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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는 물론 줄거리도 전혀 다른 영화 ‘암살’과 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촬영장소가 같다는 점인데요. 서울 종로구 ‘북촌 핫플레이스’로 꼽히는 백인제가옥에서 촬영한 두 작품은 한옥 특유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했다는 평가를 받았죠. 지하철 3호선 안국역 2번 출구로 나와 헌법재판소를 지나서 정독도서관 방향으로 가다 보면 ‘백인제가옥’이라 쓰인 현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돌계단을 올라가 대문을 넘으면 넓은 정원과 고풍스러운 한옥이 관람객을 맞이하죠.
전통한옥과 달리 사랑채와 안채를 복도로 연결한 백인제가옥은 당시 혁신적인 시도를 한 가옥으로 평가받는다. 사랑채 정원을 둘러본 이시온(왼쪽)·이한호 학생기자.

중부지방 한옥 구조를 띤 백인제가옥은 혁신적인 시도를 한 근대 가옥이라고 평가받습니다. 집을 건축할 당시는 일제강점기라 일본인이 국내에 많이 건너와 살며 이들이 만든 근대 가옥도 늘어나고 있었죠. 또 기와와 지붕만 일본식으로 바꾼 개량 한옥도 많아졌고요. 1913년 완공된 백인제가옥도 일부 일본식 장마루로 조성한 복도, 다다미를 깐 2층 방 등 일제강점기 가옥 특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 붉은 벽돌과 유리창을 많이 사용한 점, 사랑채와 안채를 별동으로 구분한 전통 한옥과 달리 두 공간이 복도로 연결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는 것도 특징이죠.

사랑채 일부가 2층으로 설계된 것도 특이한데요. 건축주이자 첫 집주인이었던 한상룡은 을사오적 중 한 명인 이완용의 외조카로, 일본인에게 집을 친근하게 보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2층 형태로 지었을 것이라고 전문가는 추측하죠. 정원에서는 웅장한 사랑채를, 중정에서는 넉넉한 안채를, 그리고 후원에서는 아담한 별당채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구조 또한 특별한 점입니다. 3칸 깊이의 겹방 형식이나 당시 궁궐에서만 볼 수 있었던 온돌 구조 등 최고급 기술을 집대성해 그 시대 최상류층 생활양식을 엿볼 수 있죠.
1910년대 사랑채에서는 남산 봉수대까지 탁 트인 경성 시내를 감상할 수 있었다. 사진은 사랑채 전경.

전통 한옥의 아름다움과 근대 가옥의 특별함이 고루 갖춰진 백인제가옥은 1977년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됐습니다. 서울시는 상태가 양호하고 한옥의 구조적 특징을 유지하면서 근대 가옥의 양식이 잘 보존된 점을 높이 평가해 2009년 매입한 후 2015년 11월 역사가옥박물관으로 개관했죠. 대문간채를 들어서면 백인제가옥의 역사 등을 볼 수 있는 전시공간이 마련됐어요.

한성은행 전무 등을 역임하며 엄청난 부를 이룬 한상룡은 주변 가옥 12채를 사들여 마련한 907평의 큰 대지에 당시 최초로 최고급 압록강 흑송 자재를 활용해 건평 165평에 달하는 압도적인 규모로 7년간 이 집을 지었다고 하는데요. 백인제가옥 김옥진 해설사는 "당시 한상룡은 자신의 집에서 서울이 다 보인다고 지인들에게 소개하며 집들이 겸 연회만 12번을 했다고 전해져요"라는 일화를 언급하며 사랑채를 중심으로 안채와 넓은 정원, 별당채 등으로 구분돼 있다고 설명했어요.

이 집의 소유권은 한성은행으로 이전됐다가 개성 출신의 청년 부호 최선익에게 넘어갔는데요. 1932년 27세의 나이로 조선중앙일보를 인수한 최선익은 민족운동가인 여운형을 사장으로 추대하는 등 민족 언론사에 중요한 자취를 남긴 인물로 알려졌죠. 최선익은 1935년부터 1944년까지 거주한 것으로 전해져요. 이어 1944년 백병원 창립자이자 '백인제가옥' 명칭의 주인 백인제 선생이 매입하게 됩니다. 그의 아내 최경진 여사가 2008년까지 이 가옥을 지킨 마지막 주인으로 알려졌고요. 100년이 훌쩍 넘은 세월, 다양한 인물들이 살면서 공간이 어떻게 변화했고 발전했는지 체감할 수 있어 더 특별하고 귀중한 장소로 인식되고 있죠.
사랑채에는 바닥에 다다미를 깔고 일부는 2층으로 만들어졌다.

