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와이드 인터뷰] 윤평중 교수가 말하는 시대정신

87년 체제는 끝났다…개헌 통한 권력 분산이 유일한 출구
공화는 자유·민주 통합하는 시대정신…다음 대선이 분기점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거리 정치·유튜브 포퓰리즘에 맞서야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경기 성남 수정구의 카페 커도의 서재에서 월간중앙과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윤석열 정부 출범 초기 윤 전 대통령의 국정철학 부재와 오만한 행보를 지켜보며 “어둠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견한 바 있다. 최기웅 기자
윤석열 정부는 강력한 지지와 동력을 갖고 출범했다. 하지만 그때 이미 “곧 어둠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고한 인물이 있다. 정치철학자 윤평중 한신대 명예교수다.

그는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자신의 당선이 ‘시대정신’의 산물임을 자각하지 못했고, 왜 자신이 선택됐는지에 대한 성찰을 끝내 외면했다고 지적한다. 오히려 광범위한 정치 연합으로 형성된 지지 기반을 ‘혼자서 일군 것’이라 오판하며 스스로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그 예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윤 정부는 퇴행했고, 결국 12·3 친위 쿠데타라는 극단에 이르렀다.” 윤 교수의 진단이다.

그는 이제 탄핵 이후 드러난 한국 사회의 어지러운 풍경에 주목한다. 심화된 사회 양극화와 정치 팬덤의 극단화, 대의정치를 압도하는 거리 정치와 유튜브 선동, 그리고 레거시 미디어의 약화를 틈타 급부상한 디지털 공론장. “그 안에서 자라나는 포퓰리즘은 결국 우리 사회의 기반을 허무는 ‘폭민정’의 전조다.”

대한민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탄핵 이후 정치적 진공 속에서 우리가 새롭게 붙잡아야 할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경기 성남 모처에서 윤 교수를 만나 질문을 던졌다.


Q : 헌재가 파면을 선고하는 순간 어떤 생각이 들었나?

A :
“한국 현대사의 심판이 내려졌구나. 윤석열 전 대통령은 비상계엄 선포를 비상대권이라는 말로 포장했다. 이는 군사 권위주의의 흔적이 깊게 배어든 개념이다. 6공화국 출범 이전의 보수로 윤 전 대통령은 회귀한 것이다. 헌재는 이를 겨냥해 국가긴급권 남용이라고 지적했다. 결정문은 전체적으로 대단히 질서정연했다. 이로써 12·3 친위 쿠데타 사태는 윤 전 대통령이 한국 현대사의 문명적 공통규범을 폭력으로 파괴하려다 국민과 역사에 의해 퇴장 선고를 받은 것으로 귀결됐다.”


6공 이전의 군사 귄위주의로 회귀한 윤석열

Q : 윤석열은 집권 내내 ‘자유’를 강조했는데, 정작 군사조치를 택했다.

A :
“6공화국 이전 보수는 군사 권위주의 체제였고 자유민주주의는 국시용 구호에 불과했다. 엄밀히 말해 냉전 반공주의와 결합된 왜소한 자유주의였다. 6공화국 출범 후 우리나라는 보수와 진보 정권이 번갈아 집권하는 수평적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이는 민주공화정이라는 체제에 대해 거대한 헌정적 합의를 한 결과였다. 그러면 6공화국에서 한국 보수는 자기 쇄신에 나서야 했다. 이전까진 자본 축적을 위해 개발독재시대가 불가피했다는 시대적 한계가 있었지만, 이때부터는 성숙한 자유민주주의를 실천해야 했다.”

Q : 그렇다면 한국 보수는 언제까지 나아가고 언제부터 퇴행했다고 보는가?

