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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팔아넘긴 장물인데, 보물로 지정되었네요.”(장물업자 ) 2016년 7월 어느 날이었다.

경기북부경찰청 광역수사대 김창배 수사관(현 광역수사1반장)에게 “국가유산청이 보물로 지정한 유물이 사실은 장물이며, 그 유물이 경북 영천의 사설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 유물은 조선 형법의 근간이 되었던 <대명률>(명나라 법전)이었다.

<대명률>은 “부인이 간음죄를 제외하고는 홑옷을 입힌채 곤장을 맞는다”고 했다. 또 여성은 얼굴에 죄명을 새기는 자자형도 면제받았다.|국립민속박물관·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000만원 더 달라.’

국가유산청은 도난품인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국가유산청 사이트의 ‘도난문화유산 정보란’에 <대명률>은 도난품 목록에 지금도 올라 있다. ‘경주 류○○ 가문의 육신당’ 소장 유물 중 도난된 ‘성재문집 등 235점’(2011년 1월 신고) 중 1점이다. <대명률>은 도난유물 중 41번째(‘대명률 1책’)로 올라있다. 유물설명도, 사진도 없다. 정식 수사 끝에 그 전모가 밝혀졌다. 수사결과 1998년쯤 도난된 <대명률>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뒤 장물업자 에게 흘러들어갔다. 은 2012년 5~7월 사이 영천의 사설박물관장 에게 1500만원을 받기로 하고 팔았다.

강간죄의 처벌 수위는 엄했다. 강간은 교수형이고, 미수는 장 100 유형 3000리에 처했다. 강간남만 처벌했다. ‘12세 이하 여자’는 아무리 ‘화간’이라고 주장해도 강간으로 처리했다. 현장을 적발하지 않지 않으면 간음으로 처벌할 수 없었다.


조건이 있었다. 은 “이 책이 보물로 지정되면 유물의 가치가 오를테니, 그 때 1000만원을 더 달라”고 과 약속했다. 은 그렇게 구입한 장물을 개인 박물관에 전시해두었다. 측은 그 해 10월 “선친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라고 허위로 기재한 보물 지정 신청서를 제출했다.(2013년 12월) 국가유산청은 2년 여의 검토 끝에 그 가치를 인정, 2016년 7월1일자로 ‘보물’로 지정했다.

문제가 생겼다. 이 보물로 지정되면 에게 주기로 했던 1000만원은 물론이고, 기본 유물값인 1500만원도 다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불만을 품은 장물업자 이 경찰에 정보를 넘기고 협조한 것이다. 문화유산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박물관장 은 2022년 4월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3년의 확정 판결을 받았다. 그에따라 행정절차 상 ‘허위기재’가 문제가 된 <대명률>의 보물 지정도 취소되었다.

<대명률>은 이제 문화유산의 가치를 잃었다는 뜻일까. 그렇지는 않다. ‘해제’와 ‘취소’는 다르다. ‘해제’는 해당 문화유산의 가치를(가) 잃었거나 없어졌다는 의미다. 그러나 ‘취소’는 지정 과정에서 하자가 있어 내리는 행정처분이다. 그렇기에 추후에 원소장자가 신청하면 보물로 재지정될 수 있다.

이중결혼도 허락하지 않았다. <대명률>은 “본처가 있는데, 다시 처를 맞이하면 장90을 치고 (다른 처를) 이혼시킨다”고 했다. ‘본처를 첩으로 내리거나, 본처가 있는데 첩을 처로 삼아도 장 90대이며, 신분을 되돌린다’고도 했다.|국립민속박물관 소장 그림


<대명률>은 명 태조(주원장·재위 1368~1398)가 1367년 첫 간행한 명나라 형률서이다. 이후 1374년(홍무 7)·1389년(홍무 22) 등 개정 보완을 거쳐 1397년(홍무 30)에 최종 반포됐다. 조선에서는 1395년(태조4) <대명률>을 이두로 번역하여 조선의 실정에 맞게 재해석한 <대명률직해>를 간행했다.

