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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울산 동서석유화학 공장에서 이산화탄소가 누출됐습니다. 1명이 현장을 빠져나오지 못해 심정지 상태에 빠졌고, 현장 작업자 4명도 다쳤습니다. 심정지 상태였던 70대 노동자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20여 일 뒤 끝내 숨졌습니다.

그런데, 하청 업체 직원들은 일하기 전부터 원청 감독관에게 "위험해서 작업을 할 수 없다"는 말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벽체에 구멍을 뚫기 위해 물을 쓰는 드릴인 '습식 코어'를 이용하는데 전기실 전원도 내려가지 않은 상태였고, 드릴과 벽체의 두께도 규격에 맞지 않아 작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원청 감독관 측은 '작업 허가서'를 냈습니다. 안전 교육도 없이 구멍이 뚫리는 걸 보자마자 현장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렇게 작업을 하다 물과 시멘트가 섞인 불순물이 소화 설비 쪽으로 흘러들어 오작동을 일으켰고, 소화 설비에 담긴 이산화탄소가 전기실 내부로 퍼졌습니다.

전기 합선을 이산화탄소 누출 사고의 원인으로 추정한 경찰은 이달 초 참고인이었던 하청 노동자들을 '과실 치사' 혐의 피의자로 전환해 수사 중입니다.

하청 노동자들은 "작업을 멈춰야 한다"는 주장을 묵살한 원청에도 책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작업거부' 하면 잘릴 텐데…유명무실한 작업 중지권
"작업을 안 하면 당장 (작업 거부로 인해서) 그냥 바로 잘리는 거니까…어쩔 수 없이 작업자들은 그냥 거기서 (뚫을 자리를) 표시하고, 감독이 정해준 자리에 작업을 하게 된 거예요."

-이은수/사고 당시 하청 업체 공사부장

사고 당시 하청 업체 공사부장을 맡았던 이은수 씨는 "작업을 안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고 하소연했습니다. 공사부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지만 일용직 하청 노동자였던 이 씨는 " 해고의 두려움에 차마 작업을 멈출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작업 중 생명에 위협을 주는 상황이 발생할 때 노동자가 현장을 빠져나가는 건 법으로 보장된 권리입니다. 이른바 '작업 중지권'입니다.

산업안전보건법 제52조는 "근로자는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는 경우에는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국제노동기구 ILO 협약에도 "산업재해 발생 위험이 있는 경우, 근로자가 스스로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ILO 협약국이고, 법에도 명시되어 있지만 현장에선 여전히 보장받기 어려운 권리인 게 현실입니다. '급박한 위험이 있는 경우'라는 표현도 모호해 작업 중지권을 쓴 노동자가 회사로부터 책임을 떠안는 경우도 있습니다. 실제로 2022년 6월에는 한국타이어 소속 노동자가 "성형기(고체 가공 기계) 안전에 문제가 있다"며 기계 가동을 중단시켰는데, 회사로부터 8,900만 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노동청이 시정지시를 내리고 회사가 설비를 개선했음에도 벌어진 일입니다.

■"위험 앞에서 도망치는 겁쟁이 되자"…하청·비정규직도 가능할까?

이은수 씨의 사례처럼 작업 중지권 사용은 하청·일용직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더 어렵습니다. 지난해 '노동자 작업중지권 사용 실태' 를 조사한 민주노동연구원은 "하청, 비정규, 특수고용 노동자 등은 위험 현장에서 일한다 해도 고용 관계와 작업 통제 구조의 특성상 작업중지권 사용이 거의 봉쇄된다"고 밝혔습니다.

노동계는 작업 중지 노동자를 해고, 징계하는 사업주를 처벌하도록 작업 중지권과 관련된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노동자의 작업 중지권 사용을 사업주가 보복할 경우, 산업안전청과 전미노동관계위원회가 조사를 통해 처벌합니다.

오늘(28일)은 '세계 산재 노동자의 날'입니다. 전 세계에서 작업 중 죽거나 다친 노동자들을 추모하는 날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올해 처음으로 국가기념일로 지정됐습니다. 기념일을 앞두고 '작업 중지권 쟁취'를 요구하며 열린 민주노총 결의대회에서 박정훈 공공운수노조 부위원장은 "일터의 위험 앞에서는 도망치는 겁쟁이가 되자"고 말했습니다. 원청, 하청, 비정규직을 가리지 않고 '위험 앞에서 도망칠 수 있는 일터'를 만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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