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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 전문가 임정열 전무 인터뷰
지난 8일 중앙일보 본사에서 소방 분야 최고 전문가인 임정열 전무를 만났다. 고난의 연속이던 인생을 반전시킨 데는 책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장진영 기자
" 유퀴즈, 사기였네. " 최근 tvN 예능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나와 화제를 모은 소방 관련 설계·감리·시공업체 영설계에프엔씨 임정열(64) 전무를 지난 8일 만난 후 든 생각이었다. 방송 속 임 전무는 우유 배달과 가사도우미 등 생계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하다 중년에 접어든 어느 날 "가난을 탈출해 두 아이 의대·발레 공부 시키려면 공부밖에 없다"는 생각에 자격증에 도전, 공대 나온 젊은 사람도 따기 어렵다는 극악 난도로 악명높은 '기술사'를 50세 넘어 둘이나 딴 인물이다. 젊을 땐 다음 날 끼니 걱정하는 육체노동자였지만, 지금은 정년 없이 원하는 시간만큼 일하고도 억대 연봉 받는 전문가가 됐다.
임 전무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첫 아이 출산 직후 남편이 회사를 관둬 고된 새벽 우유 배달을 했고, 남편의 재취업과 본인의 피아노 교습소 운영 등으로 겨우 먹고살 만하다고 안도할 즈음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를 맞아 신혼 초보다 더 극심한 생활고를 겪었다. 무릎에 피딱지가 앉을 만큼 기어 다니며 입주 청소했던 혹독한 과거는 방송 그대로 전부 사실이다.
드라마보다 더 파란만장한 삶
천덕꾸러기가 전문가로 성장
문학 주인공이 자존감 지켜줘
한계 알되 두드리면 길 열려

고작 3개월 준비하고 공인중개사 1, 2차 시험을 동시 합격했다거나(2006), 이 과정에서 소방 분야에 관심을 갖게 돼 준비 1년 만에 소방설비기계기사와 전기기사 자격증을 딴 쌍 기사가 되고(2007), 자격 요건(기사 경력 2년) 채운 뒤 소방시설관리사에 합격(2011)해 연봉을 두 배 올린 것도 사실이다. 또 갱년기 증상으로 펜 잡기조차 힘든 와중에 눈 닿는 곳마다 책을 찢어 붙여가며 독하게 공부해 시험 준비 1년 만에 소방기술사에 최고령 합격(2014), 대표 부탁을 받아 건축기계설비기술사(2017)까지 따 전무로 승진한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지난 4월 예능 '유퀴즈'에 출연한 임정열 전무(오른쪽). [사진 유튜브 캡처]
그런데 사기라고 한 건, 정작 임 전무 인생을 관통하는 큰 줄기를 생략한 거 같아서다. 나이 먹고 갑자기 각성해 기술사가 된 게 아니었다. 식모살이에 인격적 모독이 일상인 어린 시절부터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그렇게 학벌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내면의 힘을 키워 인생 반전을 이룰 수 있었다. 임 전무 시각에서 그의 인생을 정리했다. 안혜리 논설위원
"보여줬다 40년 만에" 아버지는 학교 근처도 못 간 농부였지만, 늘 한문책 쌓아두고 읽을 만큼 배움이 깊었다. 비상한 머리 덕분에 고향 집 근처 강원도 신철원에서 수만 평의 정부 개간사업을 따냈는데, 끝없이 들어가는 돈을 감당 못 하고 마무리 직전 스스로 생을 놓아버렸다.
고작 열네 살(중3)이던 1975년, 그렇게 인생이 바뀌었다. 내가 중 1, 2 때 받은 전교 1등 장학금을 통장에 넣곤 "막내 대단하다, 이거로 꼭 대학 보내주마"했던 아버지가 떠나자 사랑받던 막내딸은 한순간 천덕꾸러기가 됐다. 언니 오빠들은 모여 앉아 대놓고 "저 계집애 왜 낳아서"라고 했다. 집을 날린 터라 어머니는 오빠가 모셔갔고, 난 1시간 떨어진 김화에서 양장점 하던 큰 언니 집에 가 식모살이 같은 더부살이를 했다. 새벽에 일어나 쌀 일어 밥 지어놓고 학교 다녀오면 조카 둘 돌보고, 양장점 시다(직원)들이 남긴 산더미 같은 설거지하고, 물 길어와 빨래했다. 힘들어도 쫓겨날까 봐 언니 앞에서 울 수조차 없었다. 그야말로 현실판 애순이(넷플릭스 '폭싹 속았수다' 주인공)였다.
임정열 전무 작은 오빠 결혼식 사진. 임 전무(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아버지(임 전무 오른쪽)와 한 프레임 안에 들어있는 건 이 사진이 유일하다. [사진 임정열]
학교는 멀고, 그마저도 집안일 하느라 빠지기 일쑤였는데 공부는 잘했다. 인문계 가겠다니, 다들 펄펄 뛰었다. "대학 보내줄 사람 없으니 꿈도 꾸지 말고 졸업장이나 따. " 그 시절 여자로는 드물게 공고(김화공고 전자과) 나온 배경이다. 전교 1등이어도 재미가 없었다. 그런데 '전자계산기' 수업 때 "이게 컴퓨터다, 앞으로는 은행 등에서 주판 아니라 컴퓨터를 쓸 것"이라는 말에 꽂혔다. 당시 전자계산학과가 있던 광운대에 합격했다는 이유만으로 큰 오빠한테 흠씬 두드려 맞았다. "졸업하면 아무한테나 시집 가. " 오기가 생겼다. 속으로 되뇌었다. "난 절대 아무렇게나 살지 않아. 나 무시하는 당신들한테 언제가 보여줄 거야. "

