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의 운명 ㅣ 삼성의 로댕 명작 극비운송작전
지난 2월27일부터 서울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의 현대미술 소장품전(M2 전시장)에 나온 로댕의 청동상 ‘칼레의 시민’. 전시장 들머리에서 바로 왼쪽으로 꺾어가면 마크 로스코, 장욱진의 회화와 이웃한 상을 만날 수 있다. 노형석 기자
“큰일 났어요. 로댕의 작품을 실은 트레일러가 눈길에 미끄러지고 있습니다!”
새천년을 한해 남겨둔 1999년 1월 한겨울, 수행 직원들의 급박한 보고가 이어졌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눈이 쌓이던 충북 영동 추풍령 계곡 부근의 국도변은 난데없는 명작 대소동의 무대로 변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1942~2020)이 유난히 아끼며 수집에 공을 들였던 프랑스 거장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의 조각 명작 컬렉션을 산하 삼성문화재단 쪽이 대한통운에 의뢰해 트레일러 트럭으로 운송하다가 산골 도로에서 눈길 복병을 만나 자칫 파손될 위기에 놓이게 된 것이다.
로댕갤러리에 상설 전시됐던 당시 ‘지옥의 문’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서울로 향하던 트럭에는 근현대 서양 조각의 기틀을 세운 로댕의 대표작인 두 청동상 ‘지옥의 문’과 ‘칼레의 시민’이 실려 있었다. 최고 높이 6m를 넘고, 합친 무게만 10여t에 달하며 당시 값어치만 100억원대가 넘는 거대한 명작들이다. 이들을 탑재한 대형 트레일러는 추풍령 계곡 오르막 언덕에서 예상치 못한 함박눈을 만나면서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졌다. 오르던 길이 눈에 덮이자 차 바퀴는 더 이상 앞으로 구동하지 못하고 서서히 아래쪽으로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운송 실무를 맡은 삼성문화재단과 대한통운 직원들은 사색이 되어 발을 동동 굴렀다. 이틀 전 부산항에 입항한 화물선에서 두 작품을 인수해 트레일러에 실은 뒤 밤에만 국도를 따라 천천히 서행하는 극비 수송작전을 벌이면서 경로의 약 절반을 통과한 시점이었다.
보안을 유지하며 조심조심 운송작업을 진행해온 실무자들이 망연자실 지켜보는 사이 반전이 일어났다. 트럭을 타고 가던 대한통운 직원 한명이 나무 침목들을 들고 내려와 미끄러지는 중간 바퀴 앞에 잽싸게 고여놓은 것이다. 언덕 아래로 미끄러지던 차의 움직임이 기적적으로 멈췄다. 직원들은 이 상태로 트럭을 지키며 밤을 새운 뒤 이튿날 날이 밝자 눈을 치우고 다시 운송작전을 재개했다. 당시 재단에서 일했던 한 관계자는 이렇게 떠올렸다.
“눈길에 트럭이 미끄러지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죠. 두번 다시 생각하기 싫은 악몽 같은 밤이었어요. 이건희 회장께서 더욱 각별하게 신경을 썼던 컬렉션이라 책임감과 부담감이 더욱 컸지요. 어쨌든 대한통운 직원의 신속한 대응 덕분에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사흘 만에 서울 권역에 도착해 한강을 넘어서니 동이 터서 밝아오고 경찰 사이드카들이 옆에서 트럭 행렬을 엄호해주더라고요. 이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2월27일부터 서울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의 현대미술 소장품전(M2 전시장)에 나온 로댕의 대표작 ‘칼레의 시민’. 전시장 들머리에서 바로 왼쪽으로 꺾어가면 마크 로스코, 장욱진의 회화와 이웃한 채 설치된 상을 만날 수 있다. 노형석 기자
두 명작의 운송작전은 오랜 교섭과 치밀한 사전 계획에 따라 입안된 것이었다. 상징성이 큰 두 로댕 작품에 집요한 애착을 지녔던 이 회장은 앞서 1994년 직접 프랑스 파리로 날아가 현지 정부 당국과 직접 교섭한 끝에 ‘지옥의 문’은 일곱번째 에디션, ‘칼레의 시민’은 열두번째 마지막 에디션으로 소유권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가나화랑의 이호재 대표를 통해 일찍부터 작품 구매 협상을 진행해왔던 터였지만 프랑스 정부 당국이 나라의 국보급 작품이란 이유로 한국 판매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자 직접 프랑스에 가서 담판한 것이다.
