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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관 1인당 1년에 3139건씩 처리…‘원 벤치’ 룰에 증원 번번이 무산
독일 모델이 답…법학 교수 “대법관 50명 이상으로 늘리고 다양화 필요”
천대엽 법원행정처장이 지난 5월 14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 나와 의원 질의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주간경향] 72.3%. 대법원이 지난해 1~5월 처리한 민사 본안 사건 가운데 심리불속행으로 기각한 비율이다. 상고법원에 올라간 10건 중 7건이 이유도 모른 채 대법원 판단을 받지 못했다는 의미다. 심리불속행 기각률은 수년간 70%대를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법원 심리불속행은 어떤 절차로 진행될까. 먼저 상고이유서와 답변서가 제출되면 모든 사건은 일단 대법관의 업무를 보조하는 재판연구관에게 배정된다. 연구관이 사건을 훑어보고 심리불속행 사유에 해당한다고 판단하면 보고서 표지에 ‘심리불속행’이라 표기해 주심대법관에게 보고한다. 이후 이 사건의 처리는 검토 연구관의 의견대로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박시환 ‘대법원 상고사건 처리의 실제 모습과 문제점’). 즉 대법관들이 제대로 사건을 읽어보지도 못하는 구조란 이야기다.

이렇게 사건을 대법관 대신 연구관이 처리하는 이유는 하나다. 사건 수에 비해 대법관 숫자가 턱없이 부족해서다. 사법연감을 보면 2023년 기준 상고사건은 3만7669건에 달한다. 실제 재판업무에 투입되는 12인에 산술적으로 대입하면 대법관 1인당 3139건을 처리해야 한다. 각 소부 재판부는 4인으로 구성되는데, 소부 사건으로 넘어오는 사건 수로 보면 1만2556건(3139건x4명)이 된다. 대법관이 365일 내내 일한다고 해도 1인당 하루 34건을 처리하는 셈이다. 상고심이 ‘10초 재판’으로 운용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과장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소송당사자들 입장에선 매우 허술한 상고 시스템에 명운을 맡기고 있는 것이다.



답은 뻔한데 왜 안됐을까

이 문제는 대법원의 오랜 골칫거리였다. 1990년 재판청구권을 지켜야 한다는 사회적 논의가 제기되면서 상고허가제(상고이유를 제한하거나 일정한 경우에만 상고를 허용하는 것)가 폐지됐을 때만 해도 대법원 상고사건 수는 8000건대 정도였다. 이후 상고사건은 꾸준히 증가해 3만~4만건대까지 늘어났다. 그럼에도 대법관 수 14명은 20년 가까이 그대로다. 대법원도 일찌감치 대법관들의 업무 과부하를 의식하고 있었다. 2015년 당시 양승태 대법원장은 상고심 재판을 전담하는 법원, 즉 상고법원 설치를 제안했다. 하지만 법원행정처가 상고법원 도입을 성사시키기 위해 박근혜 전 대통령에 유리하게 재판에 개입하려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추진 동력을 상실했다.

대법원은 2022년 법원행정처 상고 제도 개선 실무추진 태스크포스(TF)에서 전향적으로 대법관을 18명으로 늘리자는 방안을 발표했지만, 이 역시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대법관 증원이 번번이 무산된 건 이른바 ‘원 벤치(En Banc) 룰’을 앞세운 저항 때문이었다. 즉 대법관 수가 많아지면 대법관 전원이 참여해 재판하는 전원합의체(원 벤치)가 통일적인 법 해석을 내리지 못할 것이란 우려다. 이러한 우려는 지난 5월 14일 천대엽 법원행정처장의 입에서 다시 나왔다. 그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하는 대법관 증원안에 대해 “(대법관이 증원되면) 전원합의체에서의 충실한 심리를 통한 권리구제 기능 역시 마비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전체 사건에서 전원합의체로 가는 사건 비율을 보면, 원 벤치 룰을 내세운 반대 논리는 다소 군색해 보인다. 2023년 전원합의체로 간 사건은 연간 총 9건으로, 전체 상고사건의 0.02%에 불과했다. 이미 대부분의 사건을 4명 대법관으로 구성된 소부에서 해결하고 있는데, 대법관 증원으로 인한 전원합의체 기능 마비를 우려하는 건 대법원의 역할을 잘못 해석한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한국의 대법원은 헌법재판소를 따로 두고 있는 만큼 ‘정책결정’ 역할보다 ‘권리구제’ 역할을 한다고 봐야 하는데, 현실에 맞지 않게 정책결정 역할에 무게를 두면서 ‘원 벤치’ 룰이 강조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대법관 증원을 하면서 동시에 전원합의체의 통일적 법 해석을 지키는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독일처럼 연합부를 새로 만들 수 있다. 독일 연방일반최고법원은 어느 한 재판부가 법률문제를 판단할 때 다른 재판부의 재판과 배치되는 판단을 내리게 되면, 이 사건은 연합부가 다시 맡아 처리하게 한다.