A :
“사실 그 출발점이 3당 합당이었다. 정치공학적으로 비판받을 순 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을 보수의 자기 쇄신 시도로 평가한다. 군사독재 시절의 후예들, 즉 권위주의 보수가 민주화 세력과 타협하고 연합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김영삼 정부에선 작지 않은 성과가 있었다. 하나회 척결로 군부가 더는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완전히 선을 끊었다. 금융실명제를 실시해 과거부터 축적된 정경유착 고리를 해소하는 데 일조했다. 이게 자유민주주의로 가는 보수의 출발점이었다고 본다. 또한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는 분들도 있지만 분명 한국 보수의 지평을 확대하는 데 기여한 측면이 있다. 냉전 반공주의를 희석하고 시장보수로의 경제적인 합리성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근혜와 윤석열 정부는 퇴행 일로를 걸었다. 냉전 반공주의와 천민자본주의로 회귀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가 4월 11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를 떠나 서초동 사저로 이동하며 지지자들과 인사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적대 정치의 파국으로 불거진 비상계엄

Q : 윤 전 대통령은 집권 내내 자유를 강조했는데, 시대와 어긋났던 건가?

A :
“윤 전 대통령이 강조한 자유주의는 자유민주주의의 역사적 함의를 전혀 반영하지 못했다. 자유와 민주는 원래 출발부터 다른 개념이다. 그래서 자유에다가 민주적 평등의 요구를 통합한 것이 개혁자유주의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의 자유는 민주주의가 빠진 반쪽짜리였다. 그저 프리드먼과 하이에크를 좇았다. 작금의 한국 사회 요구나 시대정신과도 맞지 않는 퇴행적인 이야기였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다음 날인 2024년 12월 4일 국회로 진입하려는 군인들을 국회 보좌진과 시민들이 막고 있다. 김성룡 기자

Q : 하지만 이번 탄핵에선 민주당의 책임도 크다는 지적이 있다.

A :
“일각에선 12·3 사태를 민주당이 유발했다고 하는데, 그게 정확한 진단이다. 적대적 진영 대립이 폭발한 게 바로 12·3 사태다.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진보 좌파 세력은 ‘적 아니면 동지’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에 입각한 정치를 해왔다. 정치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 이념의 차이를 넘어 국민 전체를 위한 실용적 합의점을 찾는 과정인데, 진보좌파는 자신들만 정의에서 있고 보수 진영은 불의를 상징하는 세력으로 보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보수에 대해 정치 질서를 구성할 파트너로 보는 인식이 극도로 희박하다. 상대를 절멸시키려는 전쟁 정치에 매몰돼 있다. 총 서른 번의 탄핵 소추가 그걸 증명한다. 이건 한국을 민주좌파로 만들겠다는 시도였다.”

Q : 진보좌파의 정치적 성격은 언제부터 달라졌다고 보는가?

A :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불행한 죽음이 계기였다. 보수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노 전 대통령을 부당하게 탄핵하려 했다. 이후 총선에서 민주당에는 통제가 안 되는 운동권 인사들이 108명이나 유입됐다. 이들은 보수를 건국과 산업혁명의 중요한 공헌자이자 정치적 경쟁자로 보는 게 아니라 척결 대상인 악의 세력으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이는 독재정권에 맞서 싸운 민주화 운동권의 멘털리티에서 비롯된 경로의존성 때문이다. 여기에 이명박 정부의 탄압으로 인한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은 진영 대립을 증오와 원한으로 바꿔 놓았다.”

Q : 12·3 사태 전까지 한국 사회는 어떤 상태였다고 판단하는가?

A :
“보수와 진보는 수평적 정권 교체를 반복하며 민주공화정이라는 체제를 함께 유지해왔다. 그것이 제가 말하는 ‘현대 한국 문명의 공통 규범’이다. 정치적 과열은 늘 있었지만, 12·3 사태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산업혁명과 민주혁명을 모두 이뤄낸 세계사적으로 유일무이한 국가였다. 경제적으로도 세계 10대 무역 대국 반열에 올라 있었고 문화적으로도 K-컬처의 부상이 두드러졌다. 모든 게 고조되던 시점이었다. 단 하나, 정치만 빼고는.”
4월 4일 헌법재판소가 윤석열 대통령 탄핵 사건에 대해 인용 선고를 했다. 탄핵 소추 111일, 변론 종결 38일 만이다. 사진은 2023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제44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윤 전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 [연합뉴스]


낡은 옷 벗고 새 틀을 짜야 할 때

Q : 87년 체제가 이제 수명이 다했다는 주장에는 어떤 입장인가?

