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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양김 분열로 단일화 중요성 커져
가장 성공적인 사례는 '1997년 DJP 연합'
16·18·19·20대 대선 때마다 단일화 논의
△지지기반 이질성 △후보 간 타협 여부
△단일화 방식 △시점 등에서 성패 갈려
김문수(왼쪽)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와 한덕수 무소속 대선 예비후보가 8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내 카페에서 단일화 관련 회동을 마치고 인사하고 있다. 뉴스1


6·3 대선이 23일 앞으로 다가온 11일.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와 무소속 예비 후보였던 한덕수 전 국무총리 간 단일화는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한 전 총리가 국민의힘 당 지도부의 지지를 등에 업고 대선 후보 등록 마감일(11일) 전까지 단일화할 것을 밀어붙인 반면, 김 후보는 “강압적 단일화 요구에 응할 수 없다. TV토론과 여론조사를 거쳐 15, 16일쯤 단일 후보를 정하자”며 맞섰다. 이견은 좁혀지지 않았다.

단순한 협상 결렬이 아니었다. 결과는 파국이었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10일 0시 김 후보의 대선 후보 자격을 기습적으로 박탈한 뒤, 한 전 총리를 대체 후보로 내세우려 했다. 한 전 총리 입당(10일 오전 3시30분)과 당원 ARS 투표(10일 오전 10시~오후 9시)를 거쳤으나 후보 교체 안건은 부결됐다. 김 후보는 국민의힘 대선 후보 자격을 회복했다. 그사이 국민의힘 내부는 대혼란을 겪었다.
표심 분산을 막고 지지 기반을 넓히기 위한 전략으로서의 단일화가 진흙탕 세력 싸움으로 전락했다는 얘기다.


후보 단일화’는 대통령 선거 때마다 진영을 막론하고 등장하는 단골 전술이다.
직선제 개헌과 함께 치러진 1987년 제13대 대선부터 지난 20대 대선에 이르기까지, 총 8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단일화는 대부분 선거일 직전까지 표심을 좌우하는 최대 변수였다. 이론적으로는 각 후보의 지지율 합계 이상의 시너지를 내야 하지만,
△단일화에 참여한 후보의 지지 기반 △단일화 시점 △단일화 방식
등에 따라 성패가 갈렸다. 역대 대선의 단일화 성공과 실패 사례를 되짚어 봤다.

①단일화 불발과 정권 교체 실패: 87년 13대 대선 '양김' 분열

1987년 10월 27일 고려대 시국토론회에서 만난 김대중(앞줄 왼쪽)·김영삼(오른쪽) 후보가 굳은 표정으로 서로 반대쪽을 응시하고 있다. 이때의 분열로 두 사람의 관계는 서로 쳐다보지도 않을 정도로 벌어졌다. 연합뉴스


이른바 ‘87 체제’ 이후 첫 단일화 논의는 바로 그해, 13대 대선 때였다. 전두환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한 국민적 저항으로 직선제 개헌이 된 만큼, 당시 대선은 ‘민주 대 반(反)민주’의 구도였다. 다시 말하자면 ‘민주 진영’ 양김(김영삼·김대중)과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 간 대결이었다. 민주화 운동의 오랜 동지이자 통일민주당을 함께 창당했던 김영삼과 김대중이 단일대오를 형성하면 대선 승리는 당연해 보였다. 그러나 두 사람 중 누구도 출마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단일화는 불발됐고, 김대중은 탈당 후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김영삼 민주당 후보와 김대중 평민당 후보는 각각 대선 레이스를 펼쳤다. 그 이후에도 단일화가 시도되긴 했지만, 결실을 맺진 못했다.

‘양김 분열’의 대가는 컸다.
노태우 민주정의당 후보가 어부지리격 승리를 거둔 것이다.
득표율은 △노태우 36.64% △김영삼 28.03% △김대중 27.04%로, 야권 민주 진영은 과반 이상을 득표하고도 정권 교체에 실패했다. 이 사례는
한국 정치에서 ‘단일화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대선 패배의 쓰라림을 맛본 김영삼은 4년 뒤 ‘야합’을 택했다. 1991년 모두를 경악하게 만든 ‘3당(민정당·민주당·신민주공화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의 후보로 이듬해 14대 대선에 출마했고, 득표율 41.96%를 기록하며 결국 대통령에 오른 것이다.

