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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진짜 돈 되는 사기
1년 추적 끝 '지슨개발 가등기' 사건 전말
"빌라 담보로 돈 꿔 주면 고리 이자 줄게"
월세 둔갑, 다단계 덧씌운 진화한 사기
반년 만에 100억 뽑고 범죄 수익 빼돌려
2심 줄어든 형량에 "몸빵 재테크 성공"
가등기 방패에 평생 족쇄 찬 세입자들

편집자주

거듭 진화하는 전세사기는 단순히 제도의 한계로만 설명할 수 없다. 법과 제도의 틈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조직적 금융범죄에 피해자는 다시 일어설 기회조차 잃고 있다. 집을 삶의 터전이 아닌 빚의 족쇄로 만드는 이들, 그 범행 구조를 추적했다.

빌라가 몰려 있는 서울 강서구 화곡동 빌라촌. 배우한 기자


"팀장님, 이게 얼마 만입니까. 잘 지내셨죠?"


2021년 12월 어느 날, 서울 강남의 A법률사무소에 나타난
임지명(아래 모두 가명)
씨가 팀장인 김종민씨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3년 정도 됐을까?' 김씨는 오랜만에 등장한 임씨가 전혀 낯설지 않았다. 변호사를 만나러 한동안 드나들었고, 그때도 그는 유난히 깍듯했다.

임씨가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아는 분과 부동산을 하나 사려는데 자금이 좀 부족해서요. 빌라를 담보로 잡히고, 5~6개월 정도만 돈을 빌렸으면 하는데. 이자는 월 2부(월 2%·6개월 12%)도 가능합니다."

김씨는 서류를 찬찬히 넘겨봤다. '경기 부천시 괴안동 A빌라 203호'. 신축 빌라로 매입가는 3억1,600만 원이었다. 등기부등본, 부동산 거래를 증명하는 신고필증, 취득세 영수증 등 갖출 건 다 갖췄다. 임씨의 지인 이성애씨가 한 달 전 빌라를 매입한 건 분명해 보였다.
마지막 서류는 '월세 계약서'. 보증금 4,000만 원, 월 60만 원이었다.


흠잡을 데가 없었다. 담보 가치가 일단은 확실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자금 회수가 어렵지 않다는 뜻. 임씨와 법률사무소 변호사의 친분도 믿을 만했다. 마침 김씨는 잇단 투자 성공과 함께 부동산 개발에 본격 발을 들인 참이었다.

김씨는 얼마 뒤 부동산개발회사인 '지슨개발' 박대박 회장에게 이를 보고했다. 박 회장도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김씨를 데리고 공동대표인 이지현 이사와 A빌라를 찾았다. 주변 비슷한 빌라 시세는 4억 원 수준이었다. 203호도 직접 확인했다. 세입자를 만나진 못했지만, 계약서에 적힌 연락처로 전화를 걸자, 상대는 "월세 세입자"라고 답했다.

대출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책정한 대출금은 1억5,000만 원. 시세 4억 원짜리 빌라가 반값에 낙찰되고, 세입자 보증금 4,000만 원을 제한다 해도 1억6,000만 원이 남는다는 계산이었다. 마지막 안전장치도 마련했다. 6개월 안에 대출금을 갚지 못하면 지슨개발로 소유권을 넘기는 '매매예약 가등기'를 설정한 것이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1억9,000만 원에 신축 빌라를 인수하는 셈, 손해볼 게 없는 장사였다.

2022년 2월 지슨개발은 임씨에게 첫 대출을 내줬다. 이후 반년 동안 임씨는 빌라 119채(서울·경기·인천 일대)를 담보로 약 100억 원을 빌려갔다. 하지만 수익을 보장할 것이라 믿었던 빌라는 골칫덩이가 됐다. 담보로 잡은 빌라는 모두 매맷값과 전셋값이 똑같은, 담보 가치가 제로(0)인 깡통빌라였다.

세입자도 당연히 피해를 입었다. 지슨개발이 걸어둔
가등기
가 '덫'이 됐다. 세입자 100여 명은 전세금 회수는 고사하고 소유권 이전의 '셀프 낙찰'의 길이 막혔다. 빌라에 평생 거주하는 것 외 피해를 회복할 방법은 없었다. 피해자 구제를 위한 '전세사기특별법'도 아무 도움이 안 됐다.

사기꾼들의 만남..."돈 되는 사기"의 시작



빌라 119채를 담보로 100억 원에 달하는 대출 전세 사기. 이를 위해 임씨에게 필요한 시간은 고작 6개월이었다. 본보는 1년 가까이 '지슨개발 가등기 사건'을 추적하면서 이들 이면의 전모를 어렵사리 확인할 수 있었다. 빌라를 지렛대로 삼은 기존 방식에 조직적인 전세 계약서 위조·다단계 방식을 더한 수법. 기존 무자본 갭투자(전세금 100%로 매수) 사기와는 전혀 다른, 최근 폭발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전세 사기의 진화였다.