A :
“한국 정치의 양 극단이 충돌하며 체제가 파열됐다. 이로써 좌우를 막론하고 개헌의 필요성에 대한 공론이 광범위하게 형성되고 있다. 6공 체제는 더 이상 21세기 대한민국을 담아낼 수 없다. 몸은 어른인데 어린 시절 옷을 계속 입고 있는 격이다. 정치학회를 포함한 여러 연구기관에서 개헌 논의는 이미 축적돼 있고 지식인 사회 내에서는 3~4개의 주요 개헌안이 정립돼 있다.”

Q : 어떤 모델을 구상하는가?

A :
“현실적인 가능성은 차치하고 개헌 모델이 가장 바람직하다. 권력 분산을 담아낸 형태다. 지금처럼 제왕적 대통령제에 과도하게 집중된 권한을 내각책임제적 요소로 나눠야 한다. 국무총리의 위상을 강화해 책임총리로 기능하게 하고 장관 역시 책임장관으로 세워야 한다. 사실 우리 헌법을 보면 대통령의 인사도 내각을 통해야 한다. 대통령 비서실은 명시돼 있지도 않다. 헌법상 행정부 운영의 주체는 대통령 비서실이 아니라 국무회의이며,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명을 받아 내각을 통할하는 구조로 돼 있다. 하지만 현실의 대통령제는 이러한 헌법 정신을 완전히 위배한 채 운영돼 왔다. 그래서 제왕적 대통령제가 등장한 것이다. 이걸 분산해야 한다는 데 좌우 불문한 합의가 존재한다. 책임총리, 책임장관제를 활성화해야 한다.”

Q : 국회가 너무 막강해졌다는 지적도 있는데?

A :
“6공 출범 당시 군사독재의 망령을 제어하려는 의도에서 국회 권한이 확장됐다. 그래서 국회의 탄핵소추권은 있지만 대통령의 국회해산권은 삭제됐다. 또한 과거의 군사 권위주의적 망령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불균형한 조치들도 들어갔다. 결과적으로 대통령은 국회의 독주와 횡포를 전혀 제어할 수 없는 불균형한 구조가 됐다. 이중 권력 상태에서 양쪽 권력의 폭주가 어떤 파국을 부르는지 이번 정부에서 확인됐다. 개인적으론 내각책임제 요소를 도입하면서 대통령에게 국회해산권을 부여하는 것도 균형에맞는 조치라고 본다. 국회가 행정부 고위직을 무제한 탄핵하는 데 대한 제한도 필요하다. 어떤 권력이든 남용과 오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민주적 통제와 분산은 반드시 필요하다.”

Q : 내각제가 실현되려면 선거법도 손봐야 한다는 데 동의하는가?

A :
“그렇다. 개헌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선거법 개정이다. 개헌 논의가 공감대를 확장하는 이유 중 하나는, 전쟁 정치가 된 현재의 틀을 깨기 위한 것이다. 공정과 상식의 정치 틀을 마련하려면 선거법을 바꿔야 한다. 지금의 소선거구제는 승자독식이 가능하도록 구조화돼 있는데 이를 중대선거구제로 전환해야 한다. 형식적으로 존재하는 비례대표제 역시 내실화가 필요하다. 비례대표 의원 수를 대폭 늘려야 하며 전체 국회의원 수도 증원해야 한다. 지역구 의원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지역구는 그대로 두고 비례만 늘리는 방식이 현실적이다. 상하 양원제 도입도 개헌과 함께 논의해야 할 사안이다.”

Q : 국회의원 숫자 늘어나는 걸 반가워할 국민은 없을 텐데.

