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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세라 블래퍼 허디, 아버지의 시간
전투화와 방탄복을 착용한 경찰들이 2010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한 보육원에서 아기들을 돌보고 있다. 시는 경찰들이 빈민가 단속을 하다 아이들을 향해 총을 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자 이에 대한 대책으로 빈민가 보육원에 가서 아이들을 돌보도록 했다. 에이도스 제공


여성의 호르몬은 임신과 출산을 겪으면서 요동친다. 아이를 낳고 기를 때 나오는 옥시토신, 프로락틴과 같은 호르몬은 줄곧 모성이란 개념의 생물학적 증거로 쓰였다. 모성은 사회적으로 부여한 게 아니라 양육에 적합하게 진화한 필연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활용됐다. 호르몬에 기인해 '사냥꾼 남성'과 '양육자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성 역할은 오랜 기간 정설로 굳어졌다.

모성 연구의 대가인 세라 블래퍼 허디 미국 캘리포니아대 데이비스 캠퍼스 인류학과 명예교수는 신간 '아버지의 시간'에서 그간 간과해 온 남성의 '양육 본능'을 생물학적으로 재발견하고자 한다. 과학적 연구결과와 아내, 어머니, 할머니로서의 자전적 경험을 토대로 여성만큼이나 남성에게 깊이 새겨진 양육 본능이 있다고 밝힌다.

'양육하는 남자'의 발견

미국 덴버미술관에 전시돼 있는 웨스 헴펠의 20세기 후반 작품인 '아버지됨'. 남성 양육자는 능숙한 모습보다는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에이도스 제공


남성의 육아 본능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건 비교적 최근이다. 남성은 선천적으로 여성보다 양육에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 그만큼 공고했기 때문이다. 캐나다의 여성 과학자 캐서린 윈-에드워즈와 앤 스토리는 1990년대 말, 실험을 통해 여성만큼 남성에게도 양육자로서의 본성이 있다는 생물학적 단서를 포착한다.

이들은 예비 아빠 31명을 대상으로 아기의 출생 전후 혈액 샘플을 채취했다. 그 결과 파트너가 출산하기 몇 주 전, 예비 아빠들에게도 모유를 촉진시키는 모성 호르몬인 프로락틴 수치가 상승했다. 또 아버지가 된 후에는 공격성에 영향을 미치는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급격히 떨어졌다. 이 결과는 2000년 '갓 아버지가 된 남성과 곧 아버지가 될 남성의 양육 반응과 호르몬 사이의 상관관계'라는 이름으로 전문 학술지인 '진화와 인간행동'에 게재됐다. 과학사가 드디어 '양육하는 남자'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저자는 손주와 친밀한 시간을 보낸 후 자신과 남편 모두에게서 옥시토신이 급증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확인한다. 에이도스 제공


저자도 아기를 돌볼 때 분비되는 호르몬은 성별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다. 그는 남편과 본인 모두 손주와 함께 시간을 보낸 후 타액에서 '사랑의 호르몬'이라고 알려진 옥시토신 수치가 전에 비해 63%나 증가한 것을 확인한다.

이런 현상은 혈연 관계에서만 발생하는 것도 아니었다. 브라질에서는 이를 활용한 흥미로운 정책이 나온 적이 있다. 2010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슬럼가 범죄를 소탕하던 경찰이 종종 거리의 아이들을 총으로 쏘는 일이 발생했다. 시는 대책으로 경찰들이 빈민가 보육원에서 아이들을 돌보게 했다. 그 결과 경찰들의 호전성이 줄어들었다. 아이들에게도 부드럽게 대했다.

저자는 "지금까지 본 정책 중 가장 동물행동학적으로 통찰력 있는 방안"이라고 말한다. 공격적으로 보이는 남성도 양육자로서의 자질은 충분하며 '아기와 얼마나 친밀하게 오랜 시간을 보냈는지'가 양육의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아버지의 시간'의 저자 세라 블래퍼 허디 미국 캘리포니아대 데이비스 캠퍼스 인류학과 명예교수. 허디는 평생을 여성(암컷) 행동을 진화론적으로 새롭게 해석하는 데 학자로서의 경력 대부분을 보낸 모성 연구의 대가다. 에이도스 제공


'더 독한 남성성' 부르짖는 지금...



현대 사회에서 남성의 육아 참여는 갈수록 높아지는 추세다. 여성 지위 향상과 경제 활동의 확대 등에 따른 결과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더 독한 남성성"을 부르짖는 백래시를 일으켰다. 저자가 이 책에서 "남성의 돌봄 본능을 깨우는, 남성성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남자는 가장 사나운 동물'로서, '끝없는 전투 속에서 승리하거나 패배하는 존재'라고 말하는 사람이 미국의 대통령(도널드 트럼프)으로 선출"된 지금 시의적절한 주장이다.

다만 책의 감수를 맡은 박한선 서울대 인류학과 교수의 지적대로 "(육아에 대한) 자연주의의 오류(자연적인 남성의 천성이므로 따라야 한다는 오류)를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현대 남성의 무궁한 '육아 잠재력'을 다양한 생물학적 자료로 정당화하려 애쓰는 과정에서 다시 같은 오류에 빠지고 있다"는 점은 한계다. 돌봄 본능이라는 거창한 생물학적 증거를 들먹이지 않아도, '남성도 엄마와 당연하게 육아에 동참해야 한다'는 명제가 그냥 참일 수는 없을까. 원제는 'Father Time'. 부제는 '남성과 아기의 자연사(A Natural History of Men and Babies)'.

아버지의 시간·세라 블래퍼 하디·김민욱 옮김·에이도스 발행·542쪽·2만6,000원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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