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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병력의 규모가 중요하지만, 과거와 비교한다면 군의 전력은 보유한 무기의 양과 질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해군도 마찬가지다. 운용 중인 군함으로 해군력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전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 하는 패권국은 군함 획득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런데 군함은 유사 이래 현재까지도 가장 비싼 축에 속하는 무기다. 해군력을 확충하고 유지하는데 비용이 많이 든다.

그래서 종종 나라 살림에 주름을 주기도 한다. 이 때문에 외교적인 방법으로 경쟁국과 타협하고 해군력을 유지하는 경우도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경제 사정이 급속히 나빠진 영국이 지난 400년간 장악해 온 바다에서의 패권을 계속 유지하기 어렵다고 보고 다자간 군축 조약을 통해 미국에게 공동 1위 국가의 자리를 용인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보다 역사에는 경쟁의 사례가 흔하다.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가 참가한 1922년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식. 이때 영국은 앞으로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보고 미국이 공동 1위 해군국이 되는데 동의했다. 위키피디아

특히 강력한 세력 간에 대립이 심각하면 경쟁의 정도는 상당히 치열하다. 20세기만 해도 초반에 있었던 영국과 독일의 건함 레이스,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의 해군력 경쟁이 대표적이다. 필연적으로 경제적 어려움이 동반했다. 초강대국이었던 소련이 몰락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미국과 벌인 군비 레이스였다. 당시 소련 해군은 단기간 내 세계 2위로 급속히 성장했으나, 경제에 커다란 짐이 되었다.

이처럼 한번 경쟁이 시작되면 멈추기 힘든 이유는 군함 고유의 특성 때문이다. 군함은 비용을 차치하고 일단 획득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므로 설령 총력전이라도 소모된 전력을 즉각 보충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그렇기에 평시 충분한 전력을 구축해놔야 한다. 그런 상태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양측이 팽팽한 상태로 맞서며 싸움이 장기화하면 공급 능력의 차이가 우열을 가르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1943년 4월 진수식을 앞둔 호위함모 카사블랑카함(오른쪽). 옆에서 동급 함이 동시에 건조 중인데, 3년 동안 무려 50척이 지어져 전선에 투입됐다. 이처럼 무기의 공급 능력은 전쟁의 판도를 좌우하는 중요 요소다. 위키피디아

핵무기 보유 국가들이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벌이는 대결 상황이라면 다르겠지만, 무기의 공급력은 전쟁의 방법이 확연히 바뀐 현대에 서도 여전히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요소다. 2022년 일어난 우크라이나 전쟁은 야포처럼 구닥다리로 취급하던 무기가 여전히 효과가 크고 많을수록 좋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하다못해 러시아도 북한에서 재래식 무기를 도입할 정도다. 이처럼 무기의 생산 능력은 대단히 중요하다.

1942년 6월의 미드웨이 해전이 태평양 전쟁의 분수령이 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반년 전 일본 해군의 진주만 기습으로 전쟁이 시작했을 당시 미 해군은 심각한 타격을 입고 전략적 수세에 몰렸다. 미국이 즉각 전시 체제로 전환해 대대적인 건함에 착수했어도 결과물이 나오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만일 가까운 시일 내 다시 치명적인 일격을 당한다면 결코 승전을 결코 장담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미드웨이 해전 당시 미군의 공격을 받고 불타는 침몰 직전의 일본 항모 히류. 이때 일본은 일거에 네 척의 항모를 상실하면서 이후 공세에 적극적으로 나오기 어려웠다. 미국이 전력을 보충할 때까지 천금 같은 시간을 벌었던 역사적인 대승이었다. 위키피디아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비록 한 척의 항모를 상실했지만, 네 척의 일본 항모를 일거에 수장시키는 엄청난 대승을 거뒀다. 미국은 전시 물자가 대거 쏟아지기 전까지 천금 같은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고, 결국 이는 승전으로 가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래서 1944년 레이테만 해전처럼 규모로는 더 큰 격전도 있지만, 전쟁사에서 미드웨이 해전이 차지하는 의의는 실로 대단하다.

개전과 동시에 전시 체제로 전환한 미국의 생산력은 어마어마했다. 정규 항모만 보자면 7척으로 전쟁을 시작했으나, 종전 직전까지 에식스급 24척을 만들어 배치했다. 일본도 7척으로 시작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종전 때까지 추가로 전선에 투입한 정규 항모는 4척에 불과했다. 3년 동안 50척이 공급된 카사블랑카급 호위 항모의 경우는 평균 일주일에 한 척꼴로 취역이 이뤄졌다.