A :
“안다. 국민들이 반대할 수밖에 없다. 최소한의 조건으로 국회 총예산을 동결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기간도 못 박아야 한다. 국회가 입법권을 이용해 자기들 보수를 올리는 현실을 고려할 때 여야 합의로 예산 증가를 30년간은 금지하는 규정이 필요하다. 동시에 국회의원에게 부여된 200여 개의 특권도 일괄 폐지해야 한다. 이것이 국회의원 정수 증원의 전제 조건이다. 선거법 개정은 적대적 진영 대립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즉효약이 될 수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처리되던 날 국회 본회의장의 모습. 의장석을 점거하고 있던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국회 경호원과 야당 의원들에게 끌려 내려오고 있다. [중앙포토]


광장 정치의 신격화는 위험하다

Q : 현재 유력한 대권 후보는 이재명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다. 하지만 개헌에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A :
“개헌이 늘 좌절된 이유는 차기 유력 대권 주자가 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재명 전 대표도 과거 대선 당시에는 4년 중임제를 포함한 개헌안을 거론했으나 지금은 내란 진압이 먼저라며 개헌 요구를 거부한다. 우리가 익숙하게 봐왔던 과거의 반복이다.”

Q : 이재명 체제가 과연 대한민국 정상화에 기여할까, 또 다른 위기를 불러올까?

A :
“그의 민주당 대표로서의 행보는 ‘이재명 포비아’의 현실적인 근거가 된다. 민주당은 김대중과 노무현의 정통을 잇는 민주 정당이지만 지금은 이재명 유일 체제로 퇴행했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탄핵 국면에서 신중한 태도로 재조명됐지만 개헌을 제안하자 이재명 지지층에 의해 ‘사문난적’(斯文亂賊) 취급을 받았다. 이를 통해 민주당이 다원성과 토론이 사라진 유일 체제로 전락했다는 걸 실감했다. 또한 윤석열에게는 이념이 없었지만 이재명에게는 ‘기본소득’과 ‘기본사회’라는 체계적 캐치프레이즈가 있다. 그렇기에 이재명 포비아는 대단히 구체적인 불안이다.”
이재명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4월 10일 21대 대통령 선거 출마 영상을 공개했다. 이 전 대표의 국가 비전을 이야기하는 인터뷰 형식을 차용한 영상에서 이 전 대표는 ″진짜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며 ‘경제성장’, ‘먹사니즘’, ‘잘사니즘’ 등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실용주의와 신속성을 강조했다. [사진 이재명 캠프]

Q : 진영을 막론하고 ‘거리의 정치’가 재등장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중심이 제도에서 광장으로 이탈하는 현상을 어떻게 보는가?

A :
“거리 정치, 광장 정치의 순기능은 분명히 있다. 제도 정치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을 때 광장의 생생한 에너지가 제도 정치를 본 궤도로 돌려놓는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2016년 촛불이 대표적 사례다. 하지만 광장 정치를 신성시하거나 신화화하는 데는 반대다. 광장 정치는 장기적으로 지속하기 어렵다.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가 근대 대의민주주의로 바뀐 데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국가가 커지며 직접민주주의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졌지만 보다 본질적인 한계가 있었다. 대의민주주의, 정당민주주의는 국민의 의사를 정당이 대변하는 구조다. 정당과 정치 엘리트는 서로 다른 입장을 조율하고 토론과 협의, 타협과 중재, 상호 양보를 통해 국민 전체의 이익을 도출한다. 이는 다수결에 기댄 감정 과잉으로 치닫는 중우정치로의 퇴행을 막기 위한 장치이며, 아테네의 자멸이 그 교훈이다. 광장 정치와 정당 정치, 의회정치는 변증법적 관계다. 광장에서 ‘우리 목소리가 전부다’라고 주장하는 건 논리적 비약이다. 광장에 100만 명이 나왔다 해도 참여하지 않은 나머지 국민의 의사는 어디에 있는가.”

