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포커스]
사진=키움증권 제공
“어디 가서 누설하지 말라는데 ‘기회비용’도 보상 받았습니다.”
“저는 전화 왔는데 기회비용은 못 받았어요.”
“한달이 넘어가는데 아직 연락도 못 받았어요.”
4월 16일부터 5월 2일, 키움증권 전산장애 피해자들이 모인 단체 채팅방은 분노와 불신으로 가득했다. 사건 발생 직후 회사 측은 수습에 나섰지만 보상 여부와 기준은 제각각이었다. 피해자 사이에서도 차별 논란과 혼선이 불거졌고 키움의 대응 방식에 비판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업계에선 이번 전산장애는 단순 사고가 아니라 구조적 병폐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지적이 잇따른다. 내부거래 의혹부터 거래량 부풀리기, IR 자료 왜곡, 고객 대응 부실 논란까지. ‘혁신의 상징’으로 불렸던 키움증권이 이제는 시스템과 전략 모두에서 흔들리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멈춘 영웅문, 고장 난 내부거래
사진=독자 제공
지난 4월 4일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가 있던 날. 키움증권 모바일트레이딩시스템(MTS)을 통한 주식 매매거래 주문 체결이 지연됐다. 키움증권은 이날 고객 공지를 올리고 “현재 일부 주문 처리가 원활하지 않다”며 “대단히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초유의 사태였다. 키움증권은 전날에도 개장 직후 주문량이 몰린 한 시간 동안 시스템 오류로 주문이 ‘먹통’ 되거나 지연 체결되는 장애를 겪었다. 증권사가 이틀 연속 투자자들의 주문을 정상적으로 처리하지 못한 건 처음이었다.
회사는 정확한 원인을 규명하지 못했다. 사건 초반에는 “주문 폭주로 인해 접속서버에 병목현상이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누구도 이런 말을 믿지 않았다. 정치적 사건으로 변동성이 극심해 거래량 증가가 예견돼 있었고, 이는 타 증권사도 동일한 환경이었다.
‘리테일 1위’ 키움엔 더없이 치명적인 사건이었다. 회사 측은 그주 주말 동안 MTS와 홈트레이딩시스템(HTS), 홈페이지 서비스를 전면 중단하고 시스템 전면 재점검에 나선다고 밝혔다. 셧다운과 다름 없는 ‘대공사’였다.
이후 회사 측은 “주문 폭주로 인한 서버 과부하가 원인이었고 서버 병목 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테스트를 진행했다”며 “1차적으로 문제는 해결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사고의 정확한 원인은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회사 측이 내세운 ‘주문 폭주’ 역시 납득하기 어려운 설명이다.
키움증권은 당시 자사 플랫폼에 접속한 구체적인 주문 건수나 거래량을 공개하지 않았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사고 발생 4월 3일과 4일의 코스피·코스닥 전체 거래대금은 각각 14조원, 18조원 수준이었다. 최근 1년간 일평균 거래대금이 15조~20조원 사이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시장 전체 거래량은 평이한 수준이었다는 평가다.
복수의 업계 관계자들은 “이번 사태는 단순한 과부하가 아니라 키움증권의 전산 구조 자체에 내재된 병목과 비효율이 폭발한 결과”라고 진단했다. 한마디로 전산에 제대로 투자를 하지 않은 결과라는 것이다. 그 핵심에는 계열사 다우기술로의 전산 외주 의존이 있다.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키움증권은 지난해 전산운용비로 1097억원을 집행했다. 국내 20대 증권사 가운데 최상위 수준이다. 전산 비용이 1000억원을 넘긴 곳은 키움과 삼성증권 단 두 곳뿐이다. R&D 지출은 미래를 위한 투자다. 관건은 ‘질’이다.
이 중 83%에 해당하는 915억원이 계열사인 다우기술과의 IT 아웃소싱 계약으로 쓰였다. 다우기술은 키움증권의 최대주주(24년 말 지분 42.31%)로 사실상 전산 투자 대부분이 모기업 매출로 직행하는 구조다. 일각에서 “키움증권의 전산투자가 오너들을 위한 투자”라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문제는 돈을 가장 많이 쓰는 증권사임에도 품질은 최하위 수준이라는 점이다. 금융감독원 자료에 따르면 최근 7년간 국내 자기자본 상위 10대 증권사에서 발생한 전산장애 배상 건수는 총 164건. 이 중 20.7%인 34건이 키움증권에서 발생해 배상 건수 1위를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키움의 전산 구조가 외주 의존성과 시스템 분절화로 왜곡돼 왔다고 지적했다. 실제 키움은 과거 개발된 앱을 통합하지 않고 기능이 중복되는 MTS·HTS를 수차례 분할 개발했다. 개발비와 관리비가 ‘더’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또한 타 증권사들이 코스콤 등 공신력 있는 외부 기관의 최적 주문 라우팅(SOR) 시스템을 도입한 것과 달리 키움은 다우기술을 통해 자체 개발한 SOR을 운영하며 로직 복잡도와 충돌 가능성을 키워왔다.
