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마지막 7인, 그 곁의 기록]
② 생존자 강일출 할머니의 곁
나눔의집에서 요양병원까지 모신 간호사
"조금이라도 평온하도록" 정성으로 간호
"10대 시절 짐작돼... 가슴이 미어지기도"
"모든 걸 떠나서 이제는 가벼워지셨으면"
② 생존자 강일출 할머니의 곁
나눔의집에서 요양병원까지 모신 간호사
"조금이라도 평온하도록" 정성으로 간호
"10대 시절 짐작돼... 가슴이 미어지기도"
"모든 걸 떠나서 이제는 가벼워지셨으면"
편집자주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이제 7명 남았습니다. 세계 곳곳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약 2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는데, 국내에 신고·등록된 피해자 수는 고작 240명(2022년 기준). 대부분이 제대로 된 일본의 사과도 배상도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지요. 남은 일곱분의 할머니도 평균 나이 95.7세입니다. 긴 세월 싸워온 할머니들과 이들의 곁을 지킨 이들을 만났습니다.지난 1일 경기 의왕시 청계마을 다함께돌봄센터 내 교육실에서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강일출 할머니 등을 돌봤던 배승주(가명) 간호사가 한국일보와 인터뷰 도중 눈물을 닦고 있다. 의왕=최주연 기자
"할머니들이 해맑은 표정을 지으실 때가 있는데 '고통 없는 10대였다면 이런 표정이었을까' 싶었어요. 그러면 생각이 밀려들어서···."
내내 눈가가 일렁이던 배승주(가명)씨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는 강일출(97) 할머니를 포함해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이 경기 광주 나눔의 집에서 지낼 때 이들의 건강 상태를 가장 가까이에서 살폈던 간호사다. 그럼에도 그는 "할머니를 모신 기간이 그리 길지 않은데 인터뷰에 나설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며 끝까지 주저했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할머니들에게 진심을 다했는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배씨를 만나기 며칠 전, 강씨의 큰딸 쉬유란(가명·63)씨는 "우리 엄마를 끝까지 돌본 그 간호사(배씨)의 정성이 대단했다"며 칭찬을 거듭했다. 그 얘기를 전하자 배씨는 쑥스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
"평생 몸과 마음이 아프셨으니 조금이라도 평온하셨으면 해서요."
바쁜 간호사까지 챙겨 먹여... "손자 챙기는 할머니 같아"
지난 1일 경기 의왕시 청계마을 다함께돌봄센터 내 교육실에서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강일출 할머니 등을 돌봤던 배승주(가명) 간호사가 강 할머니와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의왕=최주연 기자
배씨는 강씨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리더니 "제게 그닥 반응이 없으셨던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배씨가 나눔의 집에 갔을 무렵, 할머니들은 이미 거동이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을 정도로 건강 상태가 악화돼 있었다. 그때 강씨도 서울아산병원 입·퇴원을 거치며 기력이 쇠해 있었던 탓에 배씨를 반길 여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강씨는 늘 주위에 관심이 많고 살뜰했다. 각종 간호 업무로 바삐 움직이는 배씨를 누운 채 지켜보다가 돌연
"너도 여기 같이 눕자"
고 하는 식이었다. 배씨는 "(그 말이) '너도 이리로 와서 좀 쉬어라'라는 뜻으로 들렸다"며 "종종 자신이 먹던 과일 등을 나눠주시면서 같이 먹자고 챙겨줄 때도 있었는데 손자를 챙기는 여느 할머니 같았다"
고 했다.배씨 역시 강씨를 친할머니 대하듯 돌봤다. 강씨가 불편할 때마다 짓는 특유의 찌푸리는 표정을 먼저 알아채 베개를 다시 정돈했고, 혈당 조절을 위해 식이 관리도 도왔다. 그러다보면 불현듯 강씨의 10대 시절을 짐작해볼 때도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함부로 하면 안 될 것 같으면서도 혼자 가슴이 미어질 때가 있었어요. 일찍 고초를 겪고 말년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힘드셨을까."
할머니가 나눔의 집을 떠나고도... 끝까지 살핀 간호사
2019년 1월 경기 광주시 소재의 위안부 피해자 쉼터인 나눔의 집에 거주하던 강일출 할머니. 당시 91세였다. 현재는 치매 증상이 심해져 요양병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강씨는 나눔의 집에 대한 애착이 컸다고 한다. 외래 진료를 보거나 외출을 할 때면 "집으로 가자" "집에 가고 싶다"라며 나눔의 집을 고향집처럼 찾았다. 배씨는 그런 강씨를 보며 '좋아하시는 나눔의 집에서 여생이라도 편히 보내도록 돕겠다'고 자주 다짐하곤 했다.
2023년 12월을 기점으로 강씨의 폐렴 증상이 심해졌다. 구토와 가래량이 늘어 응급실을 찾아야 하는 위급상황도 잦아졌다. 의료인으로선 당장 나눔의 집을 떠나 요양병원으로 옮기는 걸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배씨는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어떤 게 할머니가 더 원하는 방향일지 계속 고민이 들어 심경이 복잡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강씨가 경기 성남의 한 요양병원으로 옮겨지고 나서도 배씨는 강씨 병원을 지속적으로 방문했다. 초반에는 그의 건강 상태를 지속적으로 살펴야 한다는 업무상 이유에서였지만 나중엔 그저 강씨가 잘 지내는지 궁금해 한두 번을 더 찾았다. 배씨는 "내가
어느덧 할머니를 환자 이상으로 생각해 왔다는 걸 느꼈다
"고 했다.'위안부' 피해 회복을 위한 바람을 묻자, 배씨는 일본의 사과·배상이나 국민 관심 촉구 등을 건너뛰고
"할머니들이 이제는 모든 걸 떠나서 그저 가벼워졌으면 좋겠다"
고 답했다. 생존자들이 생의 끝자락에서 아파하는 모습을 거듭 마주한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