Q : 한국 정치의 공론장은 유튜브와 SNS로 완전히 대체됐다. 검증되지 않은 루머가 팩트로 유통되고 여론을 좌우한다.

A :
“유튜브를 중심으로 한 디지털 공론장의 왜곡 현상이 대표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유행시킨 ‘얼터너티브 리얼리티’, 즉 대안 현실은 가짜 현실이다. 가짜 뉴스가 만든 허위 정보가 진짜 현실을 압도하는 현상이다. 원인은 레거시 미디어와 뉴미디어의 역전현상이다. 레거시 미디어의 현실 영향력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반면 팟캐스트와 유튜브 등 뉴미디어는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건 불가역적 흐름이다. 기술의 역전이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바꾸기 어렵다. 결국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다.”


레거시 붕괴 위에 선 유튜브 우중정치(愚衆政治)

Q : 정치 유튜브 채널의 영향력도 세지고 있다.

A :
“지금 종이 매체, 특히 신문과 잡지의 현실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김어준 씨 유튜브 채널 방송의 동시 접속자는 21만 명까지 나온다. 개인이 운영하는 시사 정치 유튜브 채널로는 세계적으로도 상위권이다. 그런 영향력 덕분에 이제는 민주당 좌파 진영의 상왕으로 군림하고 있다. 더 개탄스러운 건 헌법기관인 국회의원들까지 그의 방송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장면이다. 이 현상을 설명하려면 개념적인 도구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디지털 공론장’이다. 지금은 디지털 공론장의 영향력이 팽창하고 있으며, 김씨는 가장 극단적인 예시다.”

Q : 디지털 공론장이 결국 포퓰리즘의 통로가 되는 것 아닌가?

A :
“제가 걱정하는 게 거리 정치와 디지털 공론장은 떼어놓을 수 없다는 점이다. 디지털 공론장은 광장 정치의 순기능도 있지만, 대표적인 역기능 중 하나가 포퓰리즘적 속성이다. 김씨의 영향력이 증명하는 사태 중 하나가 바로 디지털 포퓰리즘의 위험성이다. 민주주의는 포퓰리즘적인 속성을 내재하고 있는데, 오늘날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확산이 포퓰리즘의 발현 양상을 디지털로 전환하고 있다. 김씨의 민주당 내 상왕적 위치는 디지털 공론장이 디지털 포퓰리즘으로 변용되고 확장된 결과다.”

Q : 지금 현상이 우중정치의 시작이라고 보는가?

A :
“단순히 우중정치의 위험만 높이는 게 아니라 21세기 버전의 폭민정(ochlokratia)으로 악화될 수 있다고 본다. 시민이 폭민이 되는 징후는 분명하다. 기존의 사회적 규범과 충돌하면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고 물리력으로 자기 확신을 관철하려는 행태가 그렇다. 헌재의 탄핵 선고 과정에서도 좌우를 막론하고 ‘입맛에 맞지 않으면 승복하지 않겠다’는 태도가 높게 나왔다. 모두가 ‘정의 실현’이란 자기 정당화를 밑바닥에 깔고 있겠지만, 그 이면에는 디지털 포퓰리즘의 퇴행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폭민정으로 악화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크다. 폭민정으로의 퇴화 가능성은 좌우 모두에 존재한다는 게 제 판단이다.”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탄핵 정국 이후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은 단연 ‘공화혁명’이라고 강조했다. 최기웅 기자


