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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사장님이 돼 봅시다.

회사에 갑자기 돈이 필요합니다. 기가 막힌 사업 아이템이 발견했을 수도 있고, 급히 막아야 할 어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장님은 어디서 돈을 구하시겠습니까.

쉽게 떠오르는 건 ‘대출’입니다. 은행 가서 빌리면 될 것 같죠. 재무 용어를 잠시 쓰면, 타인자본을 당기는 겁니다.

은행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아무한테나 돈을 빌려주지 않습니다. 신용등급 따지고, 담보 요구하고, 이자율 책정까지 까다롭습니다.

그러면 주주들에게 돈을 벌려 볼까요. 회사를 잘 키울테니 투자금을 더 달라고 하는 겁니다. 자기자본을 증가시키는 겁니다. 줄여서 '증자'입니다.

증자에는 무상증자와 유상증자가 있습니다. 돈도 안 받고 주식을 나눠주는 게 무상증자인데, 돈이 필요한 회사에겐 유효한 선택지가 아닙니다.

남는 카드, 유상증자입니다. 새 주식을 찍어서 투자자한테 팔고, 그렇게 받은 돈으로 회사를 돌리는 방식이죠.

유상증자의 문제는 ‘공모’로 진행하면 시장 반응에 신경써야 한다는 점입니다. 투자자들이 안 사주면? ‘유증 실패’라는 낙인이 찍히고, 기업 이미지만 바닥으로 곤두박질칩니다.

최근 주가 상승세가 가장 뜨거운 한화에어로스페이스도 우여곡절 끝에 유상증자를 하기로는 했지만, 주주 반발과 여론 악화로 큰 홍역을 치렀습니다. 대장주도 유상증자는 부담스럽단 뜻입니다.

유상증자마저 어려울 때 자주 동원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조용하면서도 확실히 돈을 끌어오는 일종의 '치트키'입니다.

바로 전환사채, 줄여서 CB입니다.

■ 전환사채, 누구냐 넌

전환사채는 '사채'의 일종입니다. 그러니 일단 채권입니다.

다만 그냥 채권이 아닙니다. 이름처럼 '전환'되는 채권입니다.

처음엔 채권이지만, 나중에 주식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회사 입장에서 보자면 "지금은 돈을 빌리지만, 나중엔 주식으로 갚아드릴게요" 란 뜻입니다.

투자자 입장에서 보자면 "지금은 돈을 빌려주지만, 나중엔 너희 주식으로 받을거야" 란 뜻입니다.

투자자는 나중에 주가가 오르면, 미리 약속한 더 싼 가격에 주식으로 바꿔 차익을 낼 수 있습니다.

회사는 투자자에게 그런 특혜를 준다는 핑계로 채권 금리를 좀 낮게 쳐줄 수 있습니다.

은행 심사도, 시장 공모도, 주주총회도 필요 없어 간편하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 1주에 단돈 100원

세종메디칼이라는 코스닥 상장사가 있습니다. 의료기기 제조업체입니다.

이 회사는 2022년부터 본격적으로 전환사채를 발행합니다. 2022년 1월엔 200억 규모, 같은 해 7월엔 800억 규모 였습니다.

이렇게 모은 자금은 다른 회사 인수와 신약 투자 등에 썼습니다. 성과는 안 좋았습니다. 모든 사업이 잘 될수는 없으니, 이 자체를 나무랄 순 없습니다.

다만, 부채가 너무 늘었습니다. 결손금이 자본금보다 많아졌습니다. 2024년 3월, 주식 거래가 정지됩니다.


거래정지 이후 석달 뒤, 새로운 공시 하나가 올라옵니다. 공시의 요지는 "기존 전환사채 60억 원, 새 전환사채로 갚겠습니다."

쉽게 말해 채무를 또 다른 채무로 막겠다는 '돌려막기'였습니다.

진짜 문제는 전환가격이었습니다. 기존 전환사채는 주식으로 전환할 때 1주에 2,344원으로 쳐서 바꾸기로 했습니다. 채권자들에게 나눠줘야 할 신주는 대략 256만 주였습니다.

그런데 새 전환사채에서는 주식 전환가가 100원으로 바뀌었습니다. 똑같이 60억을 갚으려면, 주식을 6000만 주 찍어내야 합니다.

회사가 빌린 돈은 60억 원 그대로인데, 23배 많은 주식을 찍어서 투자자들에게 나눠줘야하는 겁니다.

신규 전환사채를 산 투자자들은 '완전 땡큐'였을 겁니다.

반대로 회사와 기존 주주는 앉아서 손해를 봐야 했습니다.

■ '리픽싱'의 마법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바로 리픽싱 옵션(다시 고친다) 때문입니다.

전환사채에는 보통 “주가가 내려가면 전환가를 낮춰주겠다”는 조항이 붙습니다.