지금까지 전해진 <대명률>은 이 <대명률 직해>를 가리킨다. 중국에서 편찬된 원문 <대명률>이 국내에는 현전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중국에서도 원문은 1397년 최종본(홍무 30)만 남아있다.

이번 <대명률>은 전문가 검토 결과 1389년(홍무 22) 3차본의 원본으로 추정된다. 그러니 이 <대명률>은 국내에서는 유일본이자, 중국에서도 현전하지 않은 1389년 3차본의 원본인 셈이다.

<대명률>에는 ‘칠거지악’을 무색하게 만드는 ‘삼불거(三不去)’ 조항이 있었다. ‘삼불거’란 ‘돌아갈 곳이 없는 아내, 부모의 삼년상을 함께 지낸 아내, 가정을 함께 일으킨 아내 등은 쫓아내지 못한다’는 항목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그림


■형률은 <대명률>로…

<대명률>은 조선 사람들의 삶을 좌지우지했던 일반 형법이었다. 조선을 개창한 태조 이성계는 즉위 교서에서 <대명률>의 시행을 선언했다. 관리의 처벌 때 반드시 <대명률>에 따를 것을 천명한 것이다.(<태조실록> 1392년 7월28일)

개국공신 정도전(1342~1398)은 아예 “모든 형벌은 <대명률>을 그대로 쓰자”(<조선경국전>)고 주장했다. 정도전의 주장대로 1395년 2월 <대명률>을 이두로 풀이한 <대명률직해>가 간행되었다.

회의감이 든다. 아무리 사대주의가 좋기로서니 법전까지 중국 것을 도입할 필요가 있었을까.

장물을 구입해놓고 보물지정 신청서에 ‘선친에게서 물려받았다’고 허위기재한 것이 적발되어 지정취소된 <대명률>. <대명률>은 명나라가 1367년 첫 간행하고 1374년과 1389년 개정 보완을 거쳐 1397년에 최종 반포된 명나라 형률서다.|정제규 국가유산청 상임전문위원 제공


하지만 달리 볼 필요가 있다. 명나라가 30년에 걸쳐 다듬어 만든 <대명률>은 어느 법률서보다 정비된 내용을 갖고 있었다.

명나라와 함께 유교국가였던 조선 왕조가 구태여 형률서를 만드느라 정력을 허비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조선은 율서를 만들기 보다 포괄적인 법전(훗날 경국대전)을 편찬하는데 더 힘을 쏟고자 했다. 율서는 <대명률>에 맡기고….

물론 <대명률> 중에서 조선의 실정에 맞지 않은 부분은 그때 그때 국왕의 명령을 정리한 특별법을 만들어 운용했다. 그러한 특별법을 집대성한 것이 1485년 완성된 <경국대전> 중 ‘형전’이다.

이때 <경국대전>은 “형률은 <대명률>을 쓴다(用大明律)”(‘형전·용율조’)고 분명히 밝혔다. 말하자면 <대명률>은 형률의 일반법이라면 <경국대전> ‘형전’은 특별법이라 할 수 있겠다.

<대명률>은 조선 백성들의 삶을 좌지우지했던 형률서다. 태조는 즉위 교서에서 <대명률>의 일부 시행을 선언했다. 개국공신 정도전은 “모든 형벌은 <대명률>을 그대로 쓰자”고 주장했다.


■강간남은 교수형

<대명률>을 찬찬히 뜯어보면 나름 ‘교화주의’에 방점을 찍은 조항이 더러 있다.

즉 15세 이하~70세 이상은 유형 이하의 죄에 대해 형이 감경되었다. 또 10세 이하~80세 이상은 상해죄 이하의 경우 형사처벌을 받지 않았다. 제한적이지만 나름 여성을 고려한 흔적이 보였다.

부인이 곤장을 맞아야 하는 죄를 범하면 간음죄를 제외하고는 홑옷을 입힌채 형벌을 집행했다. 여성은 자자형도 면제받았다. 강간죄의 처벌 수위는 엄했다.

<경국대전>은 “형률은 <대명률>을 쓴다”(‘형전·용률조’)고 명문화 했다. <대명률>이 형률의 일반법이라면 <경국대전> ‘형전’은 특별법이라 할 수 있다.


