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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정신과 의사의 코멘터리]
<5> 영화 '승부'의 조훈현

편집자주

정신건강의학과 김지용, 오동훈, 허규형 전문의가 영화나 드라마 속 캐릭터들의 심리를 분석하며 우리의 마음도 진단합니다.
영화 '승부'에서 바둑을 두고 있는 조훈현(이병헌). 바이포엠스튜디오 제공


부끄럽지만, 나는 바둑을 둘 줄 모른다. 몇 번인가 아버지가 나를 바둑 앞으로 이끌었던 기억은 있지만 내 머릿속에 아주 기본적인 규칙 외에 남아있는 게 전무한 걸 보면 몇 수 앞을 내다봐야 하는 심오한 흑백 싸움을 이해하기엔 나의 역량이 모자란 게 아니었나 싶다.

비록 바둑에 문외한이었던 나이지만, 우리나라 바둑 기사들에 대한 뉴스는 왜인지 열심히 찾아보곤 했다. 한국의 기사가 중국이나 일본의 기사를 꺾고 세계 대회를 우승했다는 소식을 접하면 괜스레 마음이 벅차고 뭉클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세계 제패’라니 얼마나 멋진 말인가? 특히 조훈현-이창호-이세돌로 이어지는 한국 바둑의 전성시대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승전보에 소위 ‘국뽕’으로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다. 아마 그 시절을 추억하는 건 비단 나만이 아닐 것이다.

'바둑 황제' 조훈현의 전능감

영화 '승부'에서 조훈현(이병헌)이 제1회 응씨배 바둑 선수권대회를 제패한 후 우승컵을 들고 있다. 바이포엠스튜디오 제공


영화 ‘승부’는 조훈현 9단이 제1회 응씨배 바둑 선수권 대회를 제패하고 카퍼레이드를 벌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미 9세 때 프로기사 자격을 획득한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날 정도로 뛰어난 자질을 보였던 조훈현은 1980년대 전성기를 맞이한다. 스물일곱 살이던 1980년에는 9관왕을 달성했고, 1982년에는 한국 최초의 9단에 오르며 10관왕을, 1986년에는 11관왕을 기록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국내엔 적수가 없다고 표현하는 게 맞는 상황이었다. 영화에 소개된 응씨배 대회의 경우 대만의 기업가 응창기에 의해 창설되었는데, 파격적인 상금 규모로 당시에 ‘바둑 올림픽’이라고 불릴 정도로 위상이 높았다. 1회 대회에는 세계 정상급 기사 16명이 초청을 받아 출전했는데 한국 기사로 유일하게 출전했던 조훈현이 연전연승 끝에 중국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로써 조훈현은 ‘바둑 황제’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하게 된다.

이 시점에 조훈현의 자기상(self-image)은 어떠했을까? 자기심리학을 주창한 하인즈 코헛에 따르면
사람은 어린 시절 누구나 완벽하고 전능한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욕구
를 갖는다. 평범한 아이들의 경우엔 부모를 전능한 존재로 인식하고 부모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며 자기애적 욕구를 충족시킨다. 그렇지만 부모 역시 한 명의 인간이기에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이것이 아이에게는 처음에는 하나의 ‘좌절’로 작용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부모의 약점을 인정하면서 ‘불완전한 존재로서도 인정받을 수 있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이상화된 자기상이 깨어지는 과정이 있어야만 보다 성숙한 자기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조훈현의 문제는 어렸을 때부터 지나칠 정도로 완벽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
이다. 어렸을 때부터 꾸준하게 이어져온 주변의 찬사와 인정이 보통 사람이라면 일찌감치 깨졌을 전능감을 그의 내면에 계속해서 남아있도록 하지 않았을까.
전능감이 유지되려면 끊임없이 성취라는
연료가 필요하다. 동시에 그 성취를 바탕으로 자신의 우월한 존재감을 더욱 빛나게 해줄 상대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을 '거울 자기 대상(mirroring self-object)'
이라고 부른다. 이때 조훈현의 눈에 들어온 것이 소년 이창호다.
이창호를 내제자로 받아들인 데는 그의 재능을 아끼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그를 훌륭한 기사로 키워냄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더욱 부각시키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욕구가 함께 존재했으리라.