예컨대, 원래는 1주당 만 원에 주식으로 바꿔주기로 했는데, 주가가 9천 원으로 내려가면, 전환사채 투자자를 위해 전환 가격을 1주당 8천 원으로 리픽싱 해주는 식입니다.

채권자 입장에선 주가가 내려가도 손해 안 보니 좋습니다.

회사도 “우리 주가 떨어졌으니, 전환가도 같이 깎아줄게요” 하고 쿨하게 처리합니다.

그 결과, 2,344원이었던 전환가가 100원까지 떨어지는 마업같은 일이 벌어진 겁니다.

투자자는 주식 싼값에 받아 가지만, 기존 주주는 지분이 쪼그라듭니다. 기업 가치는 그대로인데, 나눌 조각만 늘어난 셈입니다.

100억짜리 회사를 100명(주주)이 나눠 갖고 있던 구조에, 갑자기 100명이 더 들어온다면?

파이는 그대로인데 조각 수만 많아지니, 당연히 기존 주주는 앉아서 반토막입니다.

돈은 회사가 빌렸는데, 주주들이 손해 보는 구조입니다.

물론 회사가 전환사채로 회사를 키운 뒤, 불어난 주주에 대해 충실히 주주환원을 해준다면 문제가 없을 겁니다. 배당을 늘리고, 자사주 소각을 열심히 한다면, 전환사채 발행을 나무랄 주주는 드물 겁니다.

전환사채를 발행할 때 주주환원에 대한 강제조항 같은 건 당연히 없습니다. 전환사채 발행이 일정 횟수를 넘기면 제재하는 규정도 역시 없습니다.


■ 전환사채에 진심


KBS는 연속기획 <한국 주식 괜찮습니까>를 통해 전환사채가 얼마나 자주 발행되는지 코스피·코스닥 상장사 2600여개의 3년 치 공시를 전수 조사했습니다.

세종메디칼은 3년 동안 9차례 전환사채를 발행해, 3위에 올랐습니다.

1위는 이엔플러스, 2위는 소니드. 이들 회사 주식 수는 모두 3년 새 늘었는데, 100% 넘게 뛴 곳도 있었습니다.

모두 현재 거래정지 상태입니다.

전체 상장사 2,620개 중 최근 3년 간 한 번 이상 전환사채를 발행한 곳은 546개사. 한국의 상장사 10곳 중 2곳은 최근 3년 동안 최소한 번 이상 전환사채를 찍었단 얘기입니다.

같은 기간 유상증자를 한 기업 254개사 였습니다. 전환사채가 2배 이상 많았던 겁니다.

전환사채에 대한 사랑만큼은 세계 1등감입니다.


[연속기획] 유상증자·전환사채, 어쩌다 ‘공공의 적’이 됐나 (5월 20일)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258903

■ 은밀하게 내맘대로


전환사채는 대부분 회사-투자자 간 개인 거래로 이뤄집니다.

자기들끼리 입을 맞춰, 기존 주주에게 주요 내용을 속이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배우 견미리 씨의 남편이 연루됐던 보타바이오가 대표적입니다.

이 회사는 2015년 9월 견미리 씨가 이 회사의 전환사채를 샀다고 공시했습니다.

해당 사실은 여러 언론을 통해 보도됐고, 유명인이 회사에 투자했다는 소식에 주식은 10% 가까이 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2심 판결문을 보면, 해당 공시는 일부 허위로 확인됐습니다.

견 씨가 전환사채를 사는 데 드는 비용이 '차입금'이었는데도, '자기 자금'이라고 기재했다는 것입니다.

이 혐의로 견 씨의 남편은 5억 원을 선고받았고, 최근 상고했습니다.


전환사채는 위기 기업도 외부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 필요한 제도입니다.

문제는 이 제도를 활용하는 상당수 기업이 이미 재무적으로 위태로운 상태라는 점입니다.

대출은 어렵고, 유상증자는 실패가 두려운 상황에서, 결국 조용히 CB를 꺼내 듭니다.

그 결과도 거의 비슷합니다. 기존 주주의 지분 가치 희석입니다. 주주들의 감시가 필요한 대목입니다.

예를 들어, 주주총회를 거치게 강제하거나 전환가를 내려잡는 요건 등을 강화하는 방안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전환사채 발행 이후 전환·매각 이력을 공개하도록 하는 등 사후관리 체계 마련도 시급합니다.

"전환사채 제도 자체를 욕할 순 없어요. 그런데 그게 흔하게 악용된다는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습니다."

"발행할 수 있는 주식 수를 제한하든, 혹은 전환사채 발행에 주주들이 개입할 수 있는 방안 등도 고민해봐야합니다"

-박주근, 리더스인덱스 대표

그래픽 : 이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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