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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준상 영화 '청명과 곡우 사이' 장례 장면에 동료·지인 150명 초대

빨간 구두 신고 꽃상여 품에 안은 박정자…조문객은 출연작 쓰인 깃발 들고 행렬

강부자 "친구 프로젝트에 한달음"…남명렬 "삶·죽음 공존 깨달아"


영화 '청명과 곡우 사이'에서 장례식 장면 촬영 중인 배우 박정자
[촬영 류호준]


(강릉=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즐겁고, 신나게 해주세요. 슬픈 장면이 아닙니다!"

25일 강릉시 순포해변, 영화 '청명과 곡우 사이' 촬영장. 연극계의 '살아 있는 전설' 배우 박정자(83)가 메가폰을 잡은 채 힘껏 소리치고는 어깨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의 앞에 일렬로 늘어선 약 150명은 북과 꽹과리, 장구 장단에 맞춰 박정자를 향해 행진했다. 선두에 선 이들은 양손을 번쩍 들어 올려 좌우로 흔들면서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박정자도 흥이 난 모양인지 마치 스텝을 밟는 것처럼 발걸음을 옮겼다. 바람에 흩날리는 연두색 원피스 자락 아래로 빨간 구두를 신은 발이 경쾌하게 움직였다.

한바탕 축제가 벌어졌다고 오해한 구경꾼들이 촬영장 주위로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하지만 해변에 놓인 자그마한 꽃상여를 보더니 의아하다는 듯 술렁거렸다.

이날 촬영하는 장면은 박정자가 영화에서 맡은 배역 '그녀'의 장례식 신이다. 박정자는 조문객 역으로 보조출연자들을 섭외하는 대신 실제 지인 150명을 불렀다. 영화의 한 장면이지만 조문객은 박정자의 실제 지인인 만큼 일종의 '생전 장례식'인 셈이다. 그는 이 장면을 "(장례식) 리허설"이라고 표현했다.

영화 '청명과 곡우 사이'에서 장례식 장면 촬영 중인 배우 박정자
[촬영 류호준]


'청명과 곡우 사이'는 배우 유준상이 연출한 장편 영화로, 기억을 잃어가는 80대 배우 '그녀'의 삶과 죽음을 그린다.

현장에서 만난 유 감독은 "죽음을 생각하며 '환한 웃음으로'라는 노래를 작곡했다. 처음엔 이 곡을 바탕으로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려다 영화로 만들기로 했다"며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박정자 선생님과 잘 어울릴 것 같아 출연을 부탁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장례식 장면이 있다고 말씀드리니 '유 감독, 내가 부고장을 돌리면 어떨까' 하시더라"고 돌아봤다.

이날 촬영장에서 곡소리와 눈물이 아니라 웃음과 환호, 박수가 끊이지 않은 건 박정자가 부고장을 통해 한 당부 때문이다. 그는 이 장면을 '장례 축제'로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나의 장례식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장례식은 엄숙해야 한다고 누가 정했을까요. 오늘만큼은 다릅니다. 당신은 우는 대신 웃어야 합니다. 꽃은 필요 없습니다. 꽃 대신 기억을 들고 오세요. 오래된 이야기와 가벼운 농담을, 우리가 함께 웃었던 순간을 안고 오세요.'(부고장 '박정자의 마지막 커튼콜' 중)

영화 '청명과 곡우 사이'에서 장례식 장면 촬영 중인 배우 박정자와 유준상 감독
[촬영 류호준]


그의 초청을 받고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배우 강부자, 남명렬, 양희경, 박지일, 길해연, 정경순, 김호영, 소리꾼 장사익, 시인 박용재, 김종규 전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송형종 서울문화재단 대표, 안호상 세종문화회관 사장 등이 한달음에 강릉으로 달려왔다. 대부분은 전날 오죽헌에서 열린 전야제에도 참석해 이야기를 나누며 회포를 풀었다.

김동호 전 위원장은 "나는 박정자 씨의 1호 남자친구다. 부고장에도 내 이름을 가장 먼저 썼을 만큼 가깝다"며 "유 감독 영화가 의미 있고, 장례식 장면의 발상도 참신해서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자신을 "박정자의 가장 어린 남자친구"로 소개한 뮤지컬 배우 김호영은 "선생님께서 보내신 부고장을 보고서 깜짝 놀랐지만, 기쁜 마음으로 왔다. 제게도 나중에 꼭 (생전 장례식을) 해보라고 해 저도 축제처럼 해볼까 한다"며 미소 지었다.

강부자는 "친구가 좋은 프로젝트를 한다고 하니 어떻게 안 올 수가 있겠느냐"며 "실은 나도 죽어서 관 속에 누우면 문틈으로 누가 가장 슬피 우는지 살짝 살펴보고 눈감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웃었다.

영화 '청명과 곡우 사이' 촬영장 온 배우 강부자
[촬영 류호준]


유 감독의 사인이 떨어지자 조문객들은 저마다 깃발을 하나씩 들고 줄을 섰다. 깃발에는 '햄릿', '오이디푸스', '피크닉 작전', '굳나 마더', '지붕 위의 바이올린', '19 그리고 80', '페드라' 등 박정자의 대표작 제목이 쓰여 있었다.

이들은 소나무 숲에서 박정자의 지휘에 따라 행진을 시작해 해변까지 내려갔다. 소프라노 임선혜가 부른 '환한 웃음으로'가 스피커를 타고 흐르자, 울지 말고 웃으라는 박정자의 당부에도 어떤 이들은 북받치는 감정을 누르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렸다.

바닷가에서 박정자를 둘러싸고 반원 형태를 이룬 조문객들은 각자 깃발을 모래사장에 꽂은 뒤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박정자는 꽃상여를 들어 품에 안고는 바다를 바라봤다. 유 감독이 '컷'을 외치기까지 그 자리에 같은 자세로 꼿꼿이 서 있던 박정자는 촬영 끝을 알리는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조문객들과 포옹을 나눴다.

감정이 북받친 듯 "지금은 (소감을) 말하고 싶지 않다"고도 했다.

영화 '청명과 곡우 사이' 촬영장 온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촬영 류호준]


남명렬은 "눈물과 웃음이 공존하는 현장이었다"며 "슬픔보다는 기쁨과 웃음, 긍정으로 한 사람의 삶을 보내주는 게 더 좋지 않나 생각하게 됐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같이 공존한다는 것도 다시 한번 깨닫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장사익은 "선생님은 여태까지 높은 사람, 낮은 사람,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돈이) 있는 사람, 없는 사람 수많은 역을 하셨다. 그의 삶 자체가 연극이라 생각한다"며 "이 장례식이 연극의 마무리인 것 같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 떠올랐는데, 선생님께 드리는 시인 것 같다"고 했다.

문화계 인사 150명을 한날한시에 불러 모은 박정자에 대해 존경의 마음을 드러내는 이들도 많았다.

양희경은 "전 세계적으로 누가 이렇게 많은 사람을 한자리에 부를 수 있을까. 그게 선생님이 가진 파워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경순은 "누군가 죽으면 몇십년 동안 못 본 사람을 장례식에서 만나지 않나. 선생님은 그걸 살아 계실 때 한 것"이라며 "앞으로 우리나라에 나오기 어려운, 유일무이한 아티스트라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영화 '청명과 곡우 사이' 촬영 현장
[촬영 류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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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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