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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희정의 H열 15번
‘흠집 난 과일’이길 거부하는 60대 여성 킬러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다시 칼을 잡다
플래시백 반복 속 이혜영의 매력 빛나
‘파과’ 스틸컷. 제작사 제공

파과. 흠집이 난 과실을 뜻하는 말이다. 사람들은 못 쓰는 과일이라고들 하지만, 모르는 말씀. 그런 과일이 오히려 더 달고 깊은 맛을 품고 있는 법이다.

얼핏 보면 이것이 영화 ‘파과’의 메시지인 것 같다. 특히 60대 중반의 킬러 ‘조각’(이혜영)이 과일 가게 주인이 건넨 복숭아 파과를 내려다보는 복잡한 표정, 그리고 그와 갈등을 일으키는 ‘투우’(김성철)가 귤 파과를 발로 짓밟는 모습을 보면, 별수 없이 조각과 파과를 한자리에 놓게 된다. 하지만 영화는 의외로 그런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구병모 작가의 동명 소설을 민규동 감독이 스크린으로 옮긴 ‘파과’는 ‘칼을 든 노파’(old woman with the knife) 조각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그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청부 살인 조직인 ‘신성방역’에 발을 들였고, 이후 평생을 살인 기술자로 살아왔다. 조각이 ‘선생’이라 부르며 따랐던 ‘류’(김무열)는 세상을 망치는 “바퀴벌레 같은 인간들”을 제거하는 일을 ‘방역’이라 불렀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살인은 신성한 일이었다.

세월은 흘러 어느덧 조각의 나이 64세. 여전히 전설로 불리지만, 본인은 예전 같지 않음을 느낀다. 기억은 깜빡깜빡하고 손 떨림은 심해졌다. 은퇴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방역은 사랑했던 류의 뜻을 이어가는 일이자, 조각이 세상과 연결되는 유일한 방식이므로.

그러던 어느 날, 조각은 40년 만에 다시 심장이 뛰는 감정을 느낀다. 상대는 동물병원의 강선생(연우진). 류를 잃은 뒤 더 이상 지키고 싶은 것이 없었던 조각에게, 강선생과 그의 가족은 처음으로 나타난 ‘잃고 싶지 않은 존재들’이다. 그러나 동시에, 조각 앞에 또 다른 청년 남성 킬러 투우가 등장한다. 투우는 명확하지 않은 이유로 폭주하면서 조각과 강선생의 숨통을 조여온다.

여기서 영화는 ‘파과’의 또 다른 뜻을 쓰윽 꺼내든다. ‘파과지년’(破瓜之年)의 파과가 되는 것이다. 이 사자성어에서 파과는 여자 나이 16세, 혹은 남자 나이 64세를 의미한다. 오이 과(瓜) 자를 파자하면 여덟팔(八) 두 개가 된다는 말장난에서 나온 의미다. 특히 여성의 경우 ‘처녀막이 찢어지는(破) 이팔청춘’이라는 의미도 갖는다.

영화는 (원작 소설을 따라) ‘파과’를 완전히 다른 의미로 해석해냈다. 여자 나이 64세, 조각에게 새로운 사랑이 시작됐다. 조각은 냉혹한 살인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지독한 로맨티시스트다. 과거에는 사랑했던 남자 류를 따라 살인청부업자가 되었고, 지금은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칼을 잡는다.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연약하고 순수했던 무언가가 부서져버리는 고통과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파과’는 완전히 다른 영화인 ‘빛나는 순간’(2021)을 떠오르게 한다. 제주도를 배경으로 하는 이 멜로드라마에서 고두심이 70대 해녀를, 지현우가 40대의 프리랜서 피디를 연기했다. 영화는 노년 여성과 청년 남성의 로맨스를 그렸고, 상영 당시 일부 관객들은 이 설정에 대해 강렬한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2020년대에도 여전히 노년 여성의 로맨스와 성적 욕망은 금기시되는 셈이다.

‘파과’ 스틸컷. 제작사 제공

‘파과’ 역시 이 금기를 건드린다. 강선생에 대한 감정은 류에 대한 감정과 교차되면서 조각의 마음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게 커져간다. 청년 여성의 짝사랑은 애틋하고 노년 여성의 짝사랑은, 그의 의도와 달리, 살벌한 결과로 이어지고 만다.

동시에 영화는 어른이 되지 못한 노년 여성을 그린다. 이야말로 흥미롭다. 우리에게 익숙한 ‘아이 같은 노년 여성’의 모습이란 치매에 걸린 여성들이다. 어른일 수밖에 없었던 시절을 산 ‘우리의 어머니’들은 기억을 잃고 스스로에 대한 통제를 잃었을 때에야 비로소 ‘순수한 소녀’로 돌아갈 수 있는 자격을 얻곤 했다. 하지만 조각은 ‘어머니’가 아니다. 조각이 주고받는 사랑도 ‘어머니’로서의 사랑이 아니다.

조각은 자신만의 세계에서, 류가 죽었던 그 시절에 갇힌 채, 소녀로 남아 있다. 영화가 반복해서, 화려하게 배치하는 플래시백은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다. 그건 조각이 살아가는 얽힌 시간성의 재현이다. 그 안에서 과거와 현재는 분리 불가능하게 엉켜 있다. 현재의 ‘조각’과 과거의 ‘손톱’(류에게 받은 이름이다. 류가 죽은 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짐승의 발톱과 뿔’이라는 의미의 조각(爪角)으로 바꾼다)이 교차하는 장면에서 ‘그때 그곳’과 ‘지금 여기’가 맞물린다. 그런 의미에서 플래시백은 파과지년의 미학이다. 16세의 손톱과 64세의 조각이 공존하는 것이다.

물론 파과지년의 미학을 완성하는 것은 이혜영이라는 명배우다. 그는 영원히 자라지 않는 소녀, 그렇다고 해서 퇴행적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복잡한 인물을 연기하는 데 언제나 탁월했다. 게다가 곧 깨질 것 같은 예민함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범접할 수 없는 신체적 강인함으로 이어지는 인물이란, 오로지 이혜영만의 것이다. 영화의 ‘조각’이 이혜영이었어야만 하는 이유다.

손희정 영화평론가.

결국 ‘파과’는 ‘흠집 난 과실의 깊은 맛’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 여자는 아직 썩지도, 더 깊은 맛을 내지도 않는다. 그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돌아버릴 것 같게 만드는 매혹을 뿜어낼 뿐이다.

손희정 영화평론가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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