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 파기환송 후폭풍
박시환 전 대법관 때와 비교해도 퇴행 명확
박시환 전 대법관 때와 비교해도 퇴행 명확
조희대 대법원장이 2024년 1월3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24년 신년인사회에서 신년 덕담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윤석열 대통령, 조 대법원장, 한덕수 국무총리. 대통령실사진기자단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을 초고속 파기환송한 후폭풍이 사법개혁 요구로 빠르게 번지고 있다. 전례 없는 속도전 판결에 대한 비판을 의식한 대법원이 방어성 해명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법조계에서도 잘 알지 못했던 ‘판결 생산 과정’이 그대로 노출됐기 때문이다.
전합 판결문에는 ‘제대로 된 검토와 토론이 없었다’는 소수의견 대법관 비판이 적나라하게 기재됐다. 이 역시 초유의 일이다. ‘조희대 대법원’의 재판 운영 방식이 어떠했는지 ‘판례’로 영원히 박제된 것이다. 민주당은 조희대 대법원이 극대화한 사법 불신 여론을 발판삼아 대법관 증원과 재판소원 등 대법원 반대로 장점보다는 단점만 부각됐던 사법정책 도입을 적극 추진하기로 했다.
그간 대법원은 대법관들의 심리·합의 등 상고사건 처리 과정이 어땠는지는 대외비로 철저히 함구했다. 재판 독립 보장을 위해 심판에 이르는 합의는 공개하지 않기(법원조직법 제65조) 때문이다. 그랬던 대법원이 스스로 비공개 원칙과 관행을 ‘전례 없이’ 깬 것은, 그만큼 이재명 후보 사건 처리가 ‘전례 없는’ 것이라는 점을 대법관들이 의식했기 때문이다.
보통 전합 판결문에서는 사건 내용과 쟁점, 법리를 두고 다수의견과 소수의견이 충돌한다. 이재명 후보 사건은 달랐다. 쟁점과 법리 외에 전례 없이 빠른 선고 속도가 전합의 새로운 핵심 쟁점이 됐고, 판결문에는 ‘최고법원의 사건 처리가 이래서는 안 된다’는 대법관 비판이 그대로 노출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과거 ‘독수리 5형제’로 불리던 진보 성향 대법관 대 보수 성향 대법관 구도가 뚜렷했던 시기에도 없던 일이다. 대법관 의견이 7대5로 극명하게 갈렸던 2020년 7월 이재명 경기도지사 전원합의체 판결문에도, 재판 진행 방식에 대한 이견은 없었다. 반면 이 후보 사건에서 재판장인 조희대 대법원장은 재판 속도를 두고 극명히 드러난 의견 차이를 좁히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최종심 지위를 갖는 대법원 판결에 대한 국민신뢰 확보 노력 대신, 대선을 코앞에 두고 ‘의심스러운 속도전’을 택한 것이다.
토론은 기본인데…“토론했다” 굳이 판결문에 기재
이 후보 사건에서 유죄 파기환송을 결정한 다수의견 대법관 10명 중 5명(서경환·신숙희·박영재·이숙연·마용주)은 판결문을 통해 전합 심리·합의 과정을 일부 공개했다. 전례 없는 일이다. 소수의견(상고 기각) 대법관 2명이 다수의견 대법관들의 속도전을 비판하는 의견을 쓰자, 이를 ‘방어’하기 위한 보충의견을 쓰면서 일부 내용을 선택적으로 공개한 것이다.
“대법관들은 빠른 시기에 제1심과 원심 판결문, 공판기록을 기초로 사실관계와 쟁점 파악에 착수하였고, 검사의 상고이유서와 변호인 답변서, 의견서가 접수되는 대로 지체 없이 제출 문서를 읽어보고 그 내용을 숙지하였다.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공표죄에 관하여는 이미 많은 판례와 법리, 그 토대가 된 국내외 연구자료가 충분히 축적되어 있다. 대법관들은 이미 축적된 판례와 법리, 연구자료에 더하여 이 사건 쟁점에 관한 입체적이고 심층적인 추가 검토를 집중적으로 행하였고, 이를 토대로 치열한 토론을 하였다. 구체적인 절차 진행도 형사소송법령 등 관련 규정을 지키면서 이루어졌고, 절차를 주재하는 대법원장이 일일이 대법관들의 의견을 확인한 다음 후속절차로 나아갔다.”
