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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곤 편집인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은 빈농의 여덟째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이 어려워 초등학교 4학년 때 자퇴했다. 10세부터 거리에서 구두를 닦고 땅콩을 팔았다. 19세 때 금속공장에서 왼쪽 새끼손가락이 잘려나가는 사고를 당했다. 가난과 차별의 한을 품고 노동 운동에 투신했다. 강성 노동자당을 창당하고, 3전4기 끝에 2002년 말 대통령에 당선됐다. 브라질 최초의 좌파 대통령이었다. 머리로 선택한 좌파가 아니라 어릴 때부터 몸으로 익힌 좌파였다.

룰라, 정적 끌어안고 친시장 선회
실용으로 브라질 살린 좌파 지도자
룰라와 여러모로 닮은 이 대통령
‘모두의 대통령’ 그의 선택에 달려

당시 전 세계가 브라질을 걱정했다. 브라질 우파는 두려움에 떨었다. 울분과 적대감이 켜켜이 쌓인 대통령이 등장한 터였다. 룰라가 반시장 포퓰리즘 정책과 보복의 칼을 휘두를 것으로 보였다. 1999년 집권한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같은 남미의 좌파 지도자들이 비슷한 길을 걷고 있었다. 남미병에 걸려 물가가 치솟고, 실업자가 길거리에 쏟아졌다. 지도자들은 자신의 실정을 덮기 위해 더 센 포퓰리즘을 동원했다. 재정이 바닥나고 국가부도 위기에 처했다. 브라질도 희망이 없어 보였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집권한 룰라는 다른 선택을 했다. 예상을 뒤엎고 시장 친화 정책을 폈다. 성장 우선과 자유무역에 주력했다. ‘서민을 진짜 위하는 길은 파이를 나누기보다 키우는 것’이라며 룰라식 실용주의를 밀어붙였다. 국제통화기금(IMF) 요구대로 포퓰리즘을 멀리했다. 기득권 공무원의 반발을 물리치고 연금개혁에도 성공했다. 빈곤층·노동자·농민 등 지지층의 반발이 극심했다. 그는 “노동지도자 룰라는 노동자를 위해 일했지만, 대통령 룰라는 브라질 국민 전체를 위해 일한다”는 말로 대신했다. 놀라운 변신이었다.

말로만 탕평을 외치지 않았다. 진영을 뛰어넘는 유연함으로 정적을 끌어안았다. 정파를 막론하고 실력 우선으로 사람을 썼다. 미국 보스턴은행 CEO를 지낸 우파 국회의원을 중앙은행 총재에 앉혀 해외투자자를 안심시켰다. 부통령도 우파 재벌 출신이었다. 노동운동을 하면서 터득한 특유의 갈등 조정 능력이 빛을 발했다. 소통과 믿음의 리더십으로 반대파와 끊임없이 대화하고 설득했다. 2003년 집권 초 룰라는 이런 말을 했다. “야당이나 재야에 있을 때는 보란 듯이 뻐기고 다닐 수 있었다. 책임질 일이 없으니까. 지금 우리는 권력을 잡았다. 이제는 책임 있게 행동해야 한다.” 급진 노동운동가 이미지에 불안을 느끼던 브라질 우파도 그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지도자 한 사람의 올바른 선택으로 나라가 선순환에 들어선 것이다.

그의 ‘삼바 신화’는 눈부시다. 2003~2010년 집권 8년간 경제성장률이 연평균 5% 안팎에 달했다. 1억9000만 인구 중 2100만 명이 빈곤에서 탈출했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같은 기간 7203달러에서 1만465달러로 늘었다. 실업률(12.3→5.7%), 물가상승률(12.5→5.8%)도 개선됐다. 2010년 퇴임 당시 룰라의 지지율은 87%에 달했다.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통령’이라는 찬사가 따라다녔다. 2022년 말 12년 만에 재집권한 후에는 1기 때만 못하긴 하다. 극심한 정치·경제 양극화로 지지율이 40%대에 머물고 있다. 어느덧 80세로 건강도 좋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1기 때 브라질을 살린 공적은 누구나 기억하고 있다.

룰라와 달리 한국의 좌파 대통령은 진영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룰라와 비슷한 시기에 취임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연금개혁을 해냈으나 집권 내내 지지층과 시장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혼란이 끊이지 않았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 때보다 오히려 퇴보했다. 이념과 진영에 함몰돼 파이를 키우기보다 나누는 데 몰두했다. 빈부격차가 더 벌어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노·문 전 대통령과는 사뭇 다르다. 생각이 다르고, 지지세력도 다르다. 이 대통령을 불안하게 지켜보면서도 ‘노·문보다 나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 이유다. 그는 룰라와 닮았다. 화전민의 다섯째로 태어났다. 초등학교만 마치고, 공장에 들어간 소년공 출신이다. 일하다 팔을 다친 것까지 룰라와 같다. 노동자·서민을 대변하다 천신만고 끝에 대통령이 된 것이나 경제가 어려울 때 집권한 것도 비슷하다. 국민의 절반은 걱정과 두려움에 싸여 있는 상황도 유사하다. 둘 다 ‘나는 좌파가 아니다’고 말한다.

이 대통령이 2000년대 초반 삼바 신화를 일궈낸 룰라처럼 했으면 한다. 취임 일성으로 ‘실용적 시장주의’를 천명한 건 다행스럽다. “박정희 정책과 김대중 정책을 모두 쓰겠다”고 했다. “먹고사는 게 중요하지 이념, 진영, 지역이 뭐가 중요하냐”고 말했다. 우클릭이 거짓이 아니었으면 한다. 현실성이 떨어지거나 부작용이 있는 공약도 정비해야 한다. 꼭 지킬 필요 없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입법을 밀어붙여서도 안 된다. 정책, 인사, 외교 등 국정의 틀을 잡는 첫 100일이 특히 중요하다. 5년 뒤 성공한 대통령, 모두의 대통령으로 기억될 수 있느냐는 이 대통령의 선택에 달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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