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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 청년이 떠난 자리]
<중> 오답 속 청년을 부를 해법
혁신도시 20년, 산학연 협력 통한 성장까지 먼 길
정권 따라 부침 겪고 하드웨어 중심 정책 한계도
"균형발전 마중물 역할하려면, 선택과 집중 필요"

편집자주

지난 20여 년간 '균형발전'을 외치지 않은 정부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는 더 벌어졌고, 지방소멸 위기는 이제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저출생, 가계부채 상승으로 이어지는 지방소멸은 한국 경제의 잠재성장률을 0%대로 끌어내릴 수 있는 최대 리스크입니다. 이런 기로에서 출범한 이재명 정부는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을 시작으로 균형발전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국일보는 지방을 떠난 청년들의 시선으로 위기의 현실을 들여다보고, 전문가들과 해법을 모색해봤습니다.

4일 충북 음성군과 진천군 사이에 위치한 충북혁신도시의 한 도로에 차량 몇 대가 지나다니고 있다. 음성=오지혜 기자


도로는 고요했다. 지난 4일 수요일 오전 11시 충북 음성 시내, 4차선 갓길에 차를 잠시 세웠다. 창밖을 보며 전화 한 통을 하는 동안, 시야에 들어온 건 공사 차량 몇 대가 전부였다. 바로 옆 버스정류장에는 버스도 사람도 지나가지 않았다. 점심을 마치고 인근을 둘러볼 요량으로, 갈 만한 곳을 묻자 식당 직원이 손을 휘휘 저었다.

"볼 만한 전통시장도 차로 15분 넘게 걸려요. 장날도 아니고요. 더운데 그냥 근처 카페로 가세요."

교육·정보통신기술(ICT) 관련 11개 공공기관이 들어서고 3,000여 명이 일한다는 충북혁신도시는, 수업시간 텅 빈 복도 같았다
. 이곳에서 8년간 직장을 다녔던 김장현(가명·37)씨에게는 익숙한 풍경이다. 평일 낮에는 건물 안에라도 사람이 있지만 주말이 되면 절반은 사라진다. 도시 밖에 살거나 살고 있어도 주말마다 서울이나 세종으로 빠져나가는 주말부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공원도, 문화시설도 전혀 없어요. 시간을 보낼 곳이 전무해요. 상사들을 보니까 자녀가 초등학교까지는 여기서 살아도 그 이상이 되면 결국 떠나요. 교육 때문에요."

4일 오후 충북 음성군과 진천군 사이에 위치한 충북혁신도시 내 도로에 차가 몇 대 통행하고 있다. 갓길에 잠시 차량을 정차하고 사진을 촬영하는 동안 사람도 잘 볼 수 없었다. 음성=오지혜 기자


충북 만의 풍경은 아니다.
전국 10개 혁신도시로 공공기관 이전이 완료된 지 6년
이 흘렀다. 2012년 이후 112개 기관, 약 4만2,000명이 터를 옮겼다.
①공공기관을 발판으로 기업과 대학을 끌어모아 ②산학연 클러스터를 활성화해 지역에 ③혁신의 새 바람을 불어넣겠다는 청사진은, 1단계에서 멈춰
버렸다. 건물은 생겨났지만 사람 모으는 일은 계획처럼 풀리지 않아서다. 이전 공공기관 직원 가운데 기혼자 10명 중 4명(국토교통부 2024년 말 기준)은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살거나 다른 도시에서 출퇴근한다. 가족과 함께 이주한 경우는 전체 직원의 40% 수준이다.

정착한 사람들의 만족도도 100점 만점에 70점이 채 안 된다. 한국일보가 입수한 국토부의 '2024년 혁신도시 정주 여건 만족도 조사 결과'를 보면, 거주자의 정주 여건 만족도는 69.4로 2020년대 내내 큰 변화가 없었다. 불만은 명확했다. 자가용 아니면 마땅한 시내 이동수단이 없어서 교통환경 만족도(62.3)가 가장 낮았다. 보육·교육환경 만족도(66.3) 역시 근 5년간 제자리였다. 학교나 학원의 선택지가 좁고 성인이 다닐 교육시설도 부족한 탓이다.

그래픽=송정근 기자


인구 유입, 정주 여건 개선, 지역 경제 활성화, 소득 향상이란 네 개의 톱니바퀴는 각자 헛돌고만 있다. 맞물려 돌아가야만 혁신도시가 비로소 균형발전의 마중물이 될 텐데, 지금은 삐걱대는 소리만 들린다.
혁신도시의 궤도가 어긋난 첫 지점부터 되살펴봤다
.