김 해설사는 “당시 한옥은 사랑채와 안채가 아예 다른 건물로 따로 떨어져 있어서 왔다 갔다 하려면 신발을 신고 이동했어야 했는데, 백인제가옥은 사랑채와 안채가 툇마루 형태의 긴 복도로 연결돼 편하게 왕래할 수 있었죠. 지금은 익숙한 형태지만, 당시에는 엄청나게 획기적이고 실험적인 구조였죠”라면서 소중 학생기자단에게 안채부터 차례대로 둘러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안채 창문을 가리킨 김 해설사는 "지금은 유리창이 당연하잖아요. 그러나 1910년대만 해도 창문에는 거의 다 창호지 등 종이를 덧대 썼어요. 그런데 이 집은 처음부터 유리로 창문을 만들었고, 특히 마름모꼴 무늬까지 넣어 엄청난 기술과 비용이 들었을 것이라 추측돼요"라고 설명했죠. 그러면서 창밖에 비친 집 외벽의 붉은 벽돌 역시 전통적인 형태가 아닌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한옥 특징이라고 덧붙였죠. 여성의 공간인 안방은 2008년까지 최경진 여사가 사용했는데요. 안방과 옆 작은 쪽방까지 온돌로 이어진 구조로 설계돼, 당시 온돌을 이런 형태로 두 개나 들일 정도면 인력은 물론 비용도 어마어마하게 많이 들었을 것이라는 게 중론입니다. 궁궐에만 썼을 법한 구조와 기술로 집을 지었던 한상룡의 재력과 권력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죠.

안방에 들어가면 부엌과 작은 찬방이 일자로 연결돼 있습니다. 하인의 방이었던 찬방을 최경진 여사는 드레스 룸으로 썼다고 해요. 안채와 부엌 사이에도 이채로운 점이 있는데, 바로 숨겨진 다락방이죠. 김 해설사가 소중 학생기자단에게 "이 다락방 어디서 본 거 같지 않아요?"라고 묻자, 이시온 학생기자가 "영화에서 본 것처럼 낯이 익어요"라고 대답했죠. "이 다락방은 바로 영화 ‘암살’에서 하정우가 급하게 몸을 숨긴 곳인데요. 이곳으로 들어가면 반대편으로 나올 수 있도록 만들어놨죠. 이런 점이 전통 한옥과의 뚜렷한 차이점으로 꼽혀요."

1930년대 응접실 콘셉트로 꾸며진 사랑채에서 이한호(왼쪽)·이시온 학생기자가 축음기를 살펴보고 있다.
안방 맞은편에 있는 방은 주로 큰딸이 썼다며 대표적인 중부지방 구조라는 그는 “안방 문을 열고 큰딸 방도 문을 열면 서로 보이는 구조잖아요. 그럼 딸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까요?”라고 질문했어요. 이에 책상을 짚은 이한호 학생기자가 "왠지 여기 앉아 조용히 있어야 할 거 같은 분위기예요"라고 말해 모두 웃었습니다. 김 해설사는 "자연스럽게 '공부를 해야지' 하게 되고 엄마가 지켜보니까 으레 그랬듯이 공부를 할 수밖에 없는 형태인 거죠"라고 덧붙여 또다시 웃음꽃이 폈어요. 큰딸 방 안쪽에는 누마루라고 해서 어른 둘 정도는 충분히 누울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는데요. 누마루는 지면의 습기를 피하고 통풍이 잘되도록 지면으로부터 높이 띄워 한층 높게 만든 마루로 여름에 여기 앉거나 누워 있으면 더위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해요.

