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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치아노 베첼리오, '바쿠스와 아리아드네', 1520~1523년, 내셔날 갤러리, 런던


16세기 초, 페라라 공작 알폰소 1세 데스테는 그의 궁전 내 개인 서재인 '알라바스터 방'을 장식하고 싶었다. 그래서 조반니 벨리니, 티치아노 베첼리오 등 당대 최고 화가들에게 작품을 의뢰했다. 알폰소 1세는 고전 신화를 주제로 한 회화와 조각 작품을 통해 자신의 방을 르네상스 시대의 이상을 반영하는 예술의 전당으로 만들기를 원했고, 르네상스 군주로서의 자신의 문화적 소양과 권위도 과시하고자 했다.

알라바스터 방은 개인 서재를 넘어, 예술과 권력, 인문주의가 결합된 공간으로, 르네상스 시대 궁정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티치아노는 이 방의 회화 작품 중 '바쿠스와 아리아드네'를 비롯한 세 점의 그림을 제작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울트라마린, 선홍색, 녹색 등 다채로운 안료를 사용하여 색채 화가로서의 뛰어난 기량을 보여준다. 특히, 하늘을 채색한 고가의 물감 울트라마린은 그림에 산뜻한 투명함을 부여한다.

티치아노는 고대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아리아드네가 낙소스섬에서 포도주의 신 바쿠스와 우연히 만나는 장면을 묘사한다. 아리아드네는 크레타의 미노스 왕의 딸이다. 그리스 영웅 테세우스를 사랑하게 된 그녀는 테세우스가 미궁에 갇힌 반인반수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실타래를 이용해 무사히 빠져나오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그녀와 함께하기로 약속했던 테세우스는 그리스로 돌아가는 길에 아리아드네를 섬에 버리고 홀연히 떠난다.

수평선 멀리 보이는 배는 아리아드네가 버림받았음을 암시한다. 충격에 빠진 그녀는 해안을 따라 배를 쫓아가다가, 바쿠스와 그의 떠들썩한 무리를 마주치고는 깜짝 놀란다. 바다 쪽으로 살짝 틀어진 상체와 멀어지는 배를 향해 뻗은 손짓은 연인에 대한 그리움과 절망을 동시에 드러낸다. 오비디우스는 잠에서 막 깨어난 아리아드네가 금발을 풀어헤친 채 맨발의 헐렁한 튜닉 차림으로 바닷가를 헤매며 테세우스를 애타게 부르는 모습을 묘사한다. 티치아노는 바로 이 순간을 포착했다. 그는 아리아드네의 혼란과 상실감, 그리고 예기치 않게 등장한 바쿠스 무리를 보고 움찔한 순간을 화폭에 담았다.

바쿠스는 아리아드네를 보는 순간 사랑에 빠진다. 그녀에 대한 강렬한 열정이 공중에 떠 있는 듯한 그의 자세와 허공을 향해 뻗은 팔 등 역동적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눈을 감은 바쿠스의 표정에서는 첫눈에 반한 사랑의 전율이 느껴진다. 바쿠스는 결혼의 증표로 아리아드네에게 별로 만든 왕관을 선물했고, 훗날 이 왕관을 하늘에 던져 영원히 빛나는 별자리로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여름철 밤하늘의 별자리 중 가장 아름다운 왕관자리다.

일부 미술사학자에 의하면, 이 작품에 방귀 유머가 숨겨져 있다고 한다. 그 비밀의 열쇠는 송아지를 끌고 가는 어린 사티로스와 그의 앞에 피어 있는 케이퍼꽃이다. 고대에는 케이퍼꽃이 사랑과 쾌락의 상징이었을 뿐 아니라, 소화제나 방귀 완화제 등 약용 식물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한편, 음주, 본능, 쾌락을 상징하는 사티로스는 고대와 르네상스 회화에서 종종 외설적이고 코믹한 장면, 특히 방귀와 관련된 유머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이 장면에서 케이퍼꽃과 사티로스의 조합은 당대 관객들에게 방귀를 연상시키는 유머 코드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바쿠스의 격렬한 점프 역시 단순히 열정의 폭발이 아니라, 거대한 방귀의 추진력에 의해 튀어 오른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티치아노는 단순히 고대 신화를 재현한 것이 아니라, 유쾌하고 인간적인 유머를 의도적으로 가미한 것이다. 이는 당시 예술에서는 드문 접근이며, 티치아노의 독창성과 재치를 보여준다.

티치아노는 화가이자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다. ‘바쿠스와 아리아드네’라는 그림 한 점에는 사랑과 배신, 구원, 새로운 삶 등 인간 삶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또 고대 신화 속의 신과 장난기 넘치는 생명체들이 함께 어우러져 빚어내는 이교적이면서도 유쾌한 분위기가 고대 세계에 대한 즐거운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에 방귀에 관련된 절묘한 유머 감각까지 녹아 있다. 고대 신화를 생동감 넘치는 색채와 위트로 재해석한 이 작품은 르네상스 거장 티치아노의 예술적 깊이와 풍부함을 여실히 드러내는 걸작이다.



김선지 작가·'그림 속 천문학'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저자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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