업계에서는 “앱이 많고 시스템이 겹치며 특정 집단에 특화된 전산 구조가 유지된 상황에서 자체 개발한 SOR까지 중첩되니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구조’였다”는 회의적인 시선이 나온다.
사고 이후 보상 방안도 논란을 키웠다. 주문장애 요건과 보상신청 절차 및 보상기준을 따로 두고 있지만 투자자 사이에서는 보상 기준이 제각각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한 투자자 단톡방에서는 “어디서 누설하지 말라는 단서를 달고 ‘기회비용’으로 250만원 상품권을 받았다”는 증언이 나왔다. 반면 같은 날 같은 시간대에 접속 불가 피해를 겪은 또 다른 투자자는 “전화도 못 받았고 보상 여부조차 확인 안 된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주문 지연 오류로 피해를 입은 이들 일부는 최근 금융감독원에 대거 민원을 제기하며, 집단 소송까지 검토하고 있다.
무엇보다 사고의 정확한 원인을 아직까지 규명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시장 불안은 더욱 커지고 있다. 복잡하고 불투명한 전산 구조가 그대로 유지되는 한 유사한 장애가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2세 경영 시작에 무리한 성장 전략?키움증권은 한때 수수료 정책과 HTS ‘영웅문’으로 온라인 주식 거래를 이끈 선두주자였다. 그러나 2020년대 들어 토스증권과 메리츠증권 등 경쟁사들이 기능과 가격 경쟁력에서 빠르게 추격하거나 추월하면서 ‘리테일 명가’의 입지는 흔들렸다.
2000년대의 신개념 플랫폼이던 영웅문은 이제 4050세대에겐 익숙한 유산, 2030세대에겐 낡은 인터페이스로 인식되고 있다. 정기주주총회에서 ‘토스증권처럼 커뮤니티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주들의 지적에 엄주성 사장이 “토스는 리딩방 같다는 평가도 있다”고 언급해 또 다른 논란과 시장의 역풍을 불렀다.
시장에서는 이를 디지털 감각 단절, 혁신 종언의 상징적 장면으로 받아들였다.
배우 고민시를 앞세운 광고로 MZ세대와의 접점을 넓히려 했지만 엄 사장의 ‘리딩방’ 발언은 그 전략을 스스로 무너뜨린 셈이 됐다.
문제는 외형 성장에만 매달린 무리한 전략이 곳곳에서 파열음을 냈다는 점이다. 전산장애가 발생하기 전부터 키움은 비정상적인 리워드 구조로 업계의 도마에 올랐다.
해외주식 점유율 1위를 탈환한 배경에 가격 변동이 거의 없는 미국 채권형 ETF를 활용해 무의미한 반복 매매를 유도하고 거래량만 부풀린 뒤 현금성 리워드를 제공하는 방식이 쓰였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로 인해 실질 투자 목적 없이 리워드만 노린 허수 계좌가 대거 유입됐다는 지적이다.
조작 논란은 IR 자료로 번졌다. 키움은 자사 거래량(분자)은 부풀리고 전체 시장 거래량(분모)은 일부 증권사의 축소 보고 기준을 적용해 왜곡된 시장점유율을 공시했다. 문제가 불거지자 해당 IR 자료는 삭제됐다.
이번 일련의 사태는 우연이 아니라 경영구조의 문제에서 기인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오너가의 2세 경영이 본격화되며 ‘해외주식 MS 1위’가 사내 미션이 됐고 MS를 끌어올리기 위한 전략은 점점 무리수를 동반하게 됐다는 것이다.
김동준 키움프라이빗에쿼티(PE) 대표는 최근 키움증권 이사회에 합류하며 본격적인 2세 경영의 신호탄을 쐈다. 그는 김익래 다우키움그룹 전 회장의 장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