강간은 교형(교수형)이고, 미수에 그쳐도 장 100 유형 3000리에 처했다. 당연히 강간남만 처벌했다. ‘12세 이하 여자’는 어떤 경우든 강간의 예로 처리, 남성만 처벌했다. 또 현장을 적발하지 않지 않으면 간음(간통 포함)으로 처벌할 수 없었다. 이중결혼도 허락하지 않았다.

“본처가 있는데, 다시 처를 맞이하면 장90을 치고 (다른 처를) 이혼시킨다”고 했다. ‘본처를 첩으로 내리거나, 본처가 있는데 첩을 처로 삼아도 장 90대이며, 신분을 되돌린다’고도 했다.

‘칠거지악’을 무색하게 만드는 ‘삼불거(三不去)’가 있었다. ‘삼불거’란 ‘돌아갈 곳이 없는 아내, 부모의 삼년상을 함께 지낸 아내, 가정을 함께 일으킨 아내 등은 쫓아내지 못한다’는 항목이다. 별다른 이유없이 본처를 쫓아내면 장 80대를 쳤다. 이혼이 결코 쉽지 않았던 것이다.

<대명률>의 해석이 너무 어렵거나 조선의 실정에 맞지 않을 경우 고쳐 쓰곤 했다. 그것이 <대명률직해>다.


■세종은 야누스?

그러나 <대명률>의 해석이 너무 어렵거나, 혹은 적용할 조항이 애매하거나, 혹은 조선의 실정에 맞지 않거나, 하는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대명률 직해>를 간행했지만 그 또한 역부족이었다.

때문에 사건·사고가 일어날 때 대명률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혹은 조선의 실정에 맞게 달리 해석할 것인가를 두고 골머리를 썩였다.

<대명률>을 두고 씨름을 벌인 대표적인 이가 만고의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이다.

우선 <세종실록> 1424년(세종 6) 8월21일자가 전한 완전히 상반된 세종의 두가지 명을 소개해본다.

세종의 재위기간(32년) 중 사형수가 1400~1500명에 달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1년 평균 43.4명(1389명 경우)~46.6명(1391명인 경우)에 이른다. 8일에 한번씩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뜻이다. 사형죄를 감형한 경우도 9.2%에 불과했다.


“어진 임금이 어찌 백성을 엄벌에 처할 수 있는가…과인의 형벌을 조심하고 불쌍히 여기는 뜻에 합치되도록 하라.”

그런데 바로 그 날이었다. “병든 남편을 목졸라 죽인 아내와 주인의 아들을 때려 죽인 종을 능지처사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세종실록> 1424년 8월21일자는 세종이 “형벌을 가볍게 하라”고 당부하면서 한편으로는 “병든 남편을 목졸라 죽인 아내와 주인의 아들을 때려 죽인 종을 능지처사했다”는 상반된 내용을 전한다.


그럼 세종은 ‘야누스’의 두 얼굴을 가진 군주일 뿐일까. 우리가 아는 세종이 어떤 분인가.

“지금 법을 맡는 관리들은 무거운 형벌을 따르기 일쑤다. 딱하다. 과인은 ‘신중하라. 신중하라. 형벌을 행함에 신중하라(欽哉欽哉 惟刑之恤哉)’라고 한 <서경> ‘순전’의 가르침을 항상 가슴에 새기고 있다.”(<세종실록 1425년 7월19일>)

또 “사형죄는 3번 조사한 뒤 아뢰게 하는 뜻은 인명을 소중히 여겨, 혹시 착오가 있을까 염려한 것”(<세종실록> 1421년 12월22일)이라고도 했다.

세종은 <대명률>에서 삼강오륜을 해치는 죄의 경우 법대로 처리했다. 실록에는 <대명률>에 따라 세종 치세에 자행된 능지처사나 참형, 교수형 기록이 제법 나온다.