기증 미기증 이건희 컬렉션을 통틀어 작품의 구매를 놓고 이 회장이 직접 국외로 나가 협상한 사례는 이 로댕 컬렉션이 유일하다. 이 회장은 프랑스 정부 당국과 담판할 당시 “로댕만을 위한 아주 특별한 공간을 마련하겠다”는 약속을 내걸었다. 그만큼 이 회장으로서는 자존심을 걸고 입수한 컬렉션이었기에, 약속한 대로 별도의 보관 전시 장소를 생각했고, 그 결과 나온 공간이 2016년까지 리움과 더불어 삼성가 현대미술 전시의 구심점을 형성한 서울 태평로 삼성생명 빌딩 1층의 로댕갤러리 공간이었다.
1999년 5월 로댕갤러리 개관을 생각한 이 회장이 그해 벽두에 두 작품의 국내 반입을 전격 결정한 뒤 컬렉션 입수와 운송을 책임진 삼성문화재단 쪽은 운송과정이 외부에 절대로 드러나지 않게끔 비밀스럽게 운송 동선을 짰다. 당시 구제금융사태 뒤끝에서 전 국민이 금모으기 운동 등을 벌여 환난 극복에 애쓰는 상황에서 재벌이 비싼 미술품을 구매해 들여오는 것은 국민 정서에 반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자 재단 쪽은 고속도로 대신 국도를 밤 시간대에만 운행하면서 사흘 걸려 서울에 들어오게 하는 식으로 운송작전을 벌인 것이다. 한겨레신문 등 일부 언론사에서 작품을 운송하는 트럭 대열을 뒤쫓아 취재할 수 있다는 첩보도 들어오면서 보안에 더욱 신경을 썼다는 것이 당시 관계자들의 회고다.
1999년부터 2016년까지 서울 태평로 옛 삼성생명 빌딩 1층 로댕갤러리(2011년~16년 갤러리 플라토로 개칭)에 설치돼 상설 전시됐던 ‘지옥의 문’(왼쪽)과 ‘칼레의 시민’(오른쪽)의 당시 현장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실제로 이건희 회장은 그해 연초에 두 작품의 국내 반입을 전격적으로 결정한 뒤 수시로 재단 쪽에 연락해 부산항부터 운송 경로의 상황을 점검했을 정도로 관심이 남달랐다고 한다. 갖은 곡절을 거쳐 트레일러 트럭이 태평로 삼성 로댕갤러리에 도착해 두 걸작을 무사히 입고했을 당시에도 직접 현장에서 작품 나르는 것을 지켜보았다고 전해진다.
지난 2월27일부터 서울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의 현대미술 소장품전(M2 전시장)에 나온 로댕의 대표작 ‘칼레의 시민’은 이런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 들어온 열두번째 에디션 작품이다. 전시장 들머리에서 왼쪽으로 꺾어가면 마크 로스코, 장욱진의 회화와 이웃한 채 설치된 ‘칼레의 시민’은 9년 만에 관객과 만나고 있다. 1999년부터 2016년까지 로댕갤러리에서 상설 전시됐지만, 이후 삼성생명 건물이 매각되면서 ‘지옥의 문’과 함께 삼성가의 경기 용인 수장고에 들어가 전시장과 단절되는 운명을 맞은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