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종로5가의 약국거리. 기사 내용과 사진 속 약국은 특별한 관련이 없음. /이호준 기자
서울 종로5가에 약국이 몰려 있는 ‘약국 거리’. 지난 4일 오후 조선비즈 기자가 한 약국에 들어가 간(肝) 건강 영양제 1상자 가격을 물었더니, 약사가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나요”라고 되물었다.
기자가 “3만3000원이요”라고 하자, 약사는 조제실 안에 있는 다른 약사와 이야기를 해보겠다며 들어갔다. 밖으로 나온 약사는 한숨을 푹 쉬더니 “나도 먹고살아야 하지만 그래도 (손님이 싼값에) 해달라면 해줘야겠죠. 3만3000원으로 해요”라고 말했다.
다른 약국도 사정은 비슷했다. 같은 날 오후 30대 남성이 같은 제품을 얼마에 파는지 묻자 약사는 “4만원”이라고 답했다. 이 남성이 “다른 약국에서는 3만5000원에 팔더라”라고 하자, 약사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그럼 3만5000원에 드릴게요”라고 했다.
이 남성은 “말 한마디로 약값 5000원을 깎았다”면서 “종로5가 약국 거리에서 약을 사려면 ‘흥정의 기술’이 필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남성과 함께 온 30대 여성은 “실제 가격이 얼마이기에 말 한마디에 5000원을 깎아줄 수 있는지 궁금하다”면서 “처음부터 부풀린 가격을 붙여놓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고 했다.
서울 종로구 종로5가 약국거리. 대형약국이자 탈모인의 성지로 불리는 보령약국과 온유약국이 보인다. /이호준 기자
일반의약품·건강기능식품, 손님·약사 간에 가격 흥정 많이 벌어져
종로 5가에는 과거부터 약국이 밀집해 있어 약국 간 경쟁이 심했다. 그래서 다른 지역보다 약값이 싸다는 평판을 받아왔다.
규모가 큰 약국은 가격 정찰제를 실시하고 있지만, 규모가 작은 곳에서는 흥정이 가능하다.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간 영양제 같은 일반의약품이나 건강기능식품이 약값 흥정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반의약품은 약사가 직접 소비자 가격을 결정할 수 있도록 약사법에 규정돼 있어 약값 흥정이 불법이 아니라고 한다.
종로 5가의 한 약국 관계자는 “공급받는 가격 위로만 팔면 이익이 남지 않느냐”며 “그래서 약사와 손님 간 흥정이 자유롭게 이뤄진다”고 말했다. 한 약사는 “특히 어르신들이 영양제를 사면서 여러 약국을 돌아다니며 가격을 묻고 흥정을 많이 한다”고 했다.
기자가 한 약국에서 흥정을 시도하자 “1상자만 사면 할인이 어렵지만 5상자를 사면 할인해주겠다”는 역제안이 돌아오기도 했다.
“발품 팔면 돈 아낄 수 있어” VS “같은 걸 누구는 더 싸게 사다니”
약값 흥정에 대해 소비자들은 엇갈린 반응을 보이고 있다. 종로 5가 약국 거리에서 만난 안모(26)씨는 “인공눈물이나 영양제가 비싸 고민이 됐는데 발품을 팔면 돈을 아낄 수 있어 만족한다”고 했다. 반면 약을 사러 온 구모(32)씨는 “같은 가격이 붙은 상품을 누군가는 싸게 산다면 가격표 그대로 값을 치른 사람만 손해를 보는 것 아니냐”고 했다.
전문가들은 약품의 가치에 맞는 합당한 가격에 따라 거래가 이뤄지는 관행이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소비자들은 (가격표에 기재된) 최종 판매 가격을 안 상태에서 더 저렴한 것을 선택하고 싶어하는 심리가 있다”며 “약값 흥정보다는 처음부터 합리적인 가격을 명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