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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이경혜 '광주 연작 시리즈' 2권
범현이 소설집 '총알의 기억'
범현이 작가의 소설집 '총알의 기억' 속 한 장면. 1980년 5월 21일 계엄군이 쏜 총에 맞은 시민들이 길에 쓰러져 있다.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의 일대기를 완성한 화가 하성흡이 그렸다. 내일을여는책 제공


"다시 한번 부탁한다. 오늘만은 내 얘기를 조용히 들어주기 바란다. (…) 살아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정도는 해야겠지? 죽은 사람들 앞에선 조용히 귀라도 기울여야 하는 게 최소한의 도리가 아닐까? 우리에겐 그들한테는 없는 목숨이 붙어 있으니까. 자, 그럼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20년 교직 생활의 마지막 수업. 중학교 수학 교사인 '나'는 영원히 열여섯 살로 남은 친구 박기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1980년 5월 20일 광주에서 군인이 휘두른 진압봉에 머리를 맞고 쓰러진 기훈이. 만화책을 마저 읽고 가겠다는 '나'를 뒤로한 채 문제집을 사들고 책방을 나선 기훈이는 무장한 군인들과 맞닥뜨린다. "너, 자전거 타고 다니면서 데모꾼들 연락해 주는 거지? 너, 연락병이지?" 기훈이는 떨면서도 똑똑히 외쳤다. "왜 그러세요? 저는 중학생이에요. 동신중학 3학년이에요. 왜 그러세요?" 그러곤 순식간이었다. '나'는 책 더미 뒤에 웅크린 채 벌벌 떨고만 있었다. 무엇인가 두드려대는 소리가 한참이나 더 들렸다.

광주 연작 시리즈 '명령'과 '그는 오지 않았다'·이경혜 지음·바람의아이들 발행·각 140쪽·각 1만2,000원


문제집 든 중3도, 소년공도... 5·18 청소년 희생자



'그해 오월, 푸르른 신록 속에 스러져 간 넋들에게' 바치는 소설이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에 맞춰 출간됐다. 이경혜 작가의 청소년 소설 '광주 연작 시리즈'와 범현이 작가의 소설집 '총알의 기억'이다. 2종 모두 가독성 있게 쓰여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기훈은 이 작가의 '광주 연작' 첫 소설인 '명령'의 주인공이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책방 앞에서 계엄군이 휘두른 몽둥이질에 쓰러진 중학교 3학년 박기현군을 모델로 했다. 다만 어디까지나 픽션이다. 작가는 '광주 연작에 부치는 글'을 통해 "실제로 존재했던 한 분 한 분의 삶과 죽음에서 모티프를 가져오기는 하지만 그 한 분만의 이야기가 아니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자리에 있었다면 누구든 당할 수 있는 일이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허구로 썼다는 얘기다. 그는 "소설은 모두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하고, 특히 죽음을 당할 때의 모습은 밝혀진 경우 가능한 사실에 맞추겠지만 (5·18기념재단이 희생자 유족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에 나온 사실 외의 모든 삶의 과정과 인물들은 전부 제 상상에서 나온 허구가 될 것"이라고 보탰다.

범현이 작가의 소설집 '총알의 기억' 속 한 장면. 1980년 5월 전남도청에 모인 시민들이 "계엄 해제"를 외치며 시위하고 있다.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의 일대기를 완성한 화가 하성흡이 그렸다. 내일을여는책 제공


'명령'과 함께 선보인 그의 두 번째 소설 '그는 오지 않았다' 역시 1980년 5월 21일 광주 금남로에서 총상으로 숨진 자개공장 소년공 18세 박인배군에서 시작된 이야기다. 이렇게 광주 연작은 한 편에서 한 명씩 5·18의 청소년 희생자를 호명한다. 어린 나이에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이들의 존재 자체가 무도하고 잔인한 국가폭력의 증거이다. 작가는 앞으로 못해도 7, 8편의 소설을 더 쓴다는 계획이다.

5·18 목격했던 여고생… "기록 멈추지 않을 것"



'총알의 기억'은 전남여고 3학년 때 5·18을 목격한 범현이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옛 전남도청 인근에서 오월미술관을 운영하는 범 작가가 2016년 뒤늦게 등단한 후 '오월'에 대해 쓴 두 편의 단편을 엮은 책. 그는 "여고 시절 전남도청 앞에서 버스를 타고 내리며 통학했는데 5·18 땐 수업이 끝나면 횃불 행진을 따라다녔던 기억이 난다"며 "고3 중간고사 기간이었는데 계엄군이 진압봉을 든 채로 학교 안에 들어왔었다"고 떠올렸다.

총알의 기억·범현이 지음·내일을여는책 발행·148쪽·1만5,000원


수록작 '꿈꾸는 총알'에는 5·18 때 총상을 입은 한 남자가 나온다. 남자의 허파 뒤에 박혀 통증을 유발하는 총알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나아간다. 작가는 실제로 폐에 총알이 박혀 평생 약이나 술 없이는 잠들지 못했던 실존 인물을 만나 이 소설을 썼다.

또 다른 수록작 '아름다운 상상'은 태명이 '쑥쑥이'인 뱃속 아기가 화자다. 이 아기를 품은 여성은 귀가하지 않은 남편을 마중나갔다 계엄군이 쏜 총에 맞고 숨을 거둔다. 작가는 "손주를 본 후 5·18 희생자인 8개월 임신부 최미애씨의 태중 아이가 생각났다"며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죽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린 아이가 꿈꿨던 세상을 아이의 입을 빌려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가 도청 근처를 떠나지 못하듯 5·18은 현재형이다. "혼돈 그 자체의 참혹한 시대이지만 문학은 포기하지 않고 진실을 공유하고 꿰뚫어 볼 힘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끈질기게 들여다보고 기록할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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