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원룸촌서 꾸준히 범행 대상 물색한 교사범
여성인 척 제안한 상황극이 실제 범죄로
범인의 황당한 주장, 끈질기게 파헤친 경찰
'익명성' 뒤에 도사린 범죄 피해의 위험
"가입 연령 제한, 강력한 단속 필요"
게티이미지뱅크


'손안의 컴퓨터' 스마트폰 대중화와 함께 다양한 앱이 쏟아졌다. 그중 '랜덤 채팅앱'은 가벼운 만남을 선호하는 젊은이들이 즐겨 이용한다. 랜덤 채팅앱은 위치기반서비스(LBS)를 바탕으로 불특정 이용자와의 만남을 주선한다. 무작위 또는 거리순으로 연결하고, 일부 앱은 간단한 자기소개를 보고 마음에 드는 이성을 선택하도록 한다.

이처럼 랜덤 채팅앱은 부담 없고 편리해 꾸준히 인기를 끌지만 별다른 검증 절차를 거치지 않는 '익명성' 때문에 범죄에 쉽게 노출된다. 직업은 물론 나이, 심지어 성별까지 임의로 설정해 악용하는 사례가 끊이지 않는다. 5년 전 세종시에서 발생한 '강간 상황극'은 이런 맹점을 파고든 충격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게티이미지뱅크


한여름 밤 들이닥친 거구의 강간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 2019년 8월 5일 늦은 밤. 세종시의 한 원룸에 살던 여성 A씨는 누군가 문을 두드리자 집에 놀러 오기로 한 친구가 일찍 도착한 줄 알고 무심결에 문을 열었다.

하지만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친구가 아닌 낯선 남성. 신장이 190㎝에 달하는 거구의 남성은 문이 열리자마자 집 안으로 들이닥쳐 A씨를 성폭행하고 도주했다. 휴대폰까지 빼앗긴 A씨는 범행 충격으로 한동안 집 안에 쓰러져 있었다. 만나기로 한 친구가 오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범인의 옷차림을 정확히 기억한 A씨의 진술을 토대로 폐쇄회로(CC)TV 영상 등을 활용해 동선 추적에 나섰다. 2시간 만에 붙잡은 범인은 A씨 집에서 약 1.5㎞ 떨어진 원룸의 거주자 B씨였다. 검거 당시 그는 범행 때 입었던 복장 그대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는 척을 했다.

"여성과 상황극을 한 것뿐"... 황당한 주장



긴급체포된 B씨는 "그저 피해 여성과 강간 상황극을 했을 뿐"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했다. 그러면서 스마트폰 랜덤 채팅앱에서 A씨와 나눈 대화를 증거라고 내밀었다. 경찰이 채팅앱 메시지를 확인하니 먼저 강간 상황극을 제안한 것은 A씨였다. 문을 두드리고 "옆집인데요"라고 말하는 것으로 상황극을 시작하자는 내용이었다. 채팅앱에서 A씨는 주소와 공동현관문 비밀번호까지 알려줬다. 성폭행을 당했다는 신고와는 정반대였다.

조사 결과 B씨는 A씨 원룸 출입문을 두드렸다가 반응이 없자 발길을 돌리려고 했다. 그때 채팅앱에 A씨의 메시지가 떴다. '화장실에 있었어. 검은 모자 쓴 남자야? 남자가 왜 이렇게 배짱이 없어? 문 열어주고 성관계하면 그게 어떻게 상황극이야?' B씨는 "메시지를 보고 다시 A씨 집으로 갔고, 이번에는 문이 열려서 약속한 대로 했다"고 주장했다.

채팅녀의 정체는 평범한 20대 남성 회사원



경찰이 사실관계를 묻자 A씨는 "채팅을 아예 한 적이 없다"고 일관되게 답했다. 의심이 커진 경찰은 B씨를 상대로 "상황극이었는데 왜 도망갔느냐"고 추궁했다. B씨가 결국 실토했다. "도중에 출입문 쪽을 봤는데, 살짝 열린 틈으로 어떤 남자와 눈이 마주쳐 겁이 났다. 덫에 걸렸구나 싶었다."

이를 토대로 경찰이 수사한 결과 B씨와 메시지를 주고받은 상대는 A씨가 아니었다. 채팅녀의 정체는 B씨 원룸 맞은편에 사는 평범한 20대 회사원 C씨였다. C씨가 채팅앱에서 35세 여성인 척하며 '강간 상황극을 하고 싶다'는 글을 올린 것이다. B씨가 관심을 보이자 A씨 집 주소와 공동현관문 비밀번호를 알려줬고, 이를 철석같이 믿은 B씨는 범행을 저질렀다.