본보가 확인한 65세 임씨는 다수의 사기 전과를 가진 전문 사기꾼이다. 최근인 2018년 8월 "벤츠를 싼값에 사주겠다", "돈을 빌려주면 급매로 나온 땅을 사 대출로 갚겠다"며 수억 원을 뜯어낸 혐의(사기)로 3년형을 선고받았다. 2021년 1월 가석방됐고, 그해 8월 형집행이 끝났다.

임씨는 출소 뒤 사기 행각을 이어갔다. 특히 지인 소개로 권기태(50)·최미자(53) 부부를 만났는데, 이들 역시 전문 사기꾼이었다.

권씨와 최씨 부부는 이미 무자본 갭투자로 빌라를 매입한 뒤, 위조한 월세 계약서를 담보로 대출을 받는 사기를 몇 년 전부터 벌여왔다. 대출 규모가 작아 사건이 크게 불거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들이 호기롭게 털어놓은 '소소한' 사기에 임씨 머릿속에는 더 큰 판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진짜 돈 되는 사기를 해야 할 때로군요."



교대역 근처 배회한 임지명의 진짜 목적

위조된 월세계약서. 세입자 이름과 주민번호를 제외하고 모든 내용이 가짜다. 연락처도 임 씨 일당 번호라, 실제 세입자와 연락이 닿기 어렵다.




계획을 곧장 실행에 옮겼다. 중요한 건, 대출해 줄 전주(錢主)를 구하는 일이었다. 임씨가 '돈줄'을 확보하기로 했다. 권씨 부부는 담보가 될 빌라를 구하고, 계약서를 위조하는 '기술'을 맡았다. 권씨 부부 주변엔 전문 꾼들이 포진해 있었다.

2021년 11월, 첫 타깃은 서울 여의도의 '주 회장'이었다. 이들은 깡통빌라 한 채로 주 회장에게서 대출 1억4,000만 원을 뽑아내는 데 성공했다. 위조된 월세 계약서를 주 회장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추가 범행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처음 동원된 '바지집주인'이 말실수를 한 것이다. "빌라에 월세입자가 아니라 전세입자가 있다"고 하면서 사기 전모가 들통났고, 이들은 "착오가 있었다"며 황급히 대출금 1억4,000만 원을 돌려줬다.

임씨는 그러나 멈출 생각이 없었다. 법률사무소가 밀집한 서울 교대 일대를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먹잇감'을 찾아나섰다. 명동의 '큰손' 같은 사채업자들이 법률사무소를 끼고 움직였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 레이더에 걸려든 게 김종민씨였다.

총책-모집책-바지 '전세 다단계 완성'


임씨는 운전기사가 딸린 벤츠를 타고 다니며 성공한 부동산 사업가로 행세했다. 지슨개발 박 회장도 그때는 "잘 해보라"고 신뢰했다. 임씨 일당은 2022년 2월 첫 대출 이후 사기 구조를 보다 정교하게 만들었다. '두 번의 실패는 없다'는 마음으로.

권씨 부부는 신뢰할 수 있는 모집책을 끌어모았다. 이들은 깡통빌라 명의를 떠안을 바지집주인을 섭외하고 교육하는 일도 맡았다. 동원된 모집책은 모두 18명. 이 일을 전문으로 하는 꾼들이었다.

모집책은 경쟁적으로 바지집주인을 구해왔다. 가담한 바지집주인이 60명 이상이었다. 전문 사기꾼이 대부분이었지만, 실상을 몰랐던 일반인도 여럿 있었다.

"다주택자한테 세금을 세게 매기잖아요. 두세 달 만 집주인으로 해 주시면 한 채당 500만 원 드릴게요."

달콤한 유혹에 한 남성은 부인 명의를 몰래 넘겼다. 인천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모자는 둘의 명의를 한꺼번에 넘겨줬다. 뒤늦게 찜찜함을 느끼고 명의 반환을 요구할 때도 있었지만, 일당은 아예 연락을 끊었다. 바지집주인들에겐 "빌라에 누가 사느냐 물으면 무조건 월세입자라고 답하라"고 입단속을 시켰다.

모집책들은 바지집주인 명의로 깡통빌라를 무차별적으로 사들였다. 기존 전세보증금을 그대로 떠안는 조건으로 소유권을 바지집주인에게 넘겼다. 권씨 부부는 대출을 위해 월세계약서를 위조했다. 세입자 이름만 진짜고, 도장과 연락처 등 나머지는 모두 조작된 서류였다.

모두 가짜, 법무사도 속았다



전입세대 열람 내역엔 세입자 이름만 나오고 전월세가 표기돼 있지 않다.


임씨 일당은 3월 한 달에만 월세계약서 17장을 위조하고, 지슨개발로부터 20억 원 가까운 대출을 받아냈다. 빌라를 지렛대로 한 다단계 방식이 먹혀든 것이다. 담보 빌라는 서울 13채, 인천 3채, 경기도 1채였다.