②단일화 성공 대표 사례: 97년 15대 대선 ‘DJP’ 연합

1997년 10월 27일 김대중(앞줄 오른쪽) 새정치국민회의 총재가 김종필(왼쪽) 자유민주연합 총재의 자택을 방문해 대선 후보 단일화 협상을 완전히 매듭지었다. 사진은 두 사람이 함께 한 행사에 참석해 있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단일화 성공의 대표적인 사례는 1997년 15대 대선에서의
DJP(김대중+김종필) 연합
이다. 당시 새정치국민회의를 이끌던 김대중과 자유민주연합 총재였던 김종필은 선거일을 45일 남겨 뒀던 그해 11월 3일,
담판을 통해 신속히 단일화를 이뤄냈다.
김대중은 본인이 단독 후보로 대선에 출마하는 대신, 김종필에게 내각제 개헌·총리 임명 등을 제시하며 사실상 ‘공동 정부’를 약속했다. 단순히 후보 2명이 하나로 합친 게 아니라, 지지 기반과 정치적 성향이 확연히 다른 두 세력의 단일화였다.

시너지 효과는 확실했다.
호남표와 충청표, 진보표와 보수표가 결집했고 김대중은 ‘대선 4수(手)’에 성공했다.
김대중은 득표율 40.27%를 기록해 신한국당 후보로 나선 이회창(38.74%)을 1.53%포인트 차로 꺾었다. DJP 연합이 승리를 가능하게 만든 결정적 변수였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③단일화 파기가 ‘반사효과’로 : 2002년 노무현-정몽준

2002년 11월 25일 노무현(앞줄 왼쪽)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와 정몽준(오른쪽) 국민회의21 대선 후보가 단일화 합의 직후 국회의사당 귀빈 식당에서 회동을 마친 뒤 함께 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2002년 16대 대선 정국은 마치 롤러코스터와도 같았다. 초반 상황은 이번 대선과 비슷했다. 야당인 한나라당 후보였던 이회창은 적수가 없어 보였다. ‘이회창 대세론’ 속에 나머지 후보들이 고만고만한 지지율을 보이며 추격하는 구도였다는 점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압도적 1강’을 달리는 오늘날을 떠올릴 법하다.

새천년민주당(여당) 경선에서 노무현은 파란을 일으키며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그러나 대선을 한 달여 앞둔 시점에는 지지율이 급락하고 있었다. 이에 일부 민주당 의원을 중심으로 ‘후보 단일화 추진 협의회’(후단협)가 발족됐고, 노무현에 대한 당내 압박이 거세졌다. 국민통합21 후보로서 대권 경쟁에 뛰어든 정몽준과 단일화하라는, 사실상 노무현을 상대로 ‘후보직을 양보하라’는 요구였다.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이 역시 이번 대선과 유사하다.

단일화 방식을 둘러싼 팽팽한 신경전의 결과,
후보 간 담판이 아닌 '여론조사' 방식이 처음으로 채택됐다.
그런데 이변이 벌어졌다. 당초 여론조사상 지지율에서 정몽준에게 밀리는 것으로 나타났던 노무현이 모두의 예상을 깨고 승리를 거둔 것이다(노무현 48.86%, 정몽준 42.2%). 두 후보는 대선 24일 전인 그해 11월 25일 마침내 단일화에 합의했다. 기세를 탄 노무현은 이회창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선 전날인 12월 18일, 정몽준이 돌연 ‘노무현 지지 철회’를 선언하면서 순식간에 판이 헝클어졌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노무현 동정론’을 일으켰고, ‘노무현 표 결집’으로까지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노무현은 득표율 48.91%로 이회창(46.58%)을 꺾었다.
단일화 합의 파기가
되레 ‘반사효과’를 낳은 셈이다. 그야말로 대선 과정 전체가 한 편의 드라마였다.


④절반에 그친 단일화: 2012년 문재인-안철수

2012년 11월 21일 문재인(왼쪽)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와 안철수 무소속 대선 후보가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대선 후보 단일화 TV토론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2년 18대 대선은 야권이 후보 단일화엔 성공했음에도 별다른 효과를 내지 못하고 패배한 사례다.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 문재인과 무소속 후보 안철수는 단일화 방식과 관련해 대립을 거듭했는데, 대선 26일 전 안철수가 스스로 물러나는 용단을 내렸다. 그러면서 문재인 지지를 공개 선언했다.

하지만
장기간의 소모적인 단일화 협상은 부작용을 낳았다.
양측 지지자들 간 갈등은 거의 해소되지 않았고, ‘반쪽짜리 단일화’라는 평가
가 나왔다. 무엇보다 안철수의 문재인 지원 활동이 미지근했다. 당시 그는 측근들에게 “나를 지지한 사람들이 문재인을 지지할 명분을 만들어 줘야 하는데, 문 후보 쪽에선 이것에 대한 고민과 노력이 없다”는 불만을 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정쩡한 단일화’는 실패로 귀결됐다. 문재인은 새누리당 후보 박근혜와 오차 범위 내 박빙 승부를 펼쳤으나, 3.53%포인트 차이로 졌다.
유권자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 단일화의 효과는 크지 않았고, 결국 정권 교체 무산으로 이어졌다는 비판이 나왔다.