대법원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2심 무죄판결을 파기 환송한 5월 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민주당 긴급의원총회에서 박찬대 당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왼쪽부터), 박성준, 김용민 원내수석부대표가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물론 대법관을 증원하는 ‘공급’ 측면 대신 상고심 숫자, 즉 ‘수요’를 줄일 수도 있다. 1심과 2심을 양적·질적으로 개선하고 소송 당사자에게 충분한 방어권을 부여하면 상고로 갈 확률이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이는 매우 원론적인 이야기다. 당장 수만건에 달하는 상고심을 기하급수적으로 낮추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미 1990년 폐지된 상고허가제를 부활하는 것도 방법이 되기 어렵다. 하위 재판에 불만을 갖고 상고하는 사람들의 재판청구권을 무시하고, 상고 원인을 소송 당사자에게서만 찾는 우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대법원의 상고 기능을 원활히 하기 위해선 대법관 증원이 필요하다는 결론만 남는다. 현재 국회에 제출된 관련 법원조직법 개정안 가운데는 대법관을 현행 14명에서 30명으로 늘리자는 김용민 민주당 의원안, 100명까지 확대하자는 장경태 민주당 의원안이 있다. 이탄희 전 민주당 의원은 2020년 대법원장을 포함한 대법관 수를 48명으로 3배 이상 증원하는 법안을 발의한 바 있다. 이때 동원한 것은 대법관 1명당 인구수 기준이었다. 이에 따르면 독일은 대법관 1명당 인구가 65만명(재판관 수 128명)인데 비해 한국은 370만명으로 6배나 많다. 헌법 재판 기능을 최고 법원이 겸해 사실상 대법원이 ‘정책결정’을 하는 미국(재판관 수 9명)이나 일본(재판관 수 15명)의 경우 비교군이 되기 어렵다.

결국 우리처럼 헌법재판소를 따로 둔 독일 모델이 답이 될 수 있다는 게 많은 법학자의 결론이다. 실제로 법학 교수 34명은 지난 5월 16일 ‘대법관 증원과 다양화를 위한 전국 법학자 성명서’에서 대법관을 50명 이상으로 증원하고, 대법관 구성도 다양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법관 수를 50명 이상으로 증원하면 대법관 1인당 연간 500~600건을 맡는 셈이 된다. 또 민사, 형사, 행정, 국제, 가사, 특허, 파산 등 분야별로 전문부를 구성해 사건 특수성에 따라 재판관들의 전문성을 높일 수도 있다.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법관을 100명 넘게 둬야 한다”면서 “다만 한꺼번에 늘리면 한 대통령이 너무 많은 대법관 후보자를 지명하게 되니, 순차적으로 유예기간을 두면서 증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대법원에 적은 예산을 편성해온 국회가 대법관 증원에 따른 예산 증액을 제대로 할지는 지켜봐야 한다. 올해 우리나라 예산 중 사법부 예산은 0.34%인 2조3123억원이다. 2018년 국회예산정책처의 비용 추계를 보면, 대법관 1인당 보수는 1억4316만원(2024년 기준)으로, 30명 증원 시 보수만 대략 43억원이 추가로 든다.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법관을 200명으로 만들되, 현재는 장관급인 이들의 직급을 독일처럼 차관급으로 낮추고 직책수당 등을 결정하는 고민을 함께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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