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노동절인 1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 북동쪽 프랭클린공원 인근 도로를 반(反)트럼프 집회 참여자들이 행진하고 있다. 워싱턴=권경성 특파원

“오늘은 국제적인 노동자의 날이자 5월 1일 전국 행동의 날이다. 이민자와 노동자가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은 그들에게 존중과 존엄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다.”

1일 오후 12시 40분쯤(현지시간). 미국 이민자 권익옹호단체 CASA(카사)의 대변인 조시 사푸나르(35)는 백악관 북동쪽 인근인 미 워싱턴 프랭클린공원에서 행진을 시작한 수백 명 규모 대열의 선봉을 맡았다. 미국 메릴랜드주(州) 볼티모어에 살고 있는 사푸나르는 남미 국가 칠레 출신 이민자 여성이다.

국제 노동절인 1일 미국 워싱턴에서 반트럼프 행진 도중 한국일보와 만난 미국 이민자 권익옹호단체 CASA(카사)의 대변인 조시 사푸나르가 주먹을 들어 보이고 있다. 워싱턴=권경성 특파원

그에게 매년 노동절은 파티를 하는 날이었다. 생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은 동료들과 함께 일단 거리로 나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반(反)이민 반노동’ 정책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메릴랜드 실버스프링에 본부가 있는 카사는 이날 집회의 공동 주최 단체였다. 사푸나르는 백악관으로 향하는 행군 도중 한국일보에 집회 취지를 전하며 “내가 입고 있는 티셔츠는 (중미 국가) 과테말라 이민자가 만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집회 참여자 상당수는 라틴계였다. 그들은 미국을 지탱하는 노동자 집단이다. 제조업·서비스업을 막론하고 이들 없이는 미국 산업이 굴러가기 어렵다. 카사 등과 함께 이날 집회를 조직한 SEIU 32BJ 노동조합의 수석 부의장 하이메 콘트레라스는 USA투데이에 “이민자들이 미국을 만든다”고 말했다. SEIU 32BJ는 미국 동부 해안 18만5,000명의 노동자를 대표하는 노조다.

국제 노동절인 1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 인근 도로를 반트럼프 집회 참여자들이 헌법 전문을 형상화한 대형 천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워싱턴=권경성 특파원

이주 노동자의 분노에 불을 붙인 것은 '킬마르 아브레고 가르시아 사건'이다. 합법적으로 메릴랜드에 체류하며 1년 차 판금공 도제로 일해온 이민자인 가르시아는 트럼프 행정부의 행정 실수로 3월 악명 높은 엘살바도르 교도소로 보내진 뒤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이날 백악관 앞 라파예트광장에서 가르시아의 아내인 제니퍼 바스케스 수라는 “내 남편이 오류 탓에 적법 절차 없이 엘살바도르에서 가장 위험한 교도소 중 한 곳에 버려져 죽게 생긴 지 벌써 50일이 지났다”며 “내 남편 목숨을 갖고 정치 게임을 하지 말라”고 호소했다. 이에 수천 명의 집회 참여자가 “그를 집으로 데려오라”고 호응했다.

규탄 대상이 된 트럼프 행정부의 반노동 행태는 대규모 이민자 추방만이 아니다. 프랭클린공원에서 만난 데니스 로빈(71)은 정부효율부(DOGE) 수장 자격으로 전기차 제조업체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가 주도한 연방정부 공무원 대거 해고 작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연방정부 노동자들도 중요하다” 손팻말을 들고 나온 그는 “트럼프 취임 첫 100일간 미국이 빠르게 최악의 방향으로 변했다”며 “트럼프는 노동자에게 잔인하고 무관심하다”고 말했다.

국제 노동절인 1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 북동쪽 프랭클린공원 집회에 참여한 데니스 로빈이 "연방정부 노동자들도 중요하다" 손팻말을 들고 있다. 워싱턴=권경성 특파원

제조업 일자리 창출을 명분으로 내세운 고강도 관세 정책은 되레 일자리를 줄이는 모순을 낳고 있다. 내셔널몰(백악관 남쪽 워싱턴 기념비와 연방의회 의사당 사이 약 2㎞ 거리 공간)에서 ‘메이데이 무브먼트 USA(노동절 운동 미국)’ 집회에 참여한 이자벨라 카브레라(22·여)가 지적한 것은 관세 정책 부작용인 고용 시장 위축이었다. 그는 본보에 “대학 졸업이 임박했는데 취업 시장을 감안하면 졸업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털어놨다.

이날 모인 미국인들이 반노동과 더불어 많이 성토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법치주의 무시 행태였다. 카사 대변인 사푸나르는 “헌법과 법치주의, 적법 절차가 트럼프 행정부에 의해 짓밟히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노동절은 9월 첫째 주 월요일이고 5월 1일은 대신 ‘법의 날’로 지정돼 있는데, 반트럼프 진영은 이날을 ‘전국 법 행동의 날’로 재규정하고 워싱턴 연방대법원과 전국 연방법원에서 법률 전문가들을 동원해 법치주의를 촉구했다. 프랭클린공원 집회 참여자들은 미국 헌법 전문을 형상화한 수십 미터 길이의 대형 천을 함께 들고 행진하기도 했다.

국제 노동절인 1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 인근 프랭클린공원에서 반트럼프 집회 참여자들이 "트럼프는 당장 떠나야 한다"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에 나서고 있다. 워싱턴=권경성 특파원

트럼프 대통령 취임 100일(4월 29일) 직후 맞은 올해 국제 노동절의 집회는 각양각색의 반트럼프 구호와 팻말의 향연이었다. 트럼프를 왕 또는 독재자, 파시스트에 빗대거나 그에게 저항하고 그를 탄핵하라는 외침도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팔레스타인을 구하라거나 소수자 대상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정책을 되살리라는 주문도 적지 않았다. 데이브 윈스턴(72)은 “트럼프는 불우한 사람들의 돈을 빼앗아 부자들에게 주고 있다”며 감세 정책의 부당성을 꼬집었다.

미국 언론에 따르면 이날 집회는 워싱턴과 뉴욕, 필라델피아,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등 여러 대도시에서 약 1,000건이 열렸고 7만 명 정도가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 최대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에서 시작된 풀뿌리 저항 캠페인 ‘50501’이 주도했다. 50501은 같은 날, 미국 50개 주에서 50개의 시위를 열자는 의미다. 이날 전국 일제 집회는 2월 17일, 3월 4일, 4월 5일, 4월 19일에 이어 다섯 번째다.

한국일보

워싱턴= 권경성 특파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