⑤불발된 단일화: 2017년 홍준표-유승민

2017년 4월 16일 공개된 19대 대선 출마 후보들의 선거 벽보. 왼쪽부터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 심상정 정의당 후보. 연합뉴스


단일화 자체가 불발된 사례도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조기 실시된 2017년 19대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 문재인이 독주하자, 보수 진영 내에선 후보 단일화 필요성이 제기됐다. 홍준표(자유한국당)와 유승민(바른정당), 안철수(국민의당) 중에서 단일 후보를 내세우자는 제안이었는데 구체적으로 진전되진 못했다. 문재인은 득표율 41.1%를 기록, 2위 홍준표(24.03%)를 손쉽게 누르고 ‘사상 최다 득표수 차이’(557만951표)로 당선됐다.

⑥최근 성공 사례 : 2022년 윤석열-안철수

2022년 3월 5일 윤석열(앞줄 왼쪽) 당시 국민의힘 대선 후보와 안철수(오른쪽) 국민의당 대선 후보가 경기 이천시 산림조합 앞에서 공동 유세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2년 20대 대선에서는 국민의힘 후보 윤석열과 국민의당 후보 안철수의 단일화가 중대 분수령이 됐다. 10년 전 18대 대선 때(문재인-안철수)처럼 둘은 단일화 방식을 두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다.
안철수는 여론조사 방식을, 윤석열은 일대일 담판 형식을 고수했다
. 협상 결렬 등의 진통을 거친 끝에 선거일 엿새 전, 안 후보 사퇴와 함께 극적 단일화가 이뤄졌다. 안철수로선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포함할 경우, 세 번째의 ‘후보직 양보’였다.

2012년 대선과 달리, 이번에는 단일화가 성공했다. 윤석열(득표율 48.56%)은 민주당 후보 이재명(47.83%)을 불과 0.73%포인트 차로 간신히 따돌리며 신승했다.
두 후보 간 득표수 차이도 24만7,077표에 그쳤기 때문에,
단일화가 선거 결과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사례로 남았다.
다만 단일화 시점이 선거 코앞이었던 데다, 투표용지 인쇄도 완료된 이후였다는 점을 들어 ‘단일화 효과가 유의미했다고 볼 수 없다’는 분석도 있기는 하다.

⑦그리고 현재 : 2025년 김문수-한덕수, 단일화 파국

8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당시 무소속 대선 예비후보였던 한덕수(왼쪽 두 번째) 전 국무총리가 김문수(오른쪽 두 번째) 당시 국민의힘 대선 후보와 단일화 관련 회동을 마친 뒤 김 후보의 대언론 브리핑을 듣고 있다. 뉴시스


2025년 6월 3일 21대 대선을 앞두고 진행된 국민의힘 후보 김문수와 전직 국무총리 한덕수 간 단일화 논의는 사실상 ‘막장 드라마’로 끝났다. 어쩌면 예견된 결과다. 단일화 협상이 공전만 거듭하던 지난 9일, 윤희웅 더오피니언즈 대표는 당시 상황을
“치밀하게 준비되지 않고 무리하게 밀어붙여진 막무가내식 단일화의 비극”
이라고 규정했다. 윤 대표는 단일화의 최소 조건으로 △혼자서는 당선이 불가하지만 연합하면 당선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어야 하고 △단일화에 참여하는 당사자 모두 ‘내가 단일 후보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어야 하며 △자신이 후보가 되지 못하더라도 부수적인 정치적 이익을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꼽았다. 그러면서 “현재로선(9일 기준) 어느 하나도 충족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짚었다.

실제로 역대 사례를 검토해 볼 때, 단일화가 성공하려면 상호간 이질적인 지지 기반을 가진 정치인이 결합해야 한다.
윤 대표는 “김문수와 한덕수의 지지 기반은 상당 부분 겹치기 때문에 단일화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사실상 집안 싸움”이라고 했다. 이어 “심지어 두 후보 모두 단독 주자로 나섰을 때, 국민의힘 정당 지지율에 못 미치는 지지율을 보인다. 단일화 역사상 처음 보는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난맥상 가운데 그나마 단일화가 추진되려면 권위를 갖춘 객관적인 조정자가 있어야 하는데, 국민의힘 당 지도부는 시종일관 한덕수 후보 쪽에 편파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게 그의 진단이었다. 10일 0시부터 약 24시간 동안
국민의힘 지도부가 주도한 ‘정당 쿠데타’의 실패는 동상이몽 속 단일화의 위험성을 극단적으로 보여 준 사례
로 남을 듯하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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