공치사가 먼저, 정치 논리에 갇힌 도시



"균형발전이 왜 필요한지, 혁신도시는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기보다는 공치사에 바쁜 분위기가 있었어요. 한두 곳 얘기가 아닙니다."

초대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장으로서 혁신도시 밑그림을 그린 성경륭 상지대 총장
은 정책의 패인을 묻자, 20년 전 기억을 꺼냈다. 혁신도시 정책의 윤곽이 드러나고 전국을 돌며 정책 설명회를 하던 때 만난 지방자치단체장, 국회의원, 대학 총장, 기업가 등 지역 인사들의 표정을 떠올렸다. 다들 공공기관 이전을 위한 부지를 개발하고 인근에 아파트 단지 등을 건설할 계획 세우기에 바빴다. 그런 '공로'를 자랑한 도지사나 국회의원들은 재선도 하고 삼선도 했다. 정책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지역에 뿌리내리지 못한 채 진행됐다고 그는 돌아봤다.

성경륭 상지대 총장이 6일 서울 강남의 한 사무실에서 본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전날 만나고 온 한 지자체장이 '우리 시에 이런 걸 유치했습니다'라고 말하는 내용들로 당장 지역 언론에 보도가 됐어요. 그 힘으로 다음 선거를 생각하는 거죠. 장기적 협력을 위해 서로 소통한다는 얘긴 듣지를 못했어요."


지방소멸 위기를 당장 체감하지 못하는 게 주류의 분위기였고, 당장 표심을 잡는 일이 급했다. 그 앞에서 공공기관 이전은 시작일 뿐, 지역 산업과 연구기관 등이 협력해야만 진짜 '혁신'도시가 될 수 있다는 말은 공허했다. 성 총장은 설득하려 노력했지만, 시간제한이 있었다고 해명 아닌 해명을 내놨다.
혁신도시로 균형발전에 시동을 걸려고 했던 정권도, 위원장도 '임기'라는 시한에 매어 있었다.


중단과 시행 반복... 정권 따라 정책 표류



정책은 정권 임기가 끝나자 표류했다.
이명박 정부(2008~2013년)는 이전 정부의 균형발전 정책을 완전히 뒤집었다.
취임식 연설에서 '지역 균형발전'은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대신 도시의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는 데 방점을 찍었다. 서울의 경쟁력 제고를 명목으로 개발제한구역을 해제하는 한편 공공기관 이전계획 승인은 차일피일 미뤘다. 결국 당초 이전 완료 목표 시점이던 2012년에 이전을 완료한 기관은 4곳(3.5%)에 불과했다.

"제도가 조금 불완전하게 만들어져도 그 안에 사람들이 명확한 방향성을 공유하고 움직이면 성과는 좋을 수 있어요. 하지만 지난 20년간 균형발전 정책은 오락가락했죠."

정책의 갈지자 행보가 혁신도시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고 송우경 산업연구원 지역균형발전연구센터장은 말했다. 무엇보다 중장기적으로 정책을 끌고 가면서 부처 간 조율을 도맡아야 할 대통령 직속 자문위원회(현 지방시대위원회)가 제 역할을 못했다. 대통령의 관심이 줄면 힘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회의 횟수에서도 잘 드러난다. 노무현 정부 당시 회의를 72회 열고 29회(40%)를 대통령이 주재한 데 반해, 이명박 정부는 49회 회의 중 단 9회만 대통령이 지휘했다.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 시절로 오면 대통령의 회의 주재는 1, 2회에 그쳤다.

그래픽=송정근 기자


'짓고 세우고' 건설 중심... 콘텐츠 빠진 균형발전



우여곡절 끝에 2019년 말에야 공공기관 이전은 마무리됐다. 다행히도 지역 청년들에게는 좋은 일자리가 늘어난 효과가 분명했다. 학생 취업을 돕는 취업처장도 맡았던
전인 영남대 교수
는 "공공기관들이 내려온 덕분에 학생들이 도전할 선택지가 늘어났고 그래서 지역에 남는 효과가 분명 있었다"고 힘줘 말했다. 다만 그 이상의 파급 효과를 내진 못했다는 데 동의했다. 지역 기업이나 대학과 손잡고 역량을 키울 수 있는 활동까지는 없었다. 지역 일자리를 연구하는 이상호 한국고용정보원 박사는 이 부분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이전된 공공기관이 지역과 호흡하며 무언가를 하느냐? 대부분 중앙정부 업무만 하죠."

