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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 논설주간
“신의 발소리에 귀 기울이다가 그가 지나갈 때 기회를 놓치지 않고 코트 자락을 잡아채는 것이 정치인의 할 일이다.”

19세기 독일 통일을 이끌어낸 명재상 비스마르크의 어록이다. 멋있는 말이지만 실천이 쉽지 않다. 역사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 혜안과 과감한 선택을 주저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하다.

조기 대선을 앞두고 국민의힘에서 계엄 반성론이 일고 있다. 윤희숙 여의도연구원장은 지난달 24일 당 정강·정책 방송 연설에서 “권력에 줄 서는 정치가 계엄을 낳았다”며 사죄했다. 이튿날 권성동 원내대표도 “전적으로 공감한다. 수평적 당정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 점에 대해 지도부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말했다. 대선 경선 과정에서 일부 후보들도 사과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계엄 옹호 매달려 시간 날린 국힘
비전도 없이 오직 이재명 때리기
오히려 상대를 ‘만독불침’ 만들어
한덕수 대망론, 명분·가치에 의문

너무 늦었다. 대선은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 신의 코트 자락은 가물가물 멀어지고 있다. 지금 판세에서 보수 후보가 승리하려면 거의 기적이 필요하다. 12·3 계엄이 벌어진 지 벌써 다섯 달. 만일 계엄이나 탄핵소추 직후 국힘이 윤석열 전 대통령과 분명한 선을 그었다면 어땠을까.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벌어졌던 2017년 대선에 홍준표(24%), 안철수(21.4%), 유승민(6.8%) 등 범보수 후보의 득표율 합은 문재인(41.1%), 심상정(6.2%) 등 범진보 후보의 득표율보다 높았다. 이런 수치를 기계적으로 치환할 수는 없겠지만, 탄핵 충격에도 보수정치의 기회가 없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물론 보수가 박근혜를 빨리 버린 덕에 그나마 가능했던 기회였다. 국힘이 계엄 및 그 옹호 세력과 결별하고 중도 확장성 있는 후보를 중심으로 결집했다면 다섯 달의 시간 동안 ‘다이내믹 K정치’는 어떻게 작동했을지 모른다. 더구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에 대한 광범위한 거부감은 보수로선 8년 전 대선에선 찾기 힘들었던 유리한 조건이 아닌가.

그 아까운 시간을 국힘 지도부는 신의 외투 자락 대신 윤석열의 바지자락을 잡느라 허비하고 말았다. 국힘이 찬탄·반탄의 늪에서 헤매는 동안 이재명은 외연 확장의 한계론을 딛고 지지율을 올렸다. 반성 없이 오로지 이재명 때리기에만 매달리는 국힘의 퇴행이 오히려 이재명을 ‘만독불침(萬毒不侵)’으로 만들어 버렸다.

당원 구성이나 지지 기반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당내 강경 세력에 포획돼 보수정치의 가치를 저버린 무책임이었다. 눈앞의 지지율에 취한 착각이었다. 역사의 발소리를 듣지 못한 단견이었다.

한덕수 권한대행의 등판이 기회가 될 수 있을까. 피선거권 보유자의 출마는 권리이자 자유겠지만, 도대체 명분이 뭔지 의아하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한 대행 출마 반대가 60~70%. 그가 어떤 집권 비전을 들고나올지 모르지만, 유권자의 부정적 정서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을 터다. 국힘의 최종 후보와 단일화로 시너지를 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지지 기반이 달라야 플러스 효과도 기대할 텐데, 국힘 지지층과 한덕수 지지층이 따로 있다고 보기 힘들다. 총리 임명 때와는 비교도 안 될 혹독한 검증의 벽은 또 어떻게 넘을지도 궁금하다.

한 대행 개인의 계산이나 포부, 야망은 논외로 하자. 다만 걱정되는 건 보수정치의 침몰이다. 빅텐트 운운하며 경선도 치르지 않은 당외 인물을 미는 당 지도부의 움직임은 정상적 정당정치라고 보기 힘들다. 이런 비정상 행태에서 한덕수 뒤에 어른거리는 ‘친윤’의 그림자를 느끼는 건 어쩔 수 없다. 자신들 입지를 위협할 당내 후보 대신 당외 인물을 ‘바지사장’으로 내세워 대선에 패배하더라도 당권을 놓지 않겠다는 시나리오가 그것이다. 친윤 세력이 한동훈을 축출할 때 가동됐다던 ‘김옥균 프로젝트’의 새 버전인가. 허튼 음모론으로 치부하기엔 한 대행이 ‘윤석열의 친구’ 이완규 법제처장을 헌법재판관 후보로 지명했던 일이 있어 찜찜하다.

이런 시나리오가 사실이라면 국힘의 미래는 희망이 없다. 만약 한 대행이 국힘 후보로 나서더라도 당선 가능성은 현재로선 희박한 상태. 대선 패배 후 한덕수가 당을 추스를 구심점이 되기도 어렵다. 결국 다시 친윤 회귀 정당이 된다면 국힘은 여론으로부터 고립된 섬이 되고 만다. 정치에서 패배보다 무서운 것이 무(無)비전이다. 가치도, 명분도 저버린 채 외부 인물만 바라보다 패배한 정당에 누가 기대를 걸겠나.

국힘으로선 이런 도박이라도 해야 할 정도로 절박하다지만, 이런 위기를 자초한 세력은 누구였나. 그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보수 정당의 마지막 씨앗까지 탈탈 털며 보수 재건의 길목을 막고 있다. 당장 눈앞의 대선을 치르는 것이 급하지만, 대선 이후 보수의 길도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설사 기적이 일어나 국힘이 이기더라도 보수 정치는 이미 회복 불능의 수준으로 망가졌다. 기회의 신 카이로스는 뒷머리가 맨머리라는데, 현재 국힘 행태를 보면 이미 스쳐 지나간 카이로스의 뒷머리를 움켜쥐려는 허망함만 읽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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