C씨는 경찰에서 "문틈으로 B씨의 범행을 지켜본 것은 맞다"면서도 "장난친 것일 뿐 진짜 범행을 할 줄은 몰랐다. (피해자가) 걱정돼 확인하기 위해 찾아갔다"고 진술했다.

게티이미지뱅크


다른 여성에게 음란메시지로 성희롱도



사건의 전말을 파헤친 경찰은 B씨와 C씨에게 각각 주거침입 강간, 주거침입 강간 교사 혐의를 적용해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모두 기각됐다. 그래도 피해자를 위해 포기할 수는 없었다.

끈질긴 수사 끝에 드디어 C씨의 추가 범죄가 드러났다. A씨와 같은 원룸촌에 살던 또 다른 여성들이 성희롱 피해를 당한 것이다. 경찰은 A씨 집 인근 원룸 거주자 D씨로부터 "며칠 동안 여행을 다녀왔는데, 출입문에 '맨날 베란다에 앉아 담배 피우던데 가슴 XX 작더라'라고 적힌 쪽지가 붙어 있어 너무 놀랐다"는 신고를 받았다. 마침 A씨도 "문에 쪽지가 붙어 있었는데 보지 않고 버렸다"고 했다. 경찰은 유사한 피해 사례가 있었는지 탐문수사를 벌여 추가 피해자 E씨를 찾았다.

E씨는 처음에 '남자 친구 있느냐. 호감이 있어 연락한다'는 C씨의 문자메시지를 받고 거절했다. 그런데도 신체에 대해 언급하거나 신체 접촉을 하고 싶다는 문자메시지가 이어졌다. C씨는 E씨의 차량에서 습득한 전화번호로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조사됐다. C씨는 B씨의 범행을 문틈으로 지켜보면서 E씨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전송했다.

수사 과정에서 C씨가 A씨를 강간 상황극 범행 대상으로 선택한 이유도 밝혀졌다. C씨는 여자 친구와 함께 살면서도 틈만 나면 옥상에 올라가 두 여성을 지켜봤다. 건물이 가까이 붙어 있는 원룸촌이라 이게 가능했다. 그러다 E씨가 남자 친구와 같이 있는 모습을 보고 A씨를 범행 대상으로 결정했다.

C씨가 B씨에게 성폭행을 교사하기 며칠 전 같은 범행을 시도했던 사실도 드러났다. A씨가 쓰레기를 버리러 밖에 나갔을 때 낯선 남자가 채팅창을 보여주며 "저랑 대화한 여자가 맞느냐"고 물었는데, 알고 보니 이 남성도 B씨처럼 C씨에게 속은 것이었다.

1심서 강간 교사는 유죄, 강간범은 무죄



경찰로부터 사건을 넘겨받아 보강수사를 한 검찰은 2020년 5월 결심공판에서 "피해자의 고통을 무시하고 인격을 존중하지 않은 죄질이 극히 불량하다"며 C씨에게 징역 15년, B씨에게 징역 7년을 각각 구형했다.

1심 재판부는 C씨의 주거침입 강간죄 등을 인정해 징역 13년을 선고하고,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80시간 이수와 아동·청소년 관련 기관 취업 10년 제한을 명령했다. 재판부는 C씨를 주거침입 강간 교사범이 아닌 주거침입 강간죄의 간접정범으로 판단했다. 간접정범은 다른 사람을 '도구'로 이용해 범죄를 저질렀을 때 적용한다. C씨가 또 다른 여성에게 음란메시지를 보낸 혐의(통신매체이용 음란 등)도 유죄로 인정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A씨에게 직접 범행을 저지른 B씨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C씨에게 속아 합의하에 상황극을 한 것일 뿐 자신의 행위가 범죄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는 이유다. A씨가 소극적으로 저항해 B씨가 상황극 연기를 한 것으로 오해할 여지가 있다고도 봤다.

게티이미지뱅크


항소심서 유죄로 뒤집힌 판결... 대법원 확정



검찰은 1심 판결이 성폭력 책임을 피해자에게 전가한 것이라며 즉시 항소했다. C씨도 형이 너무 무겁다며 항소장을 냈다. 검찰은 항소 이유서에서 "법원 판단은 여성이 강하게 반항하지 않았다면 강간이 아니라는 인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며 "피해자가 반항하고 겁에 질렸다면 상황극이 맞는지 의심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랜덤 채팅앱은 본인 인증 절차를 거치지 않아 남자가 여자 행세를, 여자가 남자 행세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B씨의 진술을 강조하며 유죄 입증에 주력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런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여 B씨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B씨가 강간 상황극이 아닌 실제 강간이라는 점을 미필적으로나마 인식하고 있었다고 본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상황극에 속았다는 건 인정할 수 없다"며 "피해자에 대한 강간일 수 있음을 인식하면서도 자신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의심스러운 상황들을 외면한 채 범행을 했다"고 판시했다.