창문 너머 큰 정원을 가리킨 김 해설사는 “한옥에는 보통 이런 마당과 온돌, 마루 이렇게 3요소가 있는데요. 백인제가옥 정원에는 당시 한옥 마당에 주로 썼던 마사토가 아닌 잔디를 깔았어요”라고 강조했죠. 1대 주인 한상룡은 이 정원에 많은 사람을 불러 파티를 열었기에 이전에는 큰딸 방에서 아버지의 파티 장면을 보지 못하도록 낮은 담벼락이 설치돼 있었다고 합니다. 그 담은 백인제 선생이 이사 온 그해에 없앴다고 하죠.

안채 구경을 마친 소중 학생기자단이 거실 한쪽에 있는 문을 열고 긴 복도를 지나자 사랑채 대청이 나왔죠. 우물 정(井)자를 닮아 '우물마루'라고도 불린 우리나라 전통 마루 형식으로 조성된 대청에는 응접실이 꾸며져 있었어요. 백인제가옥의 가장 중심에 위치한 사랑채와 사랑채 정원은 가옥 총면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큰데, 그만큼 1대 주인 한상룡이 많은 연회를 즐겼을 것이라고 해요. 실제로 이곳엔 역대 조선총독부 총독을 비롯해 당대 권력가 그리고 미국의 석유왕 록펠러 2세까지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높은 건물이 없다 보니 사랑채 정원에서 남산 봉수대까지 탁 트인 경성 시내를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고 해요.
백인제 선생 아내인 최경진 여사가 2008년까지 생활한 안채 안방 모습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사랑채에서 나와 앞마당에서 이어지는 오솔길을 따라가면 별당채가 있죠. 백인제가옥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건물로 그 시대 '펜트하우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별당에 서서 내려다 보면 고즈넉한 북촌을 감상할 수 있는 이른바 '뷰 맛집'이죠. 별당채는 한상룡이 혼자 독서를 하거나 사색을 즐기기 위한 공간으로 조성했다고 전해져요. 한옥 특유의 정서와 격동의 일제강점기 상류층의 삶을 함께 느낄 수 있는 백인제가옥은 윤보선가옥과 함께 북촌 한옥마을을 대표하는 근대 가옥으로 꼽히는데요. 북촌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높은 언덕에 위치해 꽃들이 만개한 봄에 방문하면 한옥 특유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죠. 그래서 봄 냄새 가득한 요즘 같은 날에는 많은 인파로 북적인답니다.
소중 학생기자단 취재 후기 이번 취재로 방문한 백인제가옥은 지금까지 보던 한옥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여러 문화가 섞여 있었고, 창문이 유리로 돼 있는 게 흥미로웠죠. 집이 지어졌던 시기에는 유리가 정말 비쌌다고 해요. 그런데도 이런 유리창이 있었다는 것은 이 집 주인이 정말 부자였었다는 거겠죠. 또 한옥은 온돌 때문에 2층을 짓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2층으로 지은 공간이 있는 게 특이해 보였죠. 또한 집이 높은 곳에 있어서 북촌 마을과 남산타워가 한눈에 보일 정도로 경치가 좋았습니다. 라일락 향기로 가득 메운 정원도 정말 예쁘게 꾸며져 있었고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근대 한옥에 대해 알 수 있었던 경험이었습니다.

이시온(경기도 홈스쿨링 6) 학생기자

벚꽃이 아름다운 봄날, 백인제가옥에 갔습니다. 가기 전에는 한옥이라는 말에 멋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가보니 규모가 정말 크고 아름다웠죠. 안채에는 큰딸의 공부방이 있었는데 엄마가 큰딸이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구조라 큰딸이 힘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랑채로 나가는 복도는 볼링을 칠 수 있을 것처럼 길었죠. 또 정원에는 꽃나무들이 예쁘게 피어 있고 잔디밭도 있어 보기 좋았습니다. 아름다운 한옥을 배경으로 아기 돌 사진을 찍는 가족도 있었고 한복을 입은 외국인들도 많았습니다. 우리나라 근대 한옥을 외국인들이 좋아하는 게 뿌듯했습니다. 취재를 마치고 북촌 거리를 걸으면서 한옥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기도 했어요.

이한호(경기도 홈스쿨링 5) 학생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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