교회 어린이집 교사 하며 3년간 악착같이 돈 모아 상명대에 갔다. "좋아하는 공부 시켜주겠다"던 남편이 첫 아이 출산 후 덜컥 대기업을 관두는 바람에 졸업 대신 애 들쳐업고 새벽 우유 배달을 했다. 다행히 남편은 재취업, 난 백석예술대 나와 피아노 교습소 차려 형편이 좀 피는가 싶더니 IMF가 왔다. 남편 회사는 사라졌고, 확장한 교습소 빚 갚으려 전에 화장품 가게 하며 마련한 일산 아파트를 팔았다. 그렇게 또 우유 배달, 청소에 나섰다.

2014년, 국가 공인 최상위 자격증인 소방기술사에 합격했을 때 벅찼다. 40년 만에 드디어 보여줄 수 있어서.
학벌 아닌 진짜 공부 "네까짓 게. "
지금도 이 말이 제일 싫다. 어릴 적 공부하고 싶은 마음을 이해받기는커녕 주위 사람들의 이런 인격적 모독이 식모살이 고충보다 더 아팠다. 돌이켜보니, 모욕과 멸시를 당하면서도 상대방 잣대로 나를 낮춰보지 않고 오히려 당당할 수 있었던 데엔 책이 있었다.

아버지 영향인지, 원래 책을 좋아했다. 아버지는 살아생전 "남의 머리에 든 지식을 내 거로 만들어 살아가는 세상"이라며 "땅 물려주기보다 땅 팔아 학문을 쌓아줘야 (애들이) 평생 살아간다"고 했다. 그렇게 서울에서 공부한 오빠들이 보내온 '소년중앙''어깨동무' 같은 잡지 속 과학이나 역사, 히말라야 얘기 등을 읽고 또 읽었다. 중학교 땐 학교 도서관이나 친구 집에서 셰익스피어와 소공녀, 소공자, 플란다스의 개 등 소년소녀문학 전집을 열심히 빌려 봤다.