■세종은 ‘사형’ 임금

그렇다면 1424년(세종 6) 8월21일 ‘신중한 법집행’을 외친 그날 ‘능치처사형’을 내린 세종을 어찌 봐야할까. 아닌게 아니라 세종 시대의 법적용 및 집행을 연구하는 이들은 세종 연간에 사형 집행 사례가 뜻밖에 많다는 것에 깜짝 놀란다.

연구자마다 차이는 있다. 재위 32년간 1389명 혹은 1491명, 또는 건수로 따져 465건이라는 통계 등이 있다. 어찌됐든 어마어마한 숫자다.

명수를 따진 통계만 계산하면 재위 32년간 1년 평균 43.4명(1389명 경우)~46.6명(1391명인 경우)에 달한다. 8일에 한번씩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뜻이다. 사형죄를 감형한 경우가 극히 적다. 1491명 사형집행을 통계로 잡은 연구자는 사형죄에 해당된 1628명 중 137명, 즉 9.2%만이 감형된 결과(1491명)이라 했다. ‘465건’을 사형집행의 통계로 잡은 연구자는 사형죄에 해당된 536명 중 13%인 71명이 감형되었다고 분석했다. 어떤 경우든 세종 때의 사형죄 감형률은 9~13%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세종 시대의 사형통계는 정적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것으로 알려진 태종 시대를 압도한다. 즉 태종 시대엔 재위 18년 동안 49명(1년 평균 2.59명)을 사형시켰다. 세종 시대(43.4명)의 17분의 1에 불과하다.

세종 치세에 도둑이 들끓었다. 세종은 급기야 “지금 복역 중인 미결 사형수가 190명에 이른다”고 토로하면서 “과실치사와 절도 전과 3범 등은 감형하면 안되냐”고 신하들에게 이해를 구한다. 그러나 영의정 황희 등은 “지나친 관용 탓에 도적이 들끓고 있다”고 반대한다.


■‘법대로’ 사형

대체 세종대왕은 왜 그랬을까. 우선 당시 형법서인 <대명률>에 사형죄 조항이 너무 많았다.

즉 종묘사직을 해치는 반역죄, 부모·조부모·남편 등 살해(및 미수), 3인 이상 살해, 사체훼손, 노비의 주인 구타 및 살해, 강간, 강도 등은 예외없이 처단되었다. 대부분은 주범과 종범을 가리지 않았다. 가족까지도 희생됐다. 절도전과 3범도 사형에 처했다. 그러니 ‘법대로’ 라면 사형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세종은 <대명률>을 맹신하지는 않았다. <대명률>의 조항이 애매하거나 조선의 실정에 맞지 않을 때는 관용을 베푸는 명령(수교)을 내렸다. 하지만 <대명률>이 규정한 법조항에서 빼도박도 못하는, 삼강오륜을 해치는 죄는 세종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예컨대 주인을 때려죽인 사노 매읍동(1418년 11월7일)과, 남편과 시어머니, 딸을 죽인 여성과 간부 등(1439년 2월13일)에게 <대명률>에 따라 능지처사를 내렸다. 또 장모와 간통한 사노(1423년 11월27일)와, 어머니를 구타한 불효자 및 주인을 죽이려 한 여종은 각각 참형에 처했다.

세종은 강상죄 등은 <대명률>에 따라 엄벌에 처했지만 다른 죄는 온정주의를 채택하고자 했다. 대표적인 예가 절도죄다. 세종은 ‘절도 3범=교수형’으로 못박은 <대명률> 처벌 조항을 ‘지나친 엄벌’로 여겼다.


■미결사형수가 190명

<세종실록>을 살펴보면 이해할 수 없는 기록이 또 나온다. 세종의 치세에 특별히 도둑이 창궐했다는 기사다.

“서울에서 도둑이 창궐…이제는 내탕고의 황금 술잔과 봉상시의 은제 제기까지도 털린다…이들을 잡아도 장 몇대나 자자형(얼굴이나 팔뚝에 죄명을 새기는 벌)에 불과…이들이 다시 범죄를 저질러 온 백성이 원망하며 그 고기를 씹고자 해도 어쩔 줄 모르고….”(1436년 윤6월14일)

하다하다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내탕고와 제사를 관장하는 봉상시에서 털렸다는 것이다.

