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재의 ‘검찰 수사의 재구성’ 청와대 선거개입 사건 ③
윤석열 전 대통령이 4월21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2·3 내란 사건 2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재판장님, 내가 시작이니까 말씀드리는데 유죄 입증은 검찰이 하는 거 너무 당연합니다만, 그래도 재판을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공소장이 난잡하고, 증거라는 것도 어느 정도 될 만한 거 딱 골라서 던져줘야 그거 가지고 증거인부(증거 인정 여부를 밝히는 것)를 다투든지 하지, 지금 뭐 일단 (수사기록이) 7만 쪽에, 증거목록만 천몇백 페이지라는데 이래 가지고 재판이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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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14일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열린 12·3 내란 사건 첫 공판에서 윤석열은 자신을 구속취소 결정으로 풀어준 지귀연 재판장에게 이렇게 ‘훈계’했다. 재판장답게 소송지휘를 제대로 하라는 말이었다. 소송지휘는 재판장의 고유 권한이다(형사소송법 279조). 감히 재판장에게 이런 훈계를 하는 피고인은 여태껏 없었다. ‘사법농단’으로 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첫 공판 때 검찰의 “소설 같은 공소장”을 잘 살펴봐 달라고 했지만, 어디까지나 ‘읍소’에 가까웠다. 윤석열의 주제넘는 훈계에도 지귀연은 고분고분했다. “저보다 훨씬 더 (형사소송법) 전문가들이시니까”, “재판부의 노고를 좀 알아주셨으면”과 같은 일반 피고인은 듣기 힘든 공손한 말투였다.
윤석열 내란 재판과 전혀 달랐던 전두환·노태우 재판
1996년 3월11일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열린 12·12 및 5·18 사건 1심 첫 공판에서 전두환, 노태우 등 피고인들이 피고인석에 서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29년 전 같은 법정에서 같은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의 재판은 달랐다. 12·12 및 5·18 사건 재판부는 전두환 변호인단의 도발적 언행을 단호하게 제압했다. 변호인단은 재판부가 신속한 재판을 위해 주 2회 공판을 진행하는 것에 강하게 반발했다. 명목은 ‘피고인 방어권’을 내세웠지만, 속내는 구속기간(6개월)이 지나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받으려는 꼼수였다. 전두환 정권 때 대법원판사(현 대법관)를 지낸 전상석 변호사는 한참 후배인 재판부를 향해 “재판을 엉터리로 진행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김영일 재판장은 “재판 진행에 대해 변호인이 이래라저래라하는 건 재판부에 대한 예우가 아니다”라고 일갈했다. 12년 후배로부터 꾸지람을 들은 전상석은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철권통치로 집권 내내 기세등등했던 전두환도 법정에선 재판장의 기세에 눌려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했다. 재판부는 변호인단이 막판에 불공정 재판을 이유로 변호인을 사퇴하자, 국선변호인을 선임해 재판을 강행했다. ‘성공한 쿠데타’에 대한 단죄는 재판부의 단호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윤석열의 모두 진술은 전형적인 ‘내로남불’이었다. 대표적인 게 검찰의 7만쪽 분량의 수사기록을 문제삼은 것이다. 검사 여러 명이 떼로 작성한 방대한 수사기록을 1~2명의 변호인이 단기간에 샅샅이 살펴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수만쪽에 이르는 수사기록이 피고인의 방어권을 제약한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 때 윤석열이 지휘한 ‘적폐수사’는 수사기록이 7만쪽을 훌쩍 넘겼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8만5천쪽, 박근혜는 12만쪽이었고, ‘사법농단’의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무려 20만쪽이 넘었다.
게다가 윤석열 검찰은 피고인 쪽에 수사기록 복사도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 수사기록은 피고인의 방어권 행사에 매우 중요한 자료다. 검찰이 어떤 증거를 갖고 기소했는지 파악해야 재판 전략을 짤 수 있다. 검찰은 핵심 증거가 재판 전에 노출된다는 핑계를 댔다. ‘국가안보, 증인 보호, 증거인멸, 관련 사건 수사 장애가 우려될 경우’ 열람 및 등사(복사)를 거부할 수 있다는 형사소송법 조항(제266조 3의 2항)을 교묘하게 활용했다. 반드시 제공해야 하는 ‘수사기록 목록’조차 제공하지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수사기록 복사 문제로 변호인과 검찰이 다투는 게 통과의례처럼 돼버렸다.
‘쌍끌이식’ 기소·방대한 수사기록은 윤석열의 주특기
윤석열이 검찰의 공소장에 대해 “난잡하다. 조서들을 모자이크식으로 갖다 붙인 것 같다”고 비난한 것도 마찬가지다. 유죄의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 모조리 긁어모아 기소했다는 취지인데, 이런 ‘쌍끌이식’ 기소야말로 윤석열의 주특기였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등 전 정권 인사들에 대한 수사가 다 그랬다. ‘뭐든 하나만 걸리면 된다’는 식으로 각종 혐의를 갖다 붙였다.
‘청와대 선거개입’ 사건은 윤석열식 수사의 결정판이었다. 2020년 4월23일 열린 첫 공판준비기일에서 검찰은 피고인 쪽에 ‘수사기록 열람·등사 불가’를 통보했다. 분량이 7만7천쪽에 이르는 방대한 기록이었다. 김태은 서울중앙지검 공공수사2부장은 “피고인들과 공범 관계에 있는 20여명을 수사 중이다. 형사소송법에 따라 (피고인들에게) 사건기록을 열람·등사 해주기 어렵다”고 했다.