대법관 전원이 참여하는 전원합의체는 사건 판단을 두고 대법관 사이에 이견이 있거나 판례 변경을 해야 할 때 열린다. 의견이 다른 대법관을 설득하는 과정은 필수다. 이 후보 사건에서처럼 굳이 판결문에 “치열한 토론을 했다”고 항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대법원은 전합 사건의 경우 쟁점과 법리에 대한 충분한 검토, 대법관 사이의 토론, 숙의를 위해 시간을 두고 합의기일을 잡는다. 통상 한 달에 한 번 합의기일이 있다. 이 후보 사건처럼 합의기일을 이틀 사이에 두 차례 잡으면 첫 합의기일에 논의된 내용을 제대로 검토할 시간이 없다. 당연히 토론이나 숙의 과정도 기대할 수 없다.
다수의견 대법관들은 “이 사건의 주요 쟁점은 크게 복잡하지 않다” “달력상 날짜의 총량만이 충실한 심리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이 사건처럼 적시처리가 강력하게 요구되는 사건에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등 기존 대법원 판결문에 볼 수 없었던 절차 문제와 관련한 ‘방어적 해명’을 판결문에 써놓았다. 대법원도 전합 선고 직후 내놓은 보도자료에서 판결 의의를 설명하며 ‘파기환송 이유’보다 ‘신속한 선고 이유’를 먼저 배치할 정도로 신경을 썼다. 그러면서 다수의견 대법관들이 초고속 선고를 정당화하기 위해 판결문에 적은 2000년 미국 연방대법원의 대선 재검표 중단 사례를 다시 인용했다. 대선 직후 대통령이 누구인지 당장 확정해야 했던 미국 사례와 이미 3년 전인 2022년 3월 윤석열 대통령 당선으로 끝난 한국 사례를 짜깁기해 ‘신속한 재판 진행으로 극심한 혼란과 사법 불신을 종식시켰다’는 다수의견 주장을 강조한 것이다.
시민단체 촛불행동이 3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인근에서 집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대법원이 자초한 6만쪽 논란
전직 대법관은 “조희대 대법원이 상고 기각을 했다면 지금처럼 ‘재판을 빨리 했다’ ‘기록을 다 봤느냐’는 비판이 나왔을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다만 대법관들 사이의 전례 없는 판결문 공방, 대법원의 심리·합의 과정 공개는 예상치 못한 후폭풍을 낳았다. 수만쪽에 달하는 소송기록을 그 짧은 기간에 어떻게 검토할 수 있느냐는 반론이 쏟아진 것이다.
결국 대법원은 선고 이튿날인 2일 전합 심리가 초고속으로 진행된 과정을 또다시 추가 공개했다. 천대엽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은 이날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긴급현안질의에서 ‘6만여쪽 소송기록을 대법관 12명에게 모두 복사해서 줬느냐’는 질문에 “재판 사항이라 깊이 알지 못한다”고 했다. ‘기록을 보지 않은 날림 재판’이라는 추궁이 계속되자, 천 처장은 “요즘은 형사기록을 전자사본화한다. (대법관들이) 스캔해서 간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형사기록 전자 스캔으로 (대법관들이) 기록은 모두 보셨다고 확인되고 있다”고 했는데, 이 답변이 6만쪽 논란에 불을 질렀다. “대법관별로 언제 이 전자문서를 읽었다는 것인지 답변해 달라. 대법원이 기록을 안 보고 제출된 문서만으로 판결하는 경우도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기록을 안 보고 판결한 것이라면 대법원 판결을 국민들이 신뢰할 수 있겠느냐”(박은정 조국혁신당 의원), “대법관들이 대법원 재판연구관 보고서만 보고 판결할 수 있느냐”(박범계 민주당 의원)는 추궁이 이어졌다.
대법관들이 전자문서로 소송기록을 봤다는 천 처장 답변에 변호사들 사이에서는 ‘변호사도 모르게 형사사건 전자소송이 시작됐느냐’는 말도 나왔다. 대법원은 오는 6월로 예정됐던 형사사건 전자소송 시스템 도입을 10월로 연기한다고 지난달 밝힌 바 있다. 전자소송은 수사·재판 기록을 종이가 아닌 전자문서 형태로 기록하는 제도다. 기록 검토의 효율성과 편의가 커진다. 민사·가사·행정소송 등에는 이미 도입됐지만 형사소송은 아직 도입되지 않았다.