세종은 “<대명률>은 절도 3범은 교형에 처한다고 했지만 <대명률>에는 사면령을 내린 전과 후를 구분하지 않았다”면서 “앞으로는 사면령 이후의 절도죄만 근거해서 죄를 줄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 뿐이랴. 1439년 12월15일, 세종이 신하들 앞에서 “지금 복역 중인 미결 사형수가 190명에 이른다”고 토로한다. 그러면서….

“기근이 겹쳐 도적이 성행하고 분쟁이 더욱 생겨 사형수가 예전보다 배가 된다. 부끄럽다. 과실치사와 절도 전과 3범 등은 감형하면 안될까.”

그러나 영의정 황희(1363~1452) 등은 “아니되옵니다”라 한다.

“<대명률>에 ‘절도 전과 3범이면 교수형에 처한다’는 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해마다 갖가지 이유로 사면령을 내립니다. 전과가 말소되면 그 날로 다시 도둑으로 되돌아가, 재범, 3범, 아니 10여 범에 이르러도 형벌을 받지 않는 자도 허다합니다.”

세종은 재위 32년 동안 무려 31번이나 사면을 단행했다. 1년에 1명 꼴이다. 세종은 “궁한 백성이 범하는 절도는 큰 죄악이 아닌 데 모두 사형에 처하는 것은 나로서는 차마 못 할 일”이라고 신하들의 ‘사면 전의 전과 계산’ 주장을 일축했다.


■사면 때문에 도둑 창궐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의 치세에 이게 무슨 일인가. 그 수수께끼를 풀 열쇠가 황희 등의 반대의견에 나와 있다.(조병인의 논문에서)

즉 황희 등이 밝혔듯이 <대명률>에 “절도 전과 3범은 교수형에 처한다”는 조항이 있다. 즉 “초범은 오른쪽 팔뚝에, 재범은 왼쪽 팔뚝에 ‘절도’라는 글자를 새기고, 전과 3범은 교수형에 처한다”는 것이다. 이게 문제가 됐다. 세종은 강상죄 등은 <대명률>에 따라 엄벌에 처했지만 다른 죄는 온정주의를 좇고자 했다. 대표적인 예가 절도죄이다. 세종은 ‘절도 3범=교수형’으로 못박은 <대명률> 처벌 조항을 ‘지나친 엄벌’로 여겼다.

다만 <대명률> ‘절도’ 조항은 건드리지 않고도 감경을 꾀했다. 1422년(세종 4) 의정부가 올린 ‘절도범의 단죄’ 규정이 그것이다.

세종이 온정주의를 천명하자 대안이 속출했다. 절도 3범의 한쪽 발, 양쪽 발의 힘줄을 끊어 재발을 방지했지만 그것도 신통치않자 ‘절도’ 두 글자를 뺨에 새기는 자자형‘까지 채택했다. 급기야 초범부터 뺨에 ’절도‘ 두 글자를 새겼다.


“<대명률>은 절도 3범은 교형에 처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명률>에는 ‘사면령의 전과 후’를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형조는 사면령 이전의 전과까지 함께 계산해서 죄를 주었지만 온당치 않습니다. 앞으로는 사면령 이후의 절도죄에 근거해서 죄를 주어야 합니다.”(12월20일)

즉 예전에는 절도 2범이 사면을 받았어도 다시 절도를 저지르면, 절도 3범으로 간주해 사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1422년 12월20일 이후에는 그냥 절도 1범이 되어 사형이 면제되었던 것이다.

세종의 온정주의는 급기야 파국을 맞았다. 1447년 5월12일 평양 대성산에서 떼강도단이 적발된 것에서 비극이 시작됐다.


