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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두 도시 이야기
# 지난 6일(현지시간) 미국 인디애나주 웨스트라피엣 시의회는 주택용지 49만㎡를 용도 변경해 SK하이닉스의 고대역폭메모리(HBM) 공장을 짓기로 가결했다. 애초 지정한 부지보다 넓고 주거지에 가까운, SK하이닉스가 선호하는 땅을 공장 부지로 내준 거다. 시의회는 7시간 밤샘 회의 후 이같이 투표했다. 9명의 시의원은 SK하이닉스의 제안서를 면밀히 검토했고, 6명이 찬성표를 던졌다. 이에 따라 웨스트라피엣 팹은 2028년 하반기부터 HBM을 대량 양산하게 됐다.

# 지난달 30일 경기도 안성시의회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상생협약 파기 촉구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SK하이닉스 용인산업단지 안에 계획된 액화천연가스(LNG) 열병합발전소가 안성과 가까워 피해를 본다는 이유다. 앞서 김보라 안성시장은 “LNG발전소와 송전선로 반대를 위해 주민대책위원회를 구성하겠다”며 여기에 시 예산도 지원하겠다고 했다. 지난해 12월 제정한 ‘시와 타 지자체 간 이해 상충 해소 활동을 하는 시민단체에 시장이 예산을 지원할 수 있다’는 조례가 근거였다.

한 회사가 두 도시에 공장을 짓는다. 인공지능(AI) 산업의 필수 부품인 HBM을 선도하는 SK하이닉스가 밀려드는 주문을 소화하려고 미국 인디애나와 한국 용인에 짓는 반도체 팹이다.

그런데 이를 둘러싼 지역 정치권의 양극단 대응은 양국 기업 환경의 격차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대로라면 팹 건설 프로젝트를 2019년 시작한 용인보다 2024년 시작한 인디애나에서 HBM이 먼저 생산될 가능성마저 거론된다. SK하이닉스가 쏟아붓는 투자금은 용인(122조원)이 인디애나(약 5조3000억원)의 23배다.

세계 각국이 보조금·관세를 내세워 첨단 반도체 공장 유치 경쟁을 벌이는 건 기술 안보는 물론이고 양질의 제조업 일자리가 걸려 있어서다. 웨스트라피엣은 SK하이닉스 유치로 총 7000명의 직간접 고용 효과를 기대하며, 인디애나주는 이를 위해 자체 보조금도 약속했다. 그런데 세계가 탐내는 첨단 제조 기업을 보유한 한국은 중앙정부의 지원도, 지방정부의 갈등 조정 의지·능력도 부족하다. 오히려 지방정부가 갈등을 조장한다는 비판마저 나온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반도체 생산시설을 유치하기 위해 세계 각국 정부가 나서서 경쟁하고 있는데, 한국 내 기업 환경이 해외와 격차가 커지면 이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며 “일자리 기반을 지키자는 차원에서라도 국가적인 지원과 지자체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미국 “일자리 기대” 반대주민 설득…한국은 정치가 갈등조장
지난달 24일 인디애나주 웨스트라피엣 주민들이 반도체 시설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 베이스드 인 라피엣]
인구 4만4000명의 미국 중서부 소도시 웨스트라피엣은 지난 한 달간 ‘반도체 패키징’을 놓고 술렁였다. 지난해 4월 SK하이닉스는 이곳에 38억7000만 달러를 투자해 HBM 패키징 및 연구개발(R&D) 시설을 짓기로 했고, 이 도시의 공학 명문 퍼듀대와의 연구 협력도 발표했다.

그런데 올해 초 SK하이닉스가 기존에 배정받은 부지보다 퍼듀대에 더 가까운 다른 부지를 달라고 시에 요청했다. 시장은 긍정적이었지만 지역계획위원회가 반대해 시의회 투표에 부쳐졌다. 일부 주민이 ‘패키징이라 단순 포장 공장인 줄 알았다’ ‘반도체 공장 근처에 살 수 없다’며 반대 시위를 벌였다.

