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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D-7, 광장 시민의 요청
지난 21일 만난 서창원(27)씨의 가방에 그가 광장에서 받은 배지와 리본들이 달려 있다. 고나린 기자

‘성평등 쟁취’, ‘500일이 되기 전 고공에도 봄이 오게’, ‘민주동덕에 봄은 오는가’, ‘피해자의 목소리를 들어라’….

20대 남성이자 이성애자, 비장애인, 정규직 노동자 서창원(27)씨가 ‘무지개’ 배지를 단 출근 가방에서 각종 ‘투쟁 머리띠’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왼손에는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노란색 팔찌와 이태원 참사를 기리는 보라색 팔찌를 찼다. 이전까지 사회 문제에 관심을 둔 적도, 집회에 참여해본 적도 없었던 서씨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을 촉구하려고 처음 나간 광장에서 ‘먼저 싸우고 있던’ 여성, 참사 피해자, 성소수자, 장애인, 비정규직 노동자를 만나 ‘각성’했다. 서씨에게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에게 제안하고 싶은 정책을 물었다. 내란 사태 이후 반년, 광장에서 고민한 ‘다시 만나야 할 대통령’의 역할이 숨 가쁘게 이어졌다. “차별금지법과 생활동반자관계법 제정, 노란봉투법 재추진, 장애인 탈시설 지원법 제정을 해줬으면 해요. 특히 누가 대통령이 되든, 고공농성 중인 노동자들을 땅으로 데리고 내려올 사람이어야 해요.”


‘각성의 광장’을 딛고 마침내, 21대 대통령 선거가 6월3일 치러진다. 한겨레는 윤 전 대통령 탄핵 집회 무대에 올라 시민 발언에 나섰던 다양한 시민 8명의 이야기를 들었다. 광장의 화자이기도, 청자이기도 했던 이들은 대선에 나선 후보에게 광장에서 알게 된 사람들의 고통과 사회 문제의 해결을 촉구했다.

이들이 후보들에게 제시한 과제는 ‘내 문제’에 한정되지 않았다. 고등학생 딸을 둔 아빠는 ‘평화’의 가치를 이야기했고, 학교 밖 청소년은 사회적 소수자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노점 상인은 자신보다 더 힘든 처지에 있는 도시 빈민을 벼랑 끝으로 내몰지 않는 세상을 바랐다. ‘인공지능(AI) 강국’ ‘기업 하기 좋은 나라’ 등 유력 후보들이 내놓은 추상적인 청사진, 그리고 정쟁과 표 계산으로 얼룩진 대선에 실망했다고 했다. 추운 겨울 광장에서 공유된 삶의 아픔과 함께 염려했던 온기가 대선 국면 후보들의 말 속에선 “통째로 사라진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나의 바람 넘어 모두의 바람

실용음악 입시에 집중하려 고등학교를 자퇴한 학교 밖 청소년 민지환(17)군은 “사회 문제에 관심도 없고 잘 몰랐지만, 윤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걸 보고 화가 나” 지난해 12월7일 처음 집회에 나갔다. 그날부터 30번가량 광장에서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내가 편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중에도 누군가 고공에서 농성하고, 여성은 성범죄 피해를 보고, 장애인은 이동하기조차 힘들다는 사실을 알게 됐거든요.” 대선 이후 사회에 대한 민군의 바람은 광장에서 배운 것과 맞닿아 있다. 민군은 “모두의 노동권을 보장하고, 여성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차별 없는 평등한 사회를 만들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며 “광장의 대표 의제 중 하나였던 차별금지법 제정도 꼭 필요하다”고 했다.