1944년 필리핀 인근 해역에서 전투를 마치고 정박 중인 6척의 에식스급 항모. 당시 미국의 엄청난 생산력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진이다. 위키피디아

기타 함정의 격차는 더욱 컸다. 대륙을 연결하는 다리가 됐다는 소리를 들었던 리버티급 수송함은 4년 동안 무려 2710척이 건조됐다. 아무리 구조가 간단한 수송함이라도 만재배수량 1만 4000t 규모의 배를 짓는데 평균 24일 걸렸다. 불과 4일 15시간 30분 만이라는 경이적 완공 기록도 있었다. 제작 시간이 오래 걸리는 함정이 이 정도니 여타 무기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미국의 이런 능력은 승전의 가장 중요한 밑바탕이었다.

냉전 시기에도 미국의 군함 공급 능력은 여전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20세기 말 냉전이 종식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배타적인 존스법으로 보호받고 있어도 일반 선박 분야는 경쟁력을 완전히 상실했을 정도로 미국의 조선업이 쇠퇴한 것이다. 군함 발주에 전적으로 의존하다시피 하는 뉴포트 뉴스 조선소처럼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일부 사업장도 있지만, 이 또한 생산성이 처참할 정도로 낮고 기존 함정의 유지보수도 애먹는 상황이다.

올해 취역 예정인 미 해군의 최신 항모 CVN-79 존 F. 케네디함. 전통의 뉴포트 뉴스 조선에서 10년 동안 건조됐다. 위키피디아

만일 미국이 소련 붕괴 후 차지한 유일 초강대국의 지위가 여전히 굳건하다면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은 냉전 종식 후 군축을 했어도 여전히 세계 1위일 만큼 지금까지 구축해 놓은 전력이 엄청나기에 노후 함정만 시간에 맞춰 교체하면 충분히 해군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1세기 중국이 G2로 거론될 정도로 급성장한 경제력을 발판으로 해군력 확충에 나서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패권국은 후발 주자의 도전을 받으면 경쟁을 불사하며 우위를 유지하려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20세기 초 영국처럼 미국은 지금 해군력 확충에 나서야 할 시점이다. 문제는 현재 미국의 능력으로 적기에 필요한 군함의 획득이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점이다. 한때 연합국의 병기창 노릇을 하던 어마어마한 생산 능력은 어느덧 과거의 일이 됐고, 당장 그 시절로 회귀할 방법도 없다.

대량 건조 중인 중국의 구축함. 아직은 미국이 세계 1위 해군국이지만, 지금 같은 중국의 전력 증강 속도면 앞으로도 그런 자리를 계속 고수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웨이보

그러면서 최근 미국이 조선업의 강자인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이 뜨거워지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현재 미국의 동맹국 중 한국과 일본만이 미국이 필요로 하는 군함을 즉시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 중이다. 특히 한국의 경쟁력이 뛰어나다. 일단 군사 기밀과 그다지 관련 없는 비전투함의 MRO를 국내 조선사에 의뢰하며 간을 보기 시작했는데, 이는 그만큼 미 해군이 급한 상황이라는 의미다.

트럼프 정부의 적극적인 요청에 따라 한국의 조선사가 미 해군 군함 건조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장밋빛 보도가 나오지만, 이미 바이든 정부 당시 미 해군 장관이 방한해서 조선소를 시찰했을 만큼 오래전부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건조를 의뢰해도 군함에 대한 미국의 자존심이 워낙 강하기에 한국 내 제작이 아니라 한국 조선사가 미국 현지에 투자해서 건조하라는 조건이 될 가능성이 크다.

2024년 2월 HD현대중공업을 방문한 카를로스 델 토로 미국 해군 장관. 이처럼 미국의 관심은 오래됐지만, 국내에서 미 군함의 건조가 이루어질지는 미지수다. HD현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제조업의 부활을 외치는 것과 별개로 AV-8 전투기, M9 권총의 사례처럼 미군은 외국산 무기를 도입할 때 반드시 미국 내 생산·납품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관세 다툼에서 보듯이 현재 미국 정부는 중국을 가장 적대적인 세력으로 보고 있다. 당연히 중국 해군의 부상을 억제할 필요가 있고 현실을 고려하면 어떻게든 한국의 참여 이루어질 것이 확실해 보인다. 과연 어떤 식으로 교통정리될지 궁금해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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