다니기 싫은 공고를 버틴 것도 일본 전국시대를 다룬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하소설『대망』과 박경리의 『토지』, 펄벅의『대지』, 그리고 다양한 프랑스·독일 문학 덕분이었다. 특히『대망』과『토지』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지만 강인하게 성장해 크게 성공하는 인물이 주인공인데, 어쩌면 이들의 영웅 서사를 나와 동일시하며 혹독한 시절을 버텼는지 모른다.
서희(『토지』 주인공)처럼 돈 많이 벌어 고향 집과 땅을 되찾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 목숨과 바꾼 땅은 개발 마무리 뒤 아버지한테 돈 빌려줬던 큰 언니네가 가져갔고, 집은 되찾지 못했다. 하지만 평생 공부해서 하나도 어렵다는 기술사를 둘이나 딴 나야말로 아버지 뜻을 이은 딸이라고 스스로 칭찬하고 싶다.
지난 2017년 건축기계설비기술사를 딴 후 버킷리스트인 안나푸르나 트래킹을 했다. [사진 임정열]
53세 늦은 나이에 기술 자격증의 종착역인 소방기술사 시험을 치를 때, 두 번 떨어지고도 결국 붙은 건 물론 모든 걸 건 독한 공부 덕분이다. 또 젊은 사람보다 기억력은 떨어져도 소방설비 기계·전기 기사(2007), 소방시설 관리사(2011) 현장 경험 덕에 논리적으로 이해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큰애 들쳐업고 새벽 우유 배달할 만큼 인생이 고되고 힘들어도, 아니, 그럴 때마다 더 공부의 끈을 놓지 않으려 책을 가까이 한 게 컸다. 외워야 할 수험서가 가득해도 서양사나 아라비아 역사, 동북아 역사책, 『로마인 이야기』등을 보며 머리를 식혔다. 책이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 자존감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준 셈이다. 지금도 초한지·삼국지를 읽고, 혼자 유튜브 보며 지구과학과 우주물리학 공부를 한다.
커넥팅 닷 Connecting Dots 식모살이→김화공고→광운대 합격→교회 어린이집 교사→서울대 성악과 낙방, 상명대 입학→결혼·출산→대학 중퇴→배달·청소→화장품 가게→백석예술대 음악과 졸업→피아노 교습소→배달·청소→독학사(가정학과)→학습지 교사→공인중개사→소방설비기계기사·전기기사(쌍 기사)→소방시설관리사→소방기술사→건축기계설비기술사→전무 승진.
간추린 인생 경로다.
남들 꺼리는 허드렛일에 피아노·화장품·부동산·소방…. 맞닥뜨리는 대로 계획 없이 산 줄 알았는데, 여러 점(dot)이 나를 소방으로 이끌었다. 학위 갈증으로 딴 가정학과 독학사(2003) 덕분에 기사 응시가 가능했고, 장롱 면허 공인중개사(2006) 덕분에 소방의 세계를 알았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인생의 다양한 경험이 의미 있게 연결된다는 스티브 잡스 말이 맞았다.
출산 후 대기업 다니던 남편 퇴사로 가정형편이 정말 어려웠다. 목욕탕에서 아이 요구르트 하나 안 사줄 만큼 아껴서 임정열 전무는 작은 화장품 가게를 했다. 가게 앞에서 아들과 함께. [사진 임정열]
어릴 적 꿈은 성악가였다. 오빠 음악 교과서 보며 나만의 뒷동산 음악회 열고, 어린이집 교사하며 풍금을 독학했다. 딱 석 달 레슨 받고 치른 서울 음대 성악과 입시에 좌절한 후엔 프랑스로 음악 유학 간다며 불어로 틀었다. 서른 넘어 2년제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하고서야 환상을 깼다. 조수미급 재능인 줄 알았는데 취미 수준 실력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한계 인정하기, 다른 말로 만족하기다. 남들은 나더러 한계 넘은 삶이라 할지 몰라도 난 한계를 인정해야 인생을 직시할 수 있다고 본다. 모든 사람이 피겨스케이팅 금메달리스트 김연아가 될 수 없는데 "능력은 무한"하다며 피겨 하라고 부추기면 불필요한 무한 경쟁으로 치달아, 만족과 멀어진다.

사실 '감사만(감사·사랑·만족)'을 인생 좌우명 삼은 나 역시 만족이 제일 어렵다. 소방기술사, 건축기계설비기술사에 소방시설관리사까지 가진 이는 드물다. "기술사 하나 더 따면 유일무이한 존재"라며 부추기는 사람이 꽤 있었다. 잠시 흔들리다, 교만이지 싶어 포기했다. '기술사 컬렉터'가 아니라 업무에 필요해서 둘을 딴 건데, "너보다 잘 났다"는 계급장 달고 싶은 욕망에 중심을 잃을 뻔했다.
지난 3월 코이카 일원으로 한국 소방 기술을 전수해주러 우즈베키스탄에 갔다. [사진 임정열]
감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소방을 직업 삼아서 감사하다. 화재 시 인명을 안전하게 대비시키는 경로를 설계하는 등 내 일이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는 데 기여할 수 있어서다. 지난 3월 한국국제협력단(KOICA)과 함께 소방기술 전수하러 간 우즈베키스탄에서 다시 한번 정말 감사했다. 어릴 적 미군이 던져주는 껌·초콜릿주워 먹으며 가난하게 살았는데 이젠 해외에 기술 전해주는 나라의 전문가가 됐으니 하는 말이다.

지금은 절대적 빈곤의 시대는 아니다. 하지만 적잖은 사람들이 상대적 박탈감에 방황한다. 그런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 비단 지금뿐 아니라 어느 시대에서나 오를 수 없는 사다리는 있었다. 하지만 본인이 잘할 수 있는 걸 찾아 포기하지 않고 두드리면 항상 길이 열렸다. 가난·학벌·나이를 극복한 나처럼.
안혜리 논설위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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