‘광장 시민들’이 한겨레에 전한 새 대통령에 대한 바람은 대개 본인의 문제를 벗어나 광장에서 만난 다른 시민의 삶을 향했다. 정체성을 드러내도 안전했던 광장의 분위기 속에 숱한 소수자가 자신의 문제를 전했고, 그에 공감한 영향이 컸다. 민군은 “약자와 소수자들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차갑고 두려운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광장에서 자신을 페미니스트 직장인으로 소개하며 발언에 나섰던 정다은(27)씨도 “전해진 이야기들이 ‘그들의 일’이 아닌 ‘모두의 일’로 여겨졌고, 자연스럽게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거나 잘 알지 못했던 사회 문제와 다른 분들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내란 사태가 안긴 충격과 탄핵 국면에서 드러난 극심한 사회 갈등이 일깨운 바람도 컸다. 고등학교 2학년 딸을 둔 아빠이자 ‘열린 군대를 위한 시민연대’ 활동가로 일하는 박석진(56)씨는 “그동안 군대와 평화 같은 담론을 이야기하면서도 ‘사회가 바뀌고 있는 걸까’ 의구심이 있었는데, 광장 시민들이 내란 사태 재발을 막기 위해 군대에 민주주의와 평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내는 걸 보고 희망을 발견했다”며 “성역시돼온 군대도 이번 사태를 계기로 평화를 갈망하는 시민들 통제 아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인천에서 학원을 운영하며 수업까지 미루고 집회에 참여한 김부미(56)씨는 윤 전 대통령 지지자들의 극단적인 행동 앞에 좌절하면서 새 대통령에 대한 희망을 키웠다고 했다. 김씨는 “광장에서 윤 전 대통령 지지자들에게 욕설과 폭행을 당하며 동료 시민과 싸운다는 것 자체가 너무 마음이 아팠다”며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시민을 극과 극으로 갈라친 게 지난 3년의 결과일 텐데, 쉽지 않겠지만 이런 증오 정치를 극복할 방안을 찾는 게 새 대통령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말했다.


모두의 바람은 대선 어디에

중증 장애 여성인 대학원생 위유진(25)씨는 장애인인 자신의 정체성을 환대하고 걱정해줬던 광장과, 대선 국면 논의 주제들 사이의 간극에 갑갑함을 느꼈다. 위씨가 지난해 12월 “계엄이 해제되지 않았다면 방 안에서 홀로 죽어갔을지도 모른다”는 장애 당사자로서의 공포를 말한 순간, 광장에선 공감 어린 응원봉 불빛이 출렁였다. “‘백래시’를 걱정하면서 무대에 섰는데 많은 분이 호응해 주고, 안국역에서 벌어진 장애인 이동권 시위에도 동참해 주는 모습을 보면서, 장애인권이 당사자인 우리만 중요하게 생각한 주제가 아니었다는 걸 느꼈어요.”

하지만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가 제시한 10대 공약에는 장애인은 물론, 농민·여성·노동자·성소수자 등 광장의 주역으로 여겨졌던 소수자가 불리지 않았다. 위씨는 “공약들을 보면서 경제 성장 이야기만 주를 이루고 사회적 소수자 의제는 여전히 주변부, 곁다리로 밀려나 있구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지난 1월 ‘기후위기를 걱정하는 시민’으로 본인을 소개하며 무대에 올랐던 직장인 조은혜(35)씨도 “성소수자, 여성, 장애인, 노동자의 목소리 모두 잘 안 보인다. 인공지능, 반도체, 첨단산업 이야기만 하는 것이 답답하다”고 했다.

쪽방촌이나 시장을 찾는 요식행위를 넘어, 대선 후보들의 시선이 정책적으로도 낮은 곳에 머물길 바라는 목소리도 컸다. 서울 동대문구 노점상인 장인숙(56)씨는 광장에서 홈리스, 쪽방 주민, 도시 빈민의 처지를 듣게 됐다. “광장에 나가기 전까지는 내가 제일 낮은 곳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더 힘든 사람도 많더라고요. 선거 때 힘든 사람 생각하는 척만 할 게 아니라, 실제로 홈리스나 쪽방 주민 같은 약자들을 벼랑 끝에 밀어넣지 않을 정부가 필요해요.” 이번 대선을 앞두고도 후보들은 여지없이 쪽방촌과 시장 등을 찾았지만, 두 유력 정당 후보는 모두 10대 공약에 ‘빈민’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지난 22일 만난 서울 동대문구 노점상 장인숙(56)씨가 지난 3월 집회 무대에 들고 올라갔던 팻말을 들어 보이고 있다. 고나린 기자

다양한 이들의 문제를 공부하고, 각성하고, 함께 해결하기를 다짐했던 광장의 바람이 흐릿해진 대선 앞에 시민들은 정치권을 향해 다시 한번 호소했다. “어떤 후보가 대통령이 되든 광장에 큰 빚을 지고 있다는 마음을 잊어선 안 됩니다.”(박석진) “광장에서 나온 삶의 목소리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경청하고 정책에 반영해야 해요. 8년 전 정권 교체 이외에 사회 대개혁에는 실패했던 경험을 꼭 되돌아봤으면 좋겠습니다.”(정다은)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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