민주와 자유의 충돌을 넘는 공화의 시대정신

Q : 탄핵 정국 이후 우리가 반드시 회복해야 할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A :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차기 대통령과 차기 정부를 포함해 앞으로의 대한민국 시대정신은 단연 ‘공화’라고 본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저는 현대 정치사상의 좌표를 삼각형으로 보는데, 밑변 왼쪽에는 ‘민주’, 오른쪽에는 ‘자유’, 꼭짓점에는 ‘공화’가 있다. 민주와 자유, 공화는 각기 다른 가치를 지향하면서도 상호 긴장과 조화를 요구한다. 한국의 보수우파는 이 중 자유를 자신의 화두로 삼아왔다. 하지만 윤 정부가 강조한 자유는 프리드먼식의 가진 자의 자유, 편협하고 왜소화된 자유였다. 반면 진보좌파는 민주를 중심 가치로 삼아왔다. 이것 역시 다수결에 의한 민주, 민중민주에 가까운 협소한 개념이었다. 저는 이 두 가치의 충돌을 넘어설 수 있는 상위 개념이 바로 공화라고 본다. 공화는 민주도 살리고 자유도 살린다. 이 둘 사이의 긴장을 조율하는 상위의 궁극적 가치다. 이제는 민주와 자유를 통합하는 공화의 시대정신으로 나아가야 할 때다.”

Q : 공화라는 시대정신의 뿌리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A :
“제가 ‘공화혁명’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미래의 시대정신이라고 강조하는 이유는 그 기원이 1919년 3·1운동에 있기 때문이다. 당시 전국적으로 일어난 3·1운동은 일본에 의해 강압적으로 진압됐지만 그 성취는 이후 100년 이상 한반도의 심층의식에 자리 잡게 된다. 같은 해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건국 임시헌장의 제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정으로 한다’고 선포했다. 당대 세계 기준으로도 매우 선진적인 선언이었다. 이후 임시정부는 5차례 개헌했고, 대한민국 헌법은 현재까지 9차례 개헌을 겪었다. 그런데도 한 번도 바뀌지 않은 문장이 있다. 바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조항이다. 유신 체제에서도 이 문장은 유지됐다. 저는 그렇기 때문에 공화혁명을 단지 막연한 이념이 아닌, 헌법적 연속성과 현실적 과제로 제시하는 것이다.”

Q : ‘민주공화국’이라는 개념의 핵심에 대해 말해달라.

A :
“법의 지배다. 다시 말하지만 법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법의 지배다. 통치자가 법을 수단화하는 게 아니고 모든 사람이 법에 지배받는 구조, 즉 법치주의다. 이와 함께 중요한 개념이 비지배 자유(nondominant freedom)다. 실질적인 자유와 보편적 인권을 보장하려면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완화하는 개혁 조치가 필요하다. 이것이 공화정치의 핵심이다. 공화는 민주와 자유라는 가치의 통합이며 그 본질은 비지배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한국인 DNA에 새겨진 공화주의 회복해야

Q : 공화혁명을 위해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할 건 무엇인가?

A :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공화정의 핵심은 권력의 분산과 균형이다. 고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혼합정의 정신이다. 지금 한국 정치는 대통령만이 아니라 국회, 야당 대표까지 제왕화돼 각자의 방식으로 전횡을 일삼고 있다. 이런 구조에선 어떤 권력이든 공화를 해친다. 여기에 정치 팬덤과 디지털 포퓰리즘까지 더해지며 21세기 폭민정으로의 타락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이 문제는 단순한 제도 개편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디지털 공론장은 기술 발전이 낳은 불가역적 현실이다. 체념하는 게 아니라 냉정하게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 근본적인 치유책은 성숙하고 균형 잡힌 시민 의식이다. 특정 정치인을 맹종하거나 자신의 신념만 절대화하는 태도가 지금의 적대 정치, 초토화된 정치 현실을 만든 배경이다. 책임은 정치인만의 몫이 아니다. 시민이 공민으로 변화하는 과정, 그것이 핵심이다. 이를 위한 시민교육, 사회교육은 공화혁명에서 언제나 강조되는 필수 조건이다. 진정한 애국심은 혈통이나 인종이 아니라 헌법정신에 대한 충성에서 나와야 한다. 부족주의적 애국심을 넘어서는 정치적 시민의식, 그것이 현대 공화주의가 요구하는 시대정신이다.”

Q : 다음 대선이 공화혁명을 현실화할 수 있는 분기점이 될 수 있을까?