중앙부처의 연구과제를 수행하는, 예전 방식대로 일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기관의 특성을 살려 산학연 협력을 이끌고 '혁신'을 도모하는 분위기가 전혀 나질 않았다. 이소영 한국지방행정연구원 부원장도 "조직 간 거래도 일회성, 시혜성 사업의 성격이 강하다"고 꼬집었다. 특성화한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거래보다는, 지역 생산품 공공구매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지난해 전국 150개 공공기관이 지역발전 명목으로 집행한 예산(3조1,400억 원)의 절반 이상(56.6%)이 '지역 재화 우선 구매'에 쓰이고 말았다.

그 바탕에는
하드웨어를 중심으로 한 개발론
이 자리잡고 있다. 사무실 건물, 아파트를 짓고 기업이 들어올 산학연 클러스터 부지 조성을 하는 사업 등에 주로 예산이 투입된다. 그 안을 채워 갈 소프트웨어에도 지속적인 예산이 필요하지만, 그 책무는 중앙에서 지방으로 넘어오면서 예산 확보가 어려워진다. 균형발전 정책들이 부딪히는 현실이라고 이 박사는 전했다.

"소멸위험인 한 지역에 갔더니 국비 지원을 받아 출산지원센터 건물을 지었더라고요. 그런데 막상 보육이나 출산 지원 같은 프로그램을 운영할 사람이 없어요. 그 예산은 지역에서 감당해야 하는데 꾸준히 하기 어렵거든요."

그래픽=송정근 기자


형평성 고려하다... 'n분의 1' 함정



형평성에 밀린 운용도 정책의 힘을 빼놓았다.
혁신도시는 전국 10곳의 입지를 선정하는 단계부터 이전 대상 공공기관을 분배하는 과정까지, '소지역주의'에 지속적으로 부딪혔다
. 2004~2005년 '혁신도시 선정 결정에 반발해 소송' '공공기관 유치 두고 경쟁 치열' 같은 제목의 보도들이 쏟아졌다.

하수정 국토연구원 연구위원은 "혁신도시 10곳은 우리 국토 면적에 비해 너무 많다"는 데 동의했다. "그런데 거점도시로 두세 군데만 집중 지원한다고 하면 '왜 저 지역만 해 줘'라는 반발이 나올 게 뻔하고, 결국 자꾸 N분의 1식으로 예산을 뿌리게 되는 거예요."

그럼에도 그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고 돌아봤다. 총 131개 공공기관이 혁신도시 10개와 세종에 퍼지면서,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기에는 부족한 상황이 됐다. 거점도시로서 성장하기에는 태생적 한계가 있는 셈이다.

한정된 예산을 쪼개 쓰다 보니 효과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사이 수도권은 멈추지 않고 질주했다.
인력과 자본은 계속해서 수도권으로 빨려 들어갔다.

2011년 7월 17일 부지조성 공사가 진행 중인 충북 진천·음성 혁신도시 건설 현장. 한국일보 자료사진


"질식사 직전, 마지막 기회 잡아야"



"거의 질식사할 지경이에요. 길어 봐야 10년 남았어요."

대한민국이라는 배는 이미 균형을 잃었다. 사람도 돈도 기술도 수도권으로 쏠린 탓이다. 대통령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에서 자문위원으로도 일한 김종한 경대 교수는 지금 상황을 '에어포켓(배 안 공기층)이 조금 남은 선실'에 비유했다.

새 정부 출범으로 추가 공공기관 이전에 대한 기대감은 부풀어 오르고 있다. 벌써 기존 혁신도시에 보태느냐, '균형'을 위해 다른 곳에 배치하냐를 두고 지역 간 갈등의 불씨가 다시 타오르는 모양새다. 그나마 혁신도시도 없었다면, 좋은 일자리를 찾는 청년의 이탈이 더 빨랐을 것이란 점에서 '절반의 성공'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하지만 거기서 위안을 받고 끝내면 "사막 위 모래성"(송 센터장)으로 될 수밖에 없다. 균형발전의 마중물이 돼야 할 혁신도시를 제 궤도에 올려놓을 마지막 기회를 놓친다면, 어떻게 될까. 20년 전을 돌아본 성 총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대로 또 공공기관 '이전'만 하면, 부동산 개발사업으로 끝나버릴 겁니다."



목차별로 읽어보세요

  1. ① <상> 청년, 지방과 헤어질 결심
    1. • ‘최고의 직장’을 떠날 결심 “너 여기서 계속 살 거야?”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61218210001385)
    2. • "떠난다면, 보내 줄 수밖에"... 청년도, 기업도, 경쟁력도 놓치는 지역의 속앓이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61000180002963)
  2. ② <중> 오답 속 청년을 부를 해법
    1. • 10년째 주말이면 고요한 혁신도시... "수도권 쏠림에 질식사할 지경"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61214540005674)
    2. • '해수부 부산 이전' 포문 연 이재명 정부 균형발전, 성공 열쇠 3가지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60416270005449)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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