인디애나주 정부, 자체 보조금 지원 약속
시의회는 SK하이닉스에 한 달간 세 차례의 공청회 기회를 줬다. 회사는 주민들에게 공사 및 운영의 안전성을 설명했다. 퍼듀대 최고 반도체 책임자인 마크 룬드스트롬 석좌교수는 “웨스트라피엣이 실리콘밸리가 될 수 있는, 50년 만에 찾아온 기회”라고 지역사회를 설득했다. SK하이닉스와 퍼듀대를 중심으로 첨단 반도체 생태계가 조성돼 웨스트라피엣의 미래 먹거리가 된다는 거다.

9명의 시의원은 ‘반도체 열공’에 들어갔다. 콜린 리 시의원은 중앙일보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SK하이닉스는 공정과 재료 중 일부는 기밀로 유지했지만, 시의원과 시민 질문에 답변하는 시간을 여러 차례 가졌다”며 “나도 상당한 시간을 들여 SK하이닉스의 제안서를 검토했다”고 말했다.

지난 5일 저녁 시작된 시의회 회의는 6일 새벽에야 끝났다. 결론은 6대 3 찬성. 웨스트라피엣 팹은 2028년 하반기부터 HBM을 대량 양산하며, 12단 혹은 그 이상으로 쌓은 HBM을 엔비디아 등 미국 빅테크에 공급할 예정이다.

지난해 1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일반산업단지 자원순환센터 환경영향평가 설명회를 보이콧하는 주민들. 손성배 기자
반면에 SK하이닉스가 122조원을 투자하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일반산업단지)는 ‘반대 후 반대’에 직면해 있다. 원삼면 등 부지 근처 주민의 보상 협상이 지난했고, 공업용수 확보에는 여주시, 하수 방류에는 안성시와 갈등을 겪은 끝에 지난 2월에야 착공했다. 2019년 2월 투자 발표 후 6년 만의 첫 삽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발전소를 놓고 안성시의 반대에 맞닥뜨렸다. 반도체 팹에 전력을 공급할 LNG 열병합발전소를 산단 내에 짓기로 했는데, 지난달 28일 안성시의회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LNG 발전소 건립 반대 결의문’을 채택했다.

사유는 ‘발전소가 안성시와 최단거리로 2.5㎞ 인접해 있어 피해가 막심하다’는 거다. 그러나 에너지 업계에서는 고개를 갸웃한다. 서울 마포, 안양 평촌, 성남 분당, 하남 위례 등의 수도권 LNG 열병합발전소 대부분이 아파트 단지와 50~500m 거리에서 가동되고 있어서다. 게다가 안성시의 반대로 LNG 가스관이 안성시 바깥으로 우회하도록 설계를 변경하느라 이미 5개월 이상 절차가 지연된 상태다.

삼성 360조 들인 용인산단 조성도 불투명
안성시의회는 4년 전 맺은 상생협약도 파기하라고 시에 촉구했다. 2021년 경기도와 용인시, 안성시, SK하이닉스가 맺은 4자 협약으로, SK하이닉스가 안성시 농산물을 구매해 주고 경기도는 안성시의 기업 유치를 돕기로 했다. 이에 따라 북안성 반도체 소재·부품 산업단지도 계획 중이다. 그런데 시의회는 “검토해 보니 안성시만 손해 보는 불균형 협정”이라며 뒤집자고 주장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360조원을 투자해 용인시 이동·남사읍에 조성할 국가산단(728만㎡)도 앞날을 장담할 수 없다. 대규모 팹 6기와 발전소 3기, 소부장(소재·부품·장비) 협력기업 60개 이상이 입주하는 ‘세계 최대 반도체 단지’이지만 주민 보상과 용수·전력 확보에서 SK하이닉스 일반산단이 겪은 과정이 재연될 수 있어서다. 지난해 6월 용인에서 열린 합동 공청회에서는 회의 시작 직후 주민이 현장에 오물을 투척해 아수라장이 되기도 했다.

용인 일반산단 상생협약 과정에 참여했던 심준섭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는 “한국이 살아남으려면 반도체 산업을 키워야 하는데, 용수와 전력 확보 과정에서 ‘떼법’ 요구를 지역 정치인이 주도하는 경우가 많다”며 “기초 지자체끼리 갈등을 해결하기 어려운 구조인 만큼 광역 단위의 상위 지자체가 갈등 관리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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