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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500일 고공농성 박정혜씨 1박2일 동행 취재기
박정혜씨가 2025년 5월12일 경북 구미의 옵티칼하이테크 옥상에서 내려오는 취재진을 돕고 있다. 백소아 기자

해가 뜨자마자 짐을 챙겼다.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5월의 밤은 텐트에 이슬이 맺힐 정도로 추웠다. 몸을 동그랗게 만 채 밤새 추위를 견디다 아침이 왔다.

텐트가 열리더니 박정혜씨가 인사했다. “잠은 좀 잤어요?” 따끈한 커피를 내밀었다. 하지만 기차 시간에 맞추려면 서둘러야 한다. 다 마시기도 전에 내려갈 채비를 했다. 정혜씨는 자신도 아직 내려가본 적 없는 길을 친절히 알려줬다. 수직사다리를 타고 땅에 닿자 정혜씨가 손 흔들었 다. 그때 봤다. 크고 동그랗고 쓸쓸한 눈. 전날 들은 말이 그제서야 떠올랐다. “누군가 내려가는 모습을 보면 따라내려가고 싶다.” “내일이 되면 다시 이 곳은 고요해질 것이다.”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는 곳에, 두어서는 안 되는 사람을 두고 왔다. 간절히 내려오고 싶어하는 사람을.

한국 정부를 두려워하지 않는 일본 그룹 니토덴코

주말에 경북 구미행 열차를 탄 이유는 정혜씨가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공장의 9m 높이 출하동 옥상에서 맞이한 날들이 벌써 500일을 앞뒀기 때문이다. ‘너무 억울해서’ 뙤약볕 아래 천막을 친 사람. 불 타서 사람들이 다 떠난 공장을 지키며 ‘노동자의 땀방울을 기억하고 책임지라’고 외치는 사람. 해고 노동자, 고용 승계 요구, 외투기업 ‘먹튀’라는 단어와 나란히 병렬되는 사람.

사회가 그걸 잊어서는 안 된다며 만들어진 취재 일정이었다. ‘대선주자들에게 고공 농성의 절박함을 알릴 마지막 기회’, ‘취재진이 거기 올라가는 건 처음’ 등이 갑작스러운 동침의 명분이었다.

하루치 짐인데도 묵직했다. 손전등, 수저, 비닐봉지, 휴대용 화장실까지. 기 본적인 생리욕구도 해결할 수 없을 거란 두려움에 자꾸만 물건을 집어넣고 말았다. 옥상이 좋을 때는 돌아갈 집이 있을 때 뿐이다. 옥상에서만 살아야 한다면 그건 악천후 속 천막살이와 다름없다. 박정혜씨는 500일 동안 그 삶을 견디며 살았다. 10년 넘게 몸 바쳐 일한 회사가, 각종 세제 혜택에 화재보험금까지 살뜰히 챙긴 회사가, 다른 공장으로 일감만 이전하고 노동자는 버려뒀기에.

2025년 5월11일 경북 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 출하동 옥상 고공농성장 모습. 맞은편에 대단지 아파트가 서 있다. 신다은 기자

정혜씨의 첫 인상은 ‘손이 빠르다’는 거였다. 취재진이 건넨 꽃다발을 받자마자 바로 컵에 꽂았다. 선물도 받기 무섭게 자리를 만들었다. 천막 밖에 걸어둔 검정 봉투를 가리키며 말한다. “여긴 일반 쓰레기, 여긴 플라스틱.” 고공에서도 그는 분리수거를 잊지 않는다. 깨끗한 게 좋아 티슈로 늘 몸을 닦고, 마냥 늘어지는 게 싫어 시민들 줄 수세미와 가족들 줄 가방을 뜨개질한다.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내려가고픈 마음을 붙잡는다.

진료하러 온 의사가 정혜씨를 추켜세운다. “사람이 오래 머무는 공간은 특유의 냄새가 배거든요. 근데 여긴 어떻게 이렇게 깔끔하지요?” 정혜씨가 답한다. “내가 엄청 신경 쓰지요. 페브리즈도 매번 뿌리고.”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치인에 관한 농담도 하고 유행하는 개그 프로그램을 같이 보기도 했으며 조카 자랑에 깔깔대고 웃었다. 고공에서 내려오면 하고 싶은 일을 나누고, 서울에 오면 “힙지로”(을지로의 먹자골목) 술집에도 같이 가자고 했다. 짐짓 이 생활을 당장이라도 끝낼 수 있을 것처럼 부산을 떨었다.

