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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시민군 도운 '데이비드 돌린저'
45년 만에 광주 명예시민으로 선정
"5·18 경험한 한국인 양심·저항 정신이
12·3 불법계엄 막아… 공동체 인식해야"
데이비드 돌린저. 광주광역시 제공


신군부 지령을 받은 계엄군이 총칼을 앞세워 광주를 진압하던 1980년 5월 24일, 이에 반발한 시민들은 전남도청으로 모여 결사항전을 준비했다. 그곳엔 파란눈의 데이비드 돌린저(미국·당시 24세)도 있었다. 유혈이 낭자하는 참상을 우연히 목격한 그가 "무전기 감청을 돕겠다"고 나섰던 것. 그러자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는 그에게 “당신도 이제 광주 사람이 다 됐다”고 했다. 계엄군과의 최후 항전을 불과 사흘 앞두고 윤 열사가 건넨 이 농담은 그 이후 20대 미국 청년의 삶을 결정짓는 화두가 됐다. 그리고 45년이 흐른 올해 그는 ‘광주 명예시민’으로 선정돼, 그 말이 현실이 됐다.

69세로 백발이 성성한 돌린저는 12일 한국일보와 서면 인터뷰에서 "5·18 경험은 내가 세상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처음 깨달은 순간이었다"고 기억하며 "광주·전남 시민들에게서 함께 살아가는 법, 사랑하는 법, 그리고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책임감을 배웠다"고 말했다.

삶은 때때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른다. 생물학 전공 대학생이던 그는 1978년 결핵 퇴치 봉사단원으로 한국을 처음 찾았다. 철저한 이방인이었던 그가 광주 사람이 된 것은 순전히 우연한 결심 때문이었다. 전남 영암 보건소에서 근무하던 그는 1980년 5월 17일 동료의 결혼식 참석차 광주를 찾았다가 5·18 참상을 목도했다. 이튿날 영암으로 가는 첫차를 타고 광주를 빠져나왔지만, 21일에 걸어서 다시 봉쇄된 광주에 들어갔다.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이 선택을 두고 그는 "젊은 날의 치기"라고 회고했다. "특별한 결심이 있었다기보다 그 당시 들려오는 정보와 소문을 바탕으로 광주로 가서 알고 지낸 친구들과 학생, 가족을 확인하는 것이 책임이라고 생각했어요.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는 건 상상하지도 못했고, 그저 도와주고 싶었죠."

동료 광주 결혼식 갔다 참상 목격... 시민군 통역

1980년 5월21일 데이비드 돌린저가 전남 나주에서 광주까지 걸어가던 중 찍은 사진.시민군이 탄 트럭과 버스의 앞 택시에는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승객으로 위장해 타고 있었다. 데이비드 돌린저 제공


광주에 도착한 그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군 헬기가 시민들을 향해 총탄을 난사하는 모습이었다. 돌린저는 "버스가 나주까지만 운행해 광주로 걸어 들어갔고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헬기에서 사격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며 "그들은 도청 주변 지역을 향해 발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이어 "다음 날 기독병원에서 응급실 의사들과 얘기를 나눴고 한 의사가 총알이 왼쪽 어깨로 들어와 오른쪽 엉덩이 위로 빠져나간 흔적이 있는 X-ray 사진을 보여줬다"고 했다. 이는 5·18 당시 헬기 사격이 없었다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주장과 완전히 대치되는 증언이다.

충격을 받은 그는 외신기자들에게 시민들의 상황을 알리는 통역사 역할을 자처하면서 어느새 시민군 일원이 됐다. 모든 일을 직접 보고, 듣고 외부에 알리겠다는 사명으로 시민군의 최후 항쟁지였던 옛 전남도청에서 무전기를 감청하기도 했다. "단 하루 전남도청에서 머물렀던 이 날 기억이 가장 선명해요. 윤상원 열사가 주도한 회의를 지켜보고 밤새 라디오를 감청하며 학생 또는 퇴역 군인들과 많은 얘기를 나눴죠. 그때 시민들이 왜 (총을 들고) 저항을 선택했는지 깊이 이해하게 됐어요. 그들 중 일부는 이미 (죽을 것이란) 결과를 알고 있었지만, 더 큰 가치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기로 결심했던 겁니다."

귀국 후 518 참상 알려... "시민 많이 못 도와 후회"



5·18 이후 한국 내정에 지나치게 개입했다는 이유로 압력을 받아 이듬해 귀국한 그는 제약회사에서 근무하는 틈틈이 의회와 인권단체, 언론사 등에 증언록과 사진을 보내며 진상을 알리려 백방으로 뛰었다. 유엔인권위원회에 1980년 광주 목격담을 담은 인권침해 보고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현재 인도에서 근무하며 세계보건기구(WHO)·세계백신면역연합(GAVI) 등에 자문 활동을 병행 중인 그는 "광주는 제 인생의 시작이었고, 광주에서 보고 느낀 모든 것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며 "당시 시민들을 더 도와주지 못해 많이 후회된다"고 말했다.

1980년 5월 전남대학교 병원 영안실에 시신들이 쌓여있는 모습. 데이비드 돌린저 제공


그래서 12·3 불법 계엄 사태는 남 일 같지 않다. 심야 회의 도중 한국에서 계엄이 터졌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그날 여느 한국인처럼 밤잠을 설쳤다. 그는 "용감하게 국회에 돌아와 계엄령 통과를 저지한 의원들과 이를 지지하기 위해 수천 명의 시민이 국회를 찾은 장면은 매우 자랑스러웠다"며 "한국 국민이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일어선 모습을 44년 만에 다시 지켜봤다"고 했다.

"한국 사회 갈등, 도덕·인간다움 위기"



그는 또 "광주의 희생이 계엄을 막았다"고도 평가했다. 5·18 역사적 비극이 국민들의 집단의식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군인들이 국회 봉쇄를 주저한 것은) 억압 속에서도 양심과 저항이 존재한 것"이라며 "일제강점기부터 이승만·박정희 정권, 광주와 전두환 정권 등 지난 120여 년 한국 역사를 돌이켜 보면 그 정신은 항상 존재해 왔다"고 했다.

5·18을 경험하고 12·3 불법 계엄 사태를 지켜본 이 이방인은 한국인들에게 "'한(恨)의 정서'를 되찾아달라"고 제언한다. 돌린저는 "오늘날 한국 사회가 경험하는 분열과 갈등, 반목은 단순한 정치적 위기가 아니라 가치·도덕, 인간성과 인간다움의 위기"라고 평가했다. "‘나’만이 아닌 ‘우리’라는 인식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위해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지,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지 생각해야죠. 광주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준 좋은 예입니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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