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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요약본] 나는 보이스피싱 피해자입니다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연합뉴스

나는 보이스피싱 피해자입니다는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보이스피싱은 ‘검찰을 사칭한 사람이 돈을 요구한다’는 단순한 장면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김아현씨가 직접 겪은 보이스피싱은 교묘하고, 복잡했는데요. 독자들이 비슷한 상황에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도록 상세한 기록과 정보를 생생하게 전달드립니다.
“김아현 씨? 저는 이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서울중앙지검의 서희재 검사라고 합니다. 앞으로는 팀장님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간단하게 소개를 마친 그는 우선 첫 번째 파일을 다시 열어보며 사건의 심각성에 대해 알려주기 시작했다. 내가 연루된 사건은 현재 피해액이 180억 원을 넘어가고 있고, 피해자도 80명 이상이기 때문에 급수가 ‘특급’인 사건으로 분류된다고 했다. 우리은행 100억 원대 횡령 사건, 강남 대치동 마약 유통 사건을 대표적인 특급 사건의 예로 들었다. 또 이 사건은 현재 수사가 진행 중으로, 엠바고가 걸려 있다며 서이초등학교 교사 자살 사건을 예로 들어 보안을 강조했다.

그다음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은 금융감독원에 방문하는 것이었다. 금융감독원에 가면 담당자가 이후 절차를 안내해 줄 것이라고 했다. 서 팀장은 이어 금융감독원은 아무나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덧붙였다. 그는 먼저 출입허가증을 발급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전 직장에서 공유 오피스를 이용했는데, 그곳도 사전에 방문자 등록을 하고 1층 프런트 데스크에서 받은 카드를 찍어야 게이트를 지나갈 수 있었다. 일반 회사도 이런데, 하물며 금감원은 어떨까 싶어 나는 그 과정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서 팀장은 내게 지금 바로 연차를 쓸 수 있는지, 연차 승인 체계가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 나는 대표님 승인만 받으면 되는데 지금 대표님께서 휴가 중이라 연락드리기 어렵다며, 먼저 나간 다음에 나중에 전화로 상황을 말씀드려도 문제가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서 팀장은 알겠다며, 사건이 마무리된 후 회사에 연차 무효화 공문을 보내주겠다고 이야기했다. 이어 그는 갑자기 나가면 사람들이 어디 가는지 물어보지 않겠냐고, 거기에 뭐라고 답할 것인지 물었다. 나는 ‘지금은 말씀드리기가 조금 어려운 상황이라, 나중에 설명드리겠다’고 해도 동료들은 충분히 이해해 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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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단호했다. 어떤 여지도 남기지 말라며 이유를 명확하게 말하고 나가라고 했다. 그러더니 ‘신뢰가 무너지는 건 한 순간’이고 ‘뒷말이 나오지 않겠냐’며, 조직 생활에 관한 제법 현실적인 설교를 늘어놓기도 했다. 은근히 나를 걱정해주는 게 느껴져 감사하기도 하고, 정말 보안을 끔찍이 여기는구나 싶어서 그럼 뭐라고 말하면 될지 되물었더니 전화기 너머의 분위기가 싹 변했다. 그러고는 냉소적인 말투로 지금 이거 김아현 씨 사건 아니냐며, 앞으로도 이렇게 시키는 대로 수동적으로 임할 거냐고 짜증 섞인 말을 내뱉었다.

‘내 태도가 그렇게까지 수동적인 태도는 아닌 것 같은데…. 이토록 애틋하게 여기는 보안 유지를 위해서는 나의 어설픈 거짓말보다는 아무래도 경험 많은 당신의 소스를 활용하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적당히 순화해서 얘기했다. 어설프게 거짓말을 했다가 들통이 나면 팀장님께서 걱정해주신 내 신뢰도 신뢰대로 깎이고, 사건의 보안을 유지하기도 쉽지 않아지지 않겠냐고 말이다. 그냥 집에 일이 생겼다고 말하겠다고 하자, 그는 추가 질문이 나오지 않게 구체적으로 얘기하라고 다그쳤다. 이쯤 되니까 원하는 답을 내놓을 때까지 이 대화가 끝나지 않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결국 나는 할아버지가 편찮으시다고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그제야 다소 풀어진 목소리로 알겠다며, 대신 전화를 끊지 말고 회사 밖으로 나가서 보고하라고 말했다.

그날 처리하지 못하고 나온 업무가 수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각날 때가 있다. 사건을 빨리 해결하고 돌아와서 처리할 심산이었는데, 그땐 시간이 이렇게나 많이 걸릴지 꿈에도 몰랐다. 오전에 진행한 회의의 회의록과 프로젝트의 개요를 15:00까지 정리해야 하는 일이었는데, 함께 미팅에 참석했던 동료에게 황급히 떠넘겼다. 나이도 비슷하고 평소 친하게 지내다 보니, 나의 태도나 얼굴색에서 어색함을 느꼈는지 그는 엘리베이터까지 따라 나와 대체 무슨 일이냐고 캐물었다.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니 보험 삼아 말해놓을까 잠깐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나 주머니 속에서 여전히 연결되어 있는 전화, 엠바고가 지켜지지 않았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사건의 심각성, 그리고 만에 하나 동료에게 잠재적인 위험이 되거나 피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우려가 한 데 뒤섞여, 최대한 별일 아닌 듯 밝게 웃으며, 더 이상 묻지 말라는 의미로 검지로 쉿 표시를 하며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꾹 눌렀다. 그렇게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나는 회사 밖으로 나왔다.

“네 팀장님, 저 밖으로 나왔습니다.”

한겨레 누리집 ‘오늘의 스페셜’ (https://www.hani.co.kr/arti/SERIES/3268) 코너에서 이어집니다.

김아현 작가

피해자를 겨누는 더 상세한 수법과 정황이 기록된 ‘나는 보이스피싱 피해자입니다’ 전문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코너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네이버, 다음 등 포털뉴스 페이지에서는 하이퍼링크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주소창에 아래 링크를 복사해 붙여넣어 읽을 수 있습니다.)

1화 전문: 스물여덟, 보이스피싱에 당하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98529.html?h=s

2화 전문: “주소는 ‘대검찰청 점 커뮤니티 점 한국’입니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99742.html?h=s

3화 전문: “엠바고가 걸려있는 특급 사건입니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200997.html?h=s

4화 전문: 보이스피싱범에게 직장 생활 설교를 듣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202130.html?h=s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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