다만 C씨에 대해서는 주거침입 강간죄 대신 미수죄만 인정했고, A씨와 일부 합의한 점 등을 고려해 징역 9년으로 감형했다. B씨와 C씨, 검찰이 각각 상고했지만 대법원은 "항소심의 판단은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없다"며 모두 기각해 형이 확정됐다.

범죄 온상 랜덤 채팅앱...규제와 강력한 처벌 필요



익명성을 이용해 불특정 다수와 온라인에서 대화할 수 있는 랜덤 채팅앱은 음란·성매매 범죄의 주요 통로 등으로 악용되고 있다. 대부분의 피해자가 사리 판단이 서투른 미성년자라는 점은 더욱 문제다.

여성가족부와 한국여성인권진흥원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17개 성착취 피해아동·청소년지원센터 지원을 받은 아동·청소년 피해자는 1,187명으로 2023년보다 235명 증가했다. 피해를 입은 경로는 채팅앱이 501명(42.2%)으로 가장 많았다.

랜덤 채팅앱에서 오가는 음란·성매매 정보 시정 요구도 폭증하고 있다. 한민수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지난해 랜덤 채팅앱 음란·성매매 정보 시정 요구는 1만7,377건이나 된다. 5년 전(3,297건)에 비해 무려 5배 이상 늘었다.

박선영 목원대 경찰법학과 교수는 "랜덤 채팅앱 피해가 많은 청소년 대상 디지털 성범죄 교육, 플랫폼 규제와 개선, 가해자 처벌 등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어 "랜덤 채팅앱 초기 화면에 경고 문구를 반드시 노출하도록 하고, 가입 연령 제한 등의 규제도 필요하다"며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실시간으로 성매매, 딥페이크 등 단속을 강화하고, 위반 사항 발견 시 폐쇄 조치를 포함한 강력한 제재가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일보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49051 李대통령, 김문수에 먼저 전화…설난영 여사 안부도 물었다 new 랭크뉴스 2025.06.07
49050 “머스크 공격, 약물 영향?…트럼프, 참모진에 언급” new 랭크뉴스 2025.06.07
49049 중국 항모 푸젠함, 5월 말 서해 시험항해…전력화 임박한 듯 new 랭크뉴스 2025.06.07
49048 ‘학벌 안 좋지?’ 댓글 논란 시의원 “수준 낮은 언행 죄송” new 랭크뉴스 2025.06.07
49047 서울 영등포 문래동서 공장 화재···소방당국 진화중 new 랭크뉴스 2025.06.07
49046 쉼터 조성한다고 쉼터를 베어냈다 [하상윤의 멈칫] new 랭크뉴스 2025.06.07
49045 “대화 계획 없다” 화해 의향 거절한 트럼프에···머스크 “새 정당 필요” 재도발 new 랭크뉴스 2025.06.07
49044 "부정선거" vs "내란청산"...서울 곳곳서 주말집회 new 랭크뉴스 2025.06.07
49043 트럼프 "머스크와 관계복원 관심 없어" new 랭크뉴스 2025.06.07
49042 “비상사태 선포 고려”..HIV 감염자 급증에 초비상 걸린 ‘이 나라’, 어디? new 랭크뉴스 2025.06.07
49041 이 대통령, G7서 ‘실용외교’ 시동 기회…한국외교 정상궤도 되돌릴까 new 랭크뉴스 2025.06.07
49040 "그 돈이면 차라리 일본 간다"…바가지 제주도 손절 한 줄 알았는데 '반전' new 랭크뉴스 2025.06.07
49039 이재명 대통령, 김문수에 안부 전화…설난영 안부 물어 new 랭크뉴스 2025.06.07
49038 "라도인 긁혔나보네" 전남 비하 글 유튜버 "5·18 재단에 기부" new 랭크뉴스 2025.06.07
49037 이재명 정부의 '노란봉투법'에 기업들 벌벌 떤다는데 왜?[biz-플러스] new 랭크뉴스 2025.06.07
49036 與 “리박스쿨 배후 밝혀야”… 11일 긴급 현안질의 new 랭크뉴스 2025.06.07
49035 "트럼프, 머스크 공격 '약물' 영향 가능성 참모진에 언급" new 랭크뉴스 2025.06.07
49034 서울 문래동 공장 화재... 영등포구 "연기 발생으로 도로 통제" new 랭크뉴스 2025.06.07
49033 "그 남자 팬티에 아빠 이름이"…30년 전 추억템의 여전한 유혹 new 랭크뉴스 2025.06.07
49032 이준석, 의원직 제명되나…청원 사흘 만에 28만명 넘어섰다 new 랭크뉴스 2025.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