공약


법원은 개인정보 등 이유로 ‘난색’

법조계 “사법부 의지 있으면 가능”


“AX정당 소속 EJ국회의원은 2021. 12. 23. SNS에 사진을 게시했다. 그 사진에는 피고인, Y, AJ, CN 등 4명만이 보이고 피고인은 볼마커가 꽂힌 모자를 쓰고 있다.”

“J시는 U부지의 용도지역 변경을 해주더라도 그 과정에서 위 부지가 100% 주거 용도로 활용되는 것을 막고 용도지역 변경 등을 조건으로 BB와 협의를 거쳐 R&D 시설 부지를 최대한 확보함으로써 당초 J시의 도시기본계획대로 FC 등 업무시설을 확대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이 암호문 같은 글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해독이 어렵다면 여기 힌트가 있다. ‘AX’는 국민의힘, ‘EJ’는 박수영, ‘Y’는 김문기, ‘J’는 성남, ‘U’는 백현동 등이다.

이제는 조금 더 명확해진다. 이 글은 이재명 대통령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항소심 판결문 일부다. 법원이 판결을 선고한 뒤 개인정보 유출을 우려해 비실명화 처리를 한 판결문 모습은 대부분 이렇다. 법원이 ‘대부분 판결을 공개하고 있다’고 설명하지만 ‘사실상 비공개’라는 비판을 받는 이유다.

대한민국 헌법 109조는 “재판의 심리와 판결은 공개한다”고 정한다. 모든 시민이 언제든 재판 과정을 직접 지켜보고, 개인과 사회에 직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사법부 결정을 감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현실은 이와 다르다. 법원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판결문의 장벽은 여전히 높다. 수십년에 걸쳐 조금씩 제도가 개선됐지만, 일반 시민이 재판 과정과 결과를 기록한 판결문을 읽어보려면 아직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대부분 공공기관이 정책자료와 회의록 원문 등을 공개하고, 시민이 이를 인터넷 검색만으로 찾아볼 수 있는 시대 흐름에서도 벗어나 있다.

최보민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간사는 “법원은 행정부나 입법부에 비해 담장이 높고 폐쇄적이라 시민들이 제대로 감시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며 “법원 내에서 어떻게 재판이 이뤄지고 있는지 국민들이 알 수 있는 가장 쉽고 확실한 방법이 판결문 공개”라고 말했다.

판결문 공개는 시민사회의 숙원일 뿐 아니라 대통령 공약 사항이기도 하다. 이 대통령은 대선 때 하급심 판결문 공개 범위를 확대하겠다고 약속했다. 시민들의 사법 서비스 접근성을 높인다는 취지다. 새 정권 출범 직후 사법개혁이 속도를 내는 만큼 법조계 안팎에서는 “판결문 공개가 진정한 사법 민주화를 위한 첫걸음”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법관이 아닌 사람이 법원 판결문을 볼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인터넷 열람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인데, 법 지식이 많지 않은 일반 시민이 사용하기는 상당히 까다롭다.

전세사기 피해가 의심되는 상황에서 관련 판결문을 찾는다고 가정해보자. 검색창에 ‘전세사기’를 입력하면 여러 판결문이 나온다. 그런데 키워드 근처 800~900자만 미리보기가 제공돼 범행 수법이나 가해자의 형량 등 구체적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다. 결국 여러 건의 판결문 열람을 신청해 그중에 원하는 내용이 있기를 바라야 하는데, 판결문 하나당 수수료 1000원을 내야 해 비용 부담이 작지 않다.

법원에 판결서 사본을 신청하는 방법도 있지만 사건번호 등 구체적 정보를 알지 못하면 이용 자체가 어렵다.

판결문이 전부 공개되는 것도 아니다. 일반 시민에 공개되는 판결문은 2013년 1월1일 이후 확정된 형사 사건과 2015년 1월1일 이후 확정된 민사·행정·특허 사건, 2023년 1월1일 이후 선고된 민사·행정·특허 사건 미확정 판결문으로 제한된다. 그 이전의 판결과 형사 미확정 판결문, 민사·행정·특허 소액사건 판결문 등은 검색해도 찾을 수 없다.

대법원 사법연감과 김용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자료에 따르면 법원에서 선고된 전체 본안 판결 중 인터넷 열람 서비스를 통해 검색 가능한 판결문은 2023년 47만건(37.4%), 2022년 42만건(34.5%), 2021년 42만건(31.5%), 2020년 40만건(29%)이었다. 전체 사건 중 3분의 1 정도만 ‘검색 가능한 판결문’으로 등록된 셈이다.