제자에 패한 조훈현의 상실

영화 '승부'에서 조훈현(이병헌)이 어린 이창호와 바둑을 두고 있다. 바이포엠스튜디오 제공


그런데
문제는 이창호가 ‘거울 자기 대상’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것
이다. 스승인 조훈현의 가르침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자신만의 바둑을 고집하는 것도 모자라, 그 바둑을 바탕으로 스승의 자리를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결국 1990년 벌어진 29기 최고위전에서 두 사람은 도전자와 타이틀 보유자로 만나 대결을 벌인다.
“날 넘어서려면 10년은 걸리지”
라는 호언장담과 달리 이 대결에서 조훈현은 열여섯 살 이창호에게 패하며 타이틀을 빼앗긴다.
영화에선 수를 고심하던 조훈현이 나지막하게 “안 되나”라고 읊조린 후 카메라 앵글이 180도로
뒤집히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동안 쌓아온 조훈현의 자기애적인 내면 세계가 무너지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
이다. 결국 이 대회를 시발점으로 조훈현은 이창호에게 연이은 패배를 당하며 ‘무관의 제왕’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조훈현이 잃어버린 건 단순히 몇 개의 타이틀이 아니라 ‘완벽한 바둑황제’로서의
전능한 자기 이미지
였다. 조훈현은 이러한 상실의 위기에서 어떻게 반응했을까? 처음에는 “한 번의 실수였다” “내 바둑의 기세는 끝나지 않았다”라며 패배를 부정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연패를 당할수록 자기애적 손상(narcissistic injury)으로 인한 허탈함과 분노, 수치심을 감당하기
어려워지며 이창호에게 이러한 감정을 투사
하기도 했을 것이다. 영화에선 복기를 하던 중 이창호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나와 했던 대국은 복기할 필요 없다”고 화를 내는 장면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이러한 성숙하지 못한 방어기제는 감정을 궁극적으로 소화해내는 데 도움을 주지 못했고, 결국
조훈현은 자기 이미지의 상실에서 오는 깊은 우울감
에 빠져들게 된다.

조훈현은 어떻게 상실을 극복했을까

영화 '승부'의 조훈현(이병헌). 바이포엠스튜디오 제공


인생에서 처음 만나는 위기에 봉착한 조훈현. 그에게 힘이 돼 준 건 가족, 그리고 동료의 존재였다. 꾸준한 지지와 응원을 보내면서도 동시에 나약해지지 말라며 일침을 가하는 아내와 라이벌이면서 동시에 같은 세대를 살아가는 동료로서 따뜻한 조언을 건네는 남기철 9단을 통해 조훈현은 위기를 돌파할 힘을 얻는다.

먼저
‘절대적인 실력자’라는 그동안 쌓아온 자기 이미지를 내려놓고,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
한다. 이어서
이창호를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거울 자기 대상’이 아닌 독립된 하나의 존재로
인정
한다. 이창호에게 집을 떠나라고 이야기하며 선생으로서 네가 항상 자랑스러웠다고 이야기하는 대목, 떠나는 이창호에게 보관하던 자신의 스타일대로 둔 기보를 전해주는 장면은 이창호를 더 이상 자신을 빛나게 하는 반사판이 아닌 그 존재 자체로 존중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나아가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더 이상 개인적 성취에서 찾지 않고, 훌륭한 제자를 길러냄으로써 바둑이라는 문화가 이어 나갈 수 있도록 함과 동시에 좋은 기보를 남김으로써 다음 세대에 가치를 전수하는 데서 찾는, 중요한 변화를 경험한다.

이것을 자기심리학에서는 '초월적 자기 대상(Transcendental Self-object)'이라고 부른다.
초월적 자기 대상이란 기존의 개인적 성공, 타인의 칭찬, 인정 같은 외적 반영이 아니라, 삶의 더
큰 의미나 가치에 자기를 연결시켜 스스로 안정감을 얻는 심리적 구조
를 뜻한다. 쉽게 말하면
"누군가가 나를 대단하다고 해주지 않아도, 나는 더 큰 가치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충분히 의미 있는
존재"
라고 느끼는 상태다.

성과 아닌 신념을 중심으로 삶을 보라

영화 '승부'의 조훈현(이병헌). 바이포엠스튜디오 제공


자기 이미지의 상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해 낸 조훈현의 이야기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많은 울림을 준다.
우리는 개인의 성과에 의해 가치를 평가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지만
모두에게 자신의 가치를 입증할 수 있는 성취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수도, 경쟁에 뒤처져 낙제점의 성적표를 받아들 수도 있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성공이라는 단어는 점차 희미해지고, 그저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하며 살아가야 하는 나날들이 우리의 삶을 채운다.

이러한 삶의 궤적에서 우리 자신마저 스스로의 가치를 사회의 잣대에 맞추어 판단한다면, 우리는 어느 순간 ‘쓸모없는 삶을 살고 있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선을 돌려 우리의 삶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의미들에 주목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잘해내야만 인정받는 존재가 아닌, 존재 자체로 수용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그리고
삶에서 내가 무엇을 추구하고 지키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길 바란다.
성과와 성취가 아닌 추구하는 신념을 중심으로 삶을 바라보는 패러다임의 전환은 일상 속에서
내가 무심코 흘려보냈던 많은 것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도록 만들어준다. 나아가 그저
평범하게만 여겨지던 삶이 더 큰 가치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데서 오는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다.




오동훈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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