대법원 설명이 오히려 의혹을 키우자, 주말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전합 판결을 비판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대법관들이 에이아이(AI) 챗지피티보다 빨리 6만쪽 기록을 봤다는 것이냐’는 주장이 쏟아졌다. 이에 대법원은 여러 언론에 대법원 심리·합의 방식을 추가 공개했다. “법률심인 상고심 특성상 대법관들이 1·2심처럼 6만쪽 기록을 하나도 빼지 않고 다 읽어야 판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상고 이유서에 제출된 범위 내에서만 심리할 수 있기 때문에 대법관들이 상고 이유와 무관한 쟁점은 심리할 수 없다” “기록을 모두 보거나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검토하는 방식은 대법관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형사사건 전자소송은 도입되지 않았지만 대법관들이 전자문서를 보조적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는 설명도 나왔다.
대법관 1인당 연간 수천건씩 몰리는 소부 사건은 ‘10초 재판’이라고 불릴 정도로 합의 과정의 빈틈이 많다. 대법관이라면 다를 것이라는 대법원 재판에 대한 국민 믿음을 정면으로 배신하는 셈이다. 이런 상고사건 처리 과정을 아는 법조계에서도 대법관 전원이 참여하는 전원합의체 재판은 소부 재판보다 나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전직 대법관은 한겨레에 “솔직히 기록을 직접 안본다. 재판연구관들이 검토보고서에 필요한 기록만 복사해 붙여 오는 식이다. 간혹 추가 검토가 필요하면 직접 필요한 부분만 뽑아보는 일이 있지만 드물다”고 했다. 그는 “대법원은 법률심이어서 1·2심 처럼 관련 기록에 밑줄 긋고 포스트잇 붙이는 식으로 볼 이유가 없다. 다만 삼심제에 대한 국민들의 과도한 기대 때문에, 대법원 심리가 이렇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대법원이 공개하지 않으면서 논란이 커졌다고 본다”고 했다.
지난 1일 전합 선고 이후 공개된 대법원의 여러 설명을 종합하면, 유례없는 속도로 진행된 이 후보 전합 재판에서도 대법관들은 소송기록을 충실히 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 설명처럼 상고 이유와 관련된 기록만이라도 대법관 전원이 직접 검토했다는 것인지 여전히 불분명하다. 법률심이어서 6만쪽 전체를 볼 이유도 필요도 없다면, 대법관별로 상고 이유 등을 검토하기 위해 어느 정도 분량의 기록을, 어떤 방식으로 봤다는 것인지 공개하라는 요구가 나오는 이유다. 대법원은 법원조직법의 합의 과정 비공개 조항을 들어 공개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심리·합의 과정에 대한 사법정책적 연구는 희귀하다. 합의 과정 등에 대한 비밀엄수가 워낙 심한 데다, 퇴임 대법관들 역시 일반론 차원의 언급도 극히 자제하기 때문이다. 다만 박시환 전 대법관(2005∼2011년 재임)이 퇴임 뒤 이례적으로 자신의 대법관 경험과 재판 실무 등을 바탕으로 대법원 심리·합의 절차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개선점을 제시했다. 대법원 재판 방식에 큰 변화가 없다는 점에서 조희대 대법원의 이재명 후보 사건 처리 과정이 어떠했는지 유추해 볼 수 있는 대목이 적지 않다.