A :
“공화혁명은 언뜻 추상적 이론처럼 들릴 수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저는 탄핵 정국 초반부터 헌정의 약속을 강조해왔다. 이것이야말로 공화혁명에서의 필수조건이자 충분조건이다. 현실 정치에서 강력한 동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래서 대선 후보들도 결국엔 화해와 상생, 공정과 통합을 주장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다음 대선이 포지티브 중심 캠페인이 된다면 그 내용은 결국 공화혁명의 구체적 실현으로 이어져야 한다. 공화는 단순한 정치철학이 아니다. 3·1 운동과 임시정부의 헌장 제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선포했던 역사적 선언이며 한국인 집단 무의식에 각인된 심층적 기억이다. 그 무의식은 일제강점기뿐 아니라 군사 권위주의 시대를 거치며 더 강화됐다. 그리고 12·3 사태라는 중대한 위기 속에서도 그것은 확인됐다. 헌재가 명시했듯 평화적으로 국회로 향한 시민들, 출동을 거부한 젊은 병사들 등 이들의 집단행동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정치적 DNA가 살아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개헌을 논하고 정치개혁을 추진할 때 이 정치적 DNA를 복원하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 이념을 넘어, 대한민국의 진짜 미래를 위해.”

안덕관 월간중앙 기자 [email protected] / 사진 최기웅 기자 [email protected]

중앙일보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48068 [속보] '고발사주 의혹' 손준성, 무죄 확정 랭크뉴스 2025.04.24
48067 [속보] 대법, '고발사주' 의혹 손준성 무죄 최종 확정 랭크뉴스 2025.04.24
48066 검찰, 문재인 전 대통령 등 뇌물수수 혐의 불구속 기소 랭크뉴스 2025.04.24
48065 [속보] ‘고발 사주 의혹’ 손준성, 대법서 무죄 확정 랭크뉴스 2025.04.24
48064 [속보] 검찰, 문재인 前 대통령 ‘뇌물 혐의’로 기소 랭크뉴스 2025.04.24
48063 [속보] '고발사주 의혹' 손준성 검사 무죄 확정 랭크뉴스 2025.04.24
48062 [속보] 검찰, 문재인 전 대통령 뇌물 공범 혐의 기소 랭크뉴스 2025.04.24
48061 안철수 “한덕수, ‘출마의 강’ 건너지 말라… 尹 재출마와 같아” 랭크뉴스 2025.04.24
48060 해외직구로 산 ‘키링인형’, 알고보니 발암물질 범벅 랭크뉴스 2025.04.24
48059 [속보] 검찰, 문 전 대통령 뇌물혐의 기소…옛 사위 특채 의혹 랭크뉴스 2025.04.24
48058 [속보]검찰, 문재인 전 대통령 뇌물수수 혐의 기소···전 사위 특혜채용 의혹 관련 랭크뉴스 2025.04.24
48057 1년 만에 55억 올라 '175억' 찍은 옆집…토허제에 안 묶였다는데 랭크뉴스 2025.04.24
48056 "곧 어린이날인데"···中플랫폼 완구서 가습기 살균제 성분 검출 랭크뉴스 2025.04.24
48055 [속보]검찰, 문재인 전 대통령 뇌물수수 혐의 기소 랭크뉴스 2025.04.24
48054 삼성전자, 갤럭시 Z플립·폴드7 뉴욕서 7월 초 공개한다 랭크뉴스 2025.04.24
48053 [속보] 검찰, 문재인 전 대통령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 랭크뉴스 2025.04.24
48052 [속보] 검찰, 문재인 전 대통령 뇌물 혐의로 기소 랭크뉴스 2025.04.24
48051 서울 지하철 5호선 하남검단산~상일동 30분 간 운행 중단 랭크뉴스 2025.04.24
48050 “일행 안 탔어”…열차 문 막고 출발 저지한 승객의 최후 [잇슈 SNS] 랭크뉴스 2025.04.24
48049 정용진 초청으로 트럼프 주니어 방한 소식에…신세계I&C 급등[줍줍 리포트] 랭크뉴스 2025.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