지슨개발은 서류 검토와 대출 계약을 서울시청 근처의 신기남 법무사에게 맡겼다. 신 법무사는 매매계약서, 월세계약서, 주민센터가 발급한 전입세대 열람내역서 등을 꼼꼼히 살폈다. 박 회장에게 '이상 없음'을 보고했고, 이후 대출금을 받아 바지집주인에게 전달했다.

법무사는 확인을 마쳤다고 했지만, 당시 구조상 서류로 가짜 월세 계약을 가려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전입세대 열람내역서에는 세입자 이름만 있을 뿐, 전·월세 여부는 표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계약서에 기재된 연락처로 전·월세 여부를 직접 확인해봤지만, 이 번호들 역시 임씨 일당이 조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당의 긴장은 조금씩 느슨해졌다. 수법은 허술해졌고, 심지어 전세권이 설정된 등기부등본을 그대로 제출한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법무사는 끝내 '조작'을 걸러내지 못했다. '이상이 있을 리 없다'는 안일한 생각 탓이었다. 법무사가 임씨 일당과 금전 거래를 했다는 의혹도 제기됐지만, 뒷받침할 만한 구체적 증거는 없었다.

지슨개발은 계속 들떠 있었다. 이자 수익이 짭짤한 데다, '가등기'라는 안전장치에 대한 믿음이 지나쳤다. 9월까지 반년에 걸쳐 나간 대출금이 100억 원(빌라 119채)에 이르렀다. 첫 대출 만기인 8월 임씨가 지연이자만 내고 대출을 3개월 연장하고 나서야, 불안감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지슨개발은 대출 회수를 위한 '급매' 방안을 검토하고 나섰다. 빌라 몇 채를 인근 공인중개사무소에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중개업자들이 도리어 "전세 낀 빌라를 월세 빌라로 속여 내놓았다"며 항의했다. 그때 지슨개발은 계약서 위조를 눈치챘다. 임씨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잡아뗐다.

모든 수익 가족에 빼돌린 파렴치



대출금 100억 원은 몽땅 임씨 일당 주머니로 들어갔다. 임씨가 60억 원, 권씨 부부가 30여억 원 정도를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1심에서 임씨는 징역 9년, 권씨 부부는 각각 6년, 5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나마 2심 재판부는 양측에 각각 1년씩을 감형했다.

이 사건에 정통한 변호사는 "처음부터 '몸빵'을 각오하고 범죄를 저질렀다"며 "예상보다 형량이 세게 나오자 당황한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이어 "범죄 수익 대부분을 가족 명의로 빼돌렸으니, 사실상 목적은 달성한 셈"이라고 꼬집었다.

가장 큰 피해자는 역시나 세입자들이다. 대출 담보로 잡힌 빌라에 들어간 119명 중 전세금을 돌려 받은 사람은 반환보증에 가입된 20명 정도다. 나머지 100명가량은 여전히 어떤 배상도 받지 못하고 있다.

전세사기 피해자의 '마지막 탈출구'는 경매를 통한 전세금 회수다. 하지만 이들에겐 이마저도 허락되지 않는다. 가등기 주택의 우선 소유권이 가등기권자(지슨개발)이기 때문이다. 경매시장에서 가등기 주택은 기피 대상이기도 하다. '셀프 낙찰' 또한 불가능하다. 정부의 전세사기 대책에서 가등기 주택은 보호 대상에서 빠져 있어서다. 사실상 '집에 갇힌 처지'가 된 셈이다.

현재 경매에 부쳐진 서울 은평구 응암동 한 빌라에 달린 경매업체 분석 문구. 집주인은 임 씨 일당이 고용한 바지집주인 이모 씨고 가등기권자는 지슨개발이다. 가등기된 매매예약이 완결되는 경우, 즉 본등기를 하면 매수인이 소유권을 상실할 수 있다고 나와 있다. 따라서 가등기 주택은 경매시장에서 기피 1순위다. 지지옥션 캡처.


지슨개발은 최근 세입자들에게 "손해를 절반 감수할 테니, 대출금 절반만 갚으면 가등기를 말소해주겠다"며 합의를 종용하고 있다. "가등기가 말소되지 않으면 평생 이 빌라에 살 수밖에 없다"며 세입자들 약점을 파고들고 있다. 임씨 일당을 변호했던 변호사는 세입자들에게 "실상을 알게 됐다"며 "자신에게 일을 맡기면 가등기를 말소해주겠다"고 영업 중이다.

세입자들은 사비를 들여 변호사를 선임해 지슨개발을 상대로 가등기 말소 소송을 제기했지만, 모두 패소했다. 한 세입자는 취재진에 이렇게 말했다.

"사기꾼이 빌린 대출금을, 아무 죄 없는 세입자인 제가 갚아야 한다는 현실이 너무 끔찍합니다. 셀프 낙찰도 못 받고 결국 이 빌라에서 평생 살아야 한다는 건데…앞으로 결혼하고, 아이 낳고, 정상적으로 살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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