박 전 대법관이 쓴 ‘대법원 상고사건 처리의 실제 모습과 문제점’(2016) 논문을 보면, 전합에 회부되는 모든 사건에는 재판연구관의 검토보고서가 작성된다. 검토보고서 분량은 A4 용지로 50∼100쪽 정도라고 한다. 여기에 참고자료 수백쪽이 첨부된다. 대법원장 및 대법관 전원에게 검토보고서와 함께 상고이유서, 답변서 등이 배부된다고 한다. 박 전 대법관은 “다만 사건 기록은 주심 대법관 외에는 회람되지 않는다. 사건기록 전체를 대법관 전원에게 복사해 나눠주는 미 연방대법원의 실무와는 다르다”고 했다. 대법원은 이재명 후보 사건 기록이 모든 대법관들에게 전자문서 형태로 제공됐다고 밝혔지만, 대법관들이 실제 이를 열람·복사했는지, 대법관별 검토 시간은 어느 정도인지 등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박 전 대법관 논문은 한 달에 한 번 10건 정도의 전합 사건을 합의하는 상황을 전제로 “합의를 주재하는 대법원장과 주심 대법관을 제외한 다른 대법관들은 매 사건마다 깊이 있는 연구와 검토를 거쳐 합의에 임하기는 어렵다. 전합 토론 역시 주심 대법관과 재판연구관이 검토한 전체의 틀을 크게 벗어나기 어렵다”고 했다.
대법원은 2000년대 중반까지 어느 사건이 전합에 회부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대외비로 했다. 박 전 대법관은 “그 자체로 대법관 사이에 이견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어서 파기환송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후 소송당사자 알 권리 차원에서 전합 회부 사실 정도는 공개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재명 후보 사건에서는 소부에 사건이 배당된 당일 바로 전합 회부를 결정했다는 사실부터, 회부 당일과 이틀 뒤 합의기일까지 사전에 공개했다. 전례 없는 일이다.
전합 회부부터 선고까지 9일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날림 선고’ 비판에, 대법원은 이재명 후보 사건이 3월28일 접수된 이후 대법관들이 심도 있게 검토했다고 말한다. 대법관들이 한 달여 동안 오로지 이재명 후보 사건 한 건만을 심리한 것은 아니다. 대법원에는 연간 5만6천건(2022년 기준)의 사건이 접수된다. 대법관 1인당 연간 5천건에 달하는 사건을 처리해야 한다. 대법원은 이 후보 사건이 접수된 뒤 모두 47건의 선고를 했다. 통상 2주 전에 소부 합의가 끝난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이 후보 사건과 동시에 대법관들이 합의를 진행한 사건은 35건 정도로 추정된다. 소부별 합의에 올리지 않았더라도 대법관에게 배당된 사건 수십∼수백건을 동시에 검토해야 한다.
박시환 전 대법관 재직 시절에도 대법원 한 해 접수 사건은 3만6천건(2010년 기준)에 달했다. 대법관 1인당 연간 3천건의 사건이 배당됐다. 박 전 대법관은 “전원합의체 합의 과정에서 정치한 법리 전개와 토론이 이루어지는 데 한계가 있었다”면서도 “전합 판결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대법관들이 자신의 의견을 바꾸는 일도 적지 않았다”고 했다. 어떨 때는 “다수의견이 소수의견으로, 소수의견이 다수의견으로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판결문 작성에 수회의 의견 교환과 수정을 거치다 보니, 판결 선고 직전까지 판결문이 완성되지 않아 애를 먹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고 했다.
조희대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상고심 선고를 준비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조희대 대법원의 의도된 퇴행
이재명 후보 사건에서 전원합의체 모습은 어땠을까.
소수의견(상고 기각)을 낸 이흥구·오경미 대법관은 판결문에서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일반적 성격을 “법률적 쟁점에 대한 치열한 검토와 깊은 숙고” “동료 대법관들을 설득하거나 새로운 견해를 공감·반박하는 과정”이라고 밝혔다. 그런데도 이재명 후보 사건에서만 “유례없이 짧은 기간 내 결론을 내놓게 됐다”고 지적했다. 특히 두 대법관은 “대법관들 상호 간의 설득과 숙고의 기간을 거치지 않은 결론은 당사자들과 국민을 납득시키는 데 실패할 수 있다”고 다수의견(파기환송) 대법관들을 직격했다. 그러면서 “다른 모든 사건과 마찬가지로 이 사건에서 전원합의체 심리와 재판은 시간을 적절히 투입해 숙고와 설득에 성공한 경우인가 아닌가”라고 물으며 “의문이 남는다”고 했다.
두 대법관이 쓴 의견에서 박시환 전 대법관 때인 15년 전보다 못한 조희대 대법원의 재판 운영 퇴행을 엿볼 수 있다. 박 전 대법관이 문제라고 했던 당시 전합 운영방식조차, 이재명 후보 사건에 견주면 합의에 걸린 시간과 숙의 과정 등이 충실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