변호인들은 황당해했다. 송철호 전 울산시장의 변호인은 “공범을 계속 수사할 거면 피고인을 기소하지 말았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따졌다. 백원우 전 민정비서관의 변호인은 “피고인 진술만이라도 복사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피고인이 검찰에서 어떤 조사를 받았는지 정도는 알아야 재판 준비를 할 수 있는 게 아니냐는 항의였다. 검찰은 변호인들에게 별다른 대꾸 없이 재판부에 “공범 수사에 시간이 더 필요하다. 다음 재판은 3개월 뒤 열렸으면 한다”고 요청했다. 재판장은 ‘일단 수사기록 목록부터 변호인들에게 제공하라’고 검찰에 명령한 뒤 10분 만에 재판을 끝냈다. 3개월이면 될 것 같다는 ‘공범 수사’는 1년이 넘도록 끝날 줄 몰랐다. 공판준비기일만 6번 열렸다. 정식 재판은 기소된 지 396일이 지난 2021년 5월10일 시작됐다.
‘산재모병원 vs 공공병원’, 박근혜 대 문재인 대립 구도 활용한 수사
지난 2022년 5월10일 문재인 대통령이 KTX울산 통도사역에 도착해 환영 나온 시민들에게 인사말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검찰은 ‘하명수사’만으론 부족했는지 청와대의 ‘대리 공약’ 혐의도 추가했다. 청와대 참모들이 ‘대통령 친구’의 선거공약을 대신 수립해 줬다는 주장이었다. 경쟁자인 김기현 울산시장이 추진하던 산재모병원 대신 공공병원을 공약하도록 송철호 캠프에 조언하고 관련 정보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검찰은 송철호 캠프 관계자의 수첩에 “단체장 후보 출마시:공공병원/산재모병원-좌초되면 좋음”이라고 적힌 메모를 근거로 시나리오를 짰다. 김기현이 추진하던 산재모병원 건립이 무산되면 송철호에게 유리할 거라고 판단한 청와대 참모들이 송철호를 돕기 위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이다.
산재모병원 공약은 애초 박근혜의 대선(2012년) 공약이었다. 산업 도시인 울산에 산재가 많은데도 산재 의료시설이 열악한 것에 착안한 공약이었다. 하지만 경제성 문제로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예비타당성(예타) 조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문재인은 2017년 대선 때 산재 환자뿐 아니라 일반 시민 진료도 함께 하는 공공병원 건립을 공약했다. 검찰이 이 공약을 노린 건 ‘박근혜 대 문재인’의 정치적 대립 구도를 이용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그러나 검찰의 주장은 1심 재판 때부터 배척됐다. 송철호 캠프 관계자의 ‘산재모병원 좌초’ 메모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검찰 주장을 반박하는 증거가 더 많았다. 산재모병원 예타 작업을 주도한 기획재정부 관료들은 ‘청와대로부터 아무 지시도 받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심지어 송철호는 캠프 선거전략 회의에서 ‘울산의 발전을 위해 산재모병원 건립을 지원해야 한다’고 했고, 청와대 참모를 만나 ‘산재모병원을 살려달라’는 부탁까지 했다. 하명수사를 유죄 판결한 1심 재판부도 선거공약 관련 혐의는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범죄의 증명이 없다”고 했다. 검찰이 ‘청와대 선거개입’ 프레임을 짜기 위해 이것저것 “모자이크식으로 갖다붙인”(윤석열) 결과였다.
청와대 ‘레드팀’ 이끈 백원우 집중 공략한 이유는?
지난 2018년 1월14일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국정원, 검찰, 경찰 등 권력기관 개혁 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배석은 왼쪽부터 김형연 법무비서관, 김종호 공직기강비서관, 박형철 반부패비서관, 백원우 민정비서관. 청와대사진기자단
검찰은 공범으로 조국과 임종석까지 엮으려고 했다. 연결고리는 백원우였다. 그는 청와대 내 ‘레드팀’을 이끌었다. 청와대 ‘친문’들은 노무현 정권에서 있었던 과오를 반복하지 않는 것을 자신들의 임무로 여겼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서관과 재선 국회의원 출신인 백원우가 그 임무를 이끌 적임자였다. 대통령 친인척 관리 등 민감한 부분이 그의 몫이 됐다. 검찰은 백원우가 문재인의 약한 고리를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봤다. 그를 공략하면 문재인까지 겨냥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만약 2심에서 무죄 판결이 나지 않았다면, 청와대 선거개입 수사는 조국과 임종석을 거쳐 문재인으로 향했을 것이다.
검찰의 ‘문재인 정권 사냥’은 윤석열 정권 출범 뒤 더욱 기승을 부렸다. 남북정상회담과 부동산 대책 등 문재인 정권의 핵심 정책까지 수사 범위를 확대했다.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김수현 정책실장 등 핵심 참모들이 타깃이 됐다. 검찰은 변죽만 울리지 않았다. 문재인을 직접 겨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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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재의 ‘검찰 수사의 재구성’은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 윤석열이 ‘12·3 내란’으로 탄핵소추돼 헌법재판관 전원일치 결정으로 파면됐습니다. 국헌문란 목적의 폭동을 일으킨 혐의로 기소돼 형사재판도 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윤석열은 국민에게 단 한 마디의 사죄도 하지 않습니다. 반성은커녕 온갖 궤변으로 법치를 조롱하고, 극렬 지지자들에겐 궐기를 촉구합니다. 나라가 어찌 되든 말든 저만 살면 된다는 식입니다. 어떻게 이런 후안무치한 대통령이 나왔을까요. ‘윤석열 부부의 친위대’를 자처한 검찰에 원인이 있지 않을까요. 윤석열 내란의 뿌리를 추적해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