필요한 건 기사보다 대선주자의 한마디지만

그러나 우리의 대화를 끊는 것은 어김없이 바람 소리였다. 신경을 긁듯이 텐트를 뒤흔드는 바람소리. 바람이 심하게 불면 텐트를 고정한 못이 빠져버릴까 노심초사하고 비가 쏟아지면 천막이 무너질까 불안에 떤다. 마땅한 대비책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일기예보의 조그마한 그림까지 매일 들여다 본다. 바람의 세기와 풍향까지, “위에서 내리꽂는 바람인지 아래에서 밀어올리는 바람인지” 확인한다. 이미 겪어봤기에 더 잘 아는 공포. 정혜씨가 무너진 텐트를 보수하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했지만 잘 알아듣지 못했다. 정혜씨도 농성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얘기다.

천막으로 만든 화장실에 갔다. 임시 변기가 너무 차가워 화들짝 놀란다. 차라리 참을걸 그랬나 싶을 정도다. 5월이 이 정도면 겨울은 얼마나 힘들까. “겨울엔 화장실 가기 전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화장실 맞은편엔 900세대 넘는 아파트가 있다. 사람 드나드는 모습이 그대로 노출된다. 수백개의 창문이 마치 시선처럼 느껴져 섬뜩하다. 실제 온라인 커뮤니티에 농성장 사진이 올라간 적도 있다.

오기 전에는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하루를 지내고서야 알았다. ‘이 곳에서 단 하루도 더는 사람이 살게 해서는 안 된다.’ 헤어지며 말했다. “저희가 어떻게든 기사를 써서 이 문제를 더 알릴게요.” 정혜씨는 체념 어린 웃음으로 맞받는다. “예에, 와 주신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저 또 하나의 기사로는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맞다. 그동안 한국 옵티칼 하이테크에 관해 수많은 기사가 나왔지만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니토덴코는 경기 평택에 버젓이 공장을 운영하면서도 한국 정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제까지 실권자 중 이 문제를 ‘정말로’ 해결하라고 요구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모두가 알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쏟아내는 기사가 아니라 ‘힘 있는 자의 약속'이라는 걸. 대선이 끝나면 본사를 압박해 교섭 테이블 열기가 더욱 어렵다. 그러나 타들어가는 마음을 대선주자들은 좀처럼 알아주지 않는다. 옆동네 대구로는 유세를 가도 구미 옵티칼 공장은 외면한다. 이 곳을 찾은 대선주자는 권영국 민주노동당 후보(5월20일 방문)가 유일하다.

도르래에 올려보내는 맥주 대신

고공에서 내려온 다음날, 낮 기온이 29도까지 올랐다. 더워지면 텐트 안이 달아올라 숨이 턱턱 막힌다는 그가 걱정스러웠다. 궂은 날씨도, 외로움도 그럭저럭 견딘다던 정혜씨가 유일하게 몸서리치던 것이 여름이었다. 내리꽂는 열을 그대로 머금는 텐트는 한증막이다. 누워만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힌다고, “생각만 해도 트라우마”라고 했다.

당장이라도 기차 타고 달려가 시원한 맥주를 도르래에 올려보내고 싶다. 그러나 아니다. 정혜씨는 가게에 들어가 스스로 원하는 음료를 골라 마실 권리가 있다. 뜨거운 텐트가 아니라 바람 부는 풀밭을 만끽할 권리가 있다. 타인이 애써 짐작한 취향 대신 자기 취향을 직접 행사할 권리가 있다. 고용승계를 위한 최소한의 교섭 테이블이라도 열린다면, 외국투자기업법에 노동자 보호 조항 한 줄이라도 만든다면 그는 옥상에서 내려와 일상을 되찾을지 모른다.

고공에서 내려와 따뜻한 방에 누웠다. 전날 못 잔 잠을 몰아서 잤고 비타민을 섭취해 목감기를 떨쳐냈다. 내려온 지 하루만에 생활의 필요를 다 채웠다. 정혜씨를 그곳에 남겨두고.

그를 거기 남겨둔 것은 누구인가. 니토덴코다. 우리 사회다. 정치인이다. 시민들이다. 그리고 나다.

박정혜씨가 2025년 5월12일 경북 구미의 옵티칼하이테크 옥상에서 내려온 취재진을 향해 손 흔들고 있다. 백소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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