과도한 비실명화 작업을 거치는 점도 문제다. 온라인에 등록된 판결문에는 사람 이름이나 법인명 등 각종 고유명사가 모두 알파벳으로 표시돼 있어 키워드 검색만으로는 찾기가 어렵다. 잘 알려진 정치인, 고위 공직자에 대한 선고도 예외가 아니다. 가령 이 대통령의 공직선거법 사건 판결문도 ‘이재명’이나 ‘성남시’ ‘대장동’ 등의 단어로 검색해선 찾을 수 없다. 판결문을 찾는다고 해도 곳곳에 알파벳 문자가 등장해 한눈에 이해하기가 어렵다. 법조계 일각에선 “일반 시민들에게 판결문은 사실상 비공개”라는 지적이 나온다. 유정훈 변호사는 “비실명화 처리된 판결문은 변호사들이 봐도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는 경우가 많다”며 “법원이 공개하는 판결문의 범위가 확대된 건 맞지만, 수용자 입장에서는 체감되지 않는 변화”라고 말했다.

실명으로 된 판결문 전체를 검색할 수 있는 곳은 전국에 딱 한 군데뿐이다. 경기 고양시에 있는 법원도서관이다. 이곳을 방문하려면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하는 데다 ‘자격’이 필요하다. 대법원 내규에 따르면 법원도서관 이용 대상자는 1호(검사, 검찰공무원, 변호사, 법무사, 대학교수), 2호(국가공무원과 공공기관 임직원), 3호(언론사 소속 기자)로 제한돼 있다. 도서관 안에서 판결문을 검색할 시간은 80분만 주어지며, 사진을 찍거나 내용을 옮겨 적는 등 행위는 곧바로 제지를 받는다. 2시간 안에 필기구를 이용해 사건번호를 지정된 종이에 메모하는 것만 허용된다.

김정희원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등은 지난 13일 “법원의 제한적인 판결문 공개가 국민의 알권리를 침해한다”는 취지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이들은 “공간적으로 제한된 법정에서 판결의 주문만 낭독하는 것으로는 헌법이 정한 재판 공개 원칙이 충족된다고 볼 수 없다”며 “현행법이 일반 국민들이 판결문을 볼 기회를 박탈해 알권리를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과거에도 판결문 검색 등을 시도하다가 불편을 겪은 개인이 헌법소원을 낸 사례는 있지만, 각계 시민들이 집단으로 문제제기를 한 건 처음이다.

이번 헌법소원 청구인단에는 김정희원 교수 외에 박지환 변호사, 강성국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활동가, 시각장애가 있는 송민섭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활동가도 이름을 올렸다. 각각 법사회학 연구자·법조인·시민사회 활동가인 이들은 “학자들은 판례의 법리 흐름을 분석하면 법제도 개선 방향을 제시할 수 있고, 변호사는 더 나은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소송 전략을 세울 수 있으며, 시민활동가들은 법원 판결문을 통해 현행 제도의 문제를 파악해 개선책을 모색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들은 청구서에서 “평소 법원 판결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잘 알지 못하던 국민이 갑자기 사건 당사자가 된다면 자신에게 내려지는 판결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사법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도 했다. 이어 이용 대상자와 열람 행위를 지나치게 제한하는 법원도서관 운영 방식, 과도한 판결문 열람 수수료, 수정할 수 없는 이미지 파일로 제공되는 판결문에 시각장애인 접근권 제한 등이 피해 최소성 원칙과 과잉 규제 금지 원칙에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일반 시민들도 판결문을 쉽게 볼 수 있어야 하는 이유는 더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법이란 법관들의 것이 아니라 국민의 것이어야 하잖아요. 예컨대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헌재의 탄핵 결정문도 시민들이 문장 하나하나 곱씹으면서 법 논리가 실제 사회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알 수 있었죠. 이처럼 시민들이 언제든 법원의 판단을 알 수 있도록 하라는 게 우리 헌법의 정신입니다.” 사법개혁 문제에 목소리를 높여온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법원이 전면 공개를 꺼리며 내세우는 가장 큰 이유는 개인정보 침해 우려다. 대법원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원칙적으로 방향성에는 공감하지만, 개인정보 보호와 무죄추정 원칙 때문에 신중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현재 열람이 제한된 미확정 형사 사건의 경우 ‘유죄가 확정되기 전까지 피고인은 무죄로 본다’는 법의 대원칙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판결문 공개 확대를 주장하는 쪽에선 “사법부가 의지만 가지면 가능한 일”이라고 반박했다. 한상희 교수는 “논의조차 해보지 않고 개인정보를 이유로 드는 건 의지가 없다는 뜻”이라고 했다. 한 교수는 “법원이 적극적으로 대안을 고민하기보다 소극적으로 관행을 따르고 있는 것”이라며 “성범죄 사건처럼 특수한 경우에는 가명 처리를 하거나 일부 내용만 비공개하는 등 얼마든지 손쉬운 방법이 있다”고 했다.

유정훈 변호사는 “법이 법원의 서랍 안에만 있으면 무슨 의미인가”라고 되물었다. “판결문이 전부 공개되면 시민들이 어떤 분쟁 상황에 닥쳤을 때 유사한 판례를 찾아볼 수 있고,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예측해 불필요한 소송도 줄어들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유 변호사는 “법원이 몇개 판결만 임의로 공개하는 게 아니라, 모든 판결이 공개 대상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했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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