그런데 세종은 재위 32년동안 무려 31번이나 사면을 단행했다. 그러니 사형 집행이 제때 이뤄졌겠는가. 세종은 “궁한 백성이 범하는 절도는 큰 죄악이 아닌 데 모두 사형에 처하는 것은 나로서는 차마 못 할 일”이라고 ‘사면 전의 전과 계산’ 주장을 계속 일축했다.(1430년 12월16일)

세종의 의지가 이토록 완강하자 신하들은 별의 별 대안을 제시했다. 먼저 발뒤꿈치 힘줄을 끊는 ‘단근형(斷筋刑)’을 도입했다.(1436년 8월8일) 그것도 소용없자 다리 양쪽의 힘줄을 모두 끊었다.(1437년 7월21일) 그 조차도 별무신통이자 이제는 왼발의 전근(前筋)까지 끊도록 했다.(1439년 12월5일)

그 조차 효과가 없자 ‘사면 전 후 절도전과 3범’의 경우 ‘단근’ 대신 ‘절도’ 두 글자를 뺨에 새기도록 했다가(1443년 2월5일), 아예 절도 초범부터 ‘절도’자를 자자했다.(1444년 10월11일)

하지만 이 모든 조치가 절도근절책은 될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사면의 혜택을 보지 못한 절도 3범의 사형도 속속 집행됐다.

붙잡힌 떼강도 중 14명은 형장에서 죽었다. 얼마나 혹독한 고문을 받았는지 짐작이 간다. 그림은 김윤보의 <형정도첩>.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온정주의의 파국

1447년(세종 29) 5월12일 평양 대성산에서 떼강도단이 적발됐다. 붙잡힌 14명은 형장에서 죽었다. 범행을 자복한 13명은 <대명률>에 따라 참형을 받게 됐다. 세종은 이 가운데 13세 소년을 용서해주었고, 18세 2명은 ‘강도’ 두 글자를 얼굴에 새기고 거제현의 관노로 배속하게 했다. 어찌됐든 이 사건으로 24명이 떼죽음을 당했고, 10대 청소년 3명만이 세종의 고집으로 겨우 살아남았다.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세종의 인내심도 바닥났다. 결국 2주 후인 5월26일 의정부가 “농사(소)에, 군사(말)에 필수적인 소와 말을 훔쳐가는 자들이 너무 많아 백성들이 고통받고, 국가적으로도 우환거리”라면서 엄벌을 촉구했다. 결국 세종은 ‘절도3범=사형’은 물론이고, ‘소와 말 절도2범=사형’이라는 극약처방을 받아들였다. 세종의 온정주의가 파국을 맞았다.

범행을 자복한 13명은 <대명률>에 따라 주범과 종범을 가리지 않고 참형을 받게 됐다. 이중 13세 소년은 석방됐고, 18세 청년 2명은 자자형을 받고 관노로 배속됐디. 이들에게서 뇌물을 받고 정보를 흘린 평양부 형방주사도 처단되었다.|김윤보의 <형정도첩> 중 ‘참형’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은 7월21일 17명, 8월11일 20명, 10월10일 30명 등 그동안 체포된 강·절도범이 <대명률>에 의해 사형에 처해진다. 이후 세종이 승하하는 1450년까지 ‘절도3범=사형’ 기사가 줄을 잇는다.

세종은 <대명률>이라는 중국 형률서를 들고 백성들의 삶을 저울질했다. 때로는 엄격하게, 때로는 따뜻하게…. 쉽지 않았다. 엄격한 적용 때는 사형수가 양산되었다. 사형 조항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1447년 5월26일 의정부가 “농사(소)에, 군사(말)에 필수적인 소와 말을 훔쳐가는 자들이 너무 많다”면서 엄벌을 촉구하자 세종은 ‘소와 말 절도2범=사형’이라는 극약처방을 받아들였다.|국립중앙박물관·국립광주박물관 소장


세종은 다른 한편으로 자비와 온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세종이 다스린 조선은 아직 나라의 기틀이 집히지 않은 신생국이었다. 민심이 다잡히지 않았다. 후유증이 만만치 않았다. 도적이 창궐했고, 감옥에 역시 사형수가 넘쳐났다. 그렇다면 결론은 어떨까.

세종의 형사정책이 결국 실패로 끝났다는 평가가 있다.(조병인의 논문) 부인할 수 없다. 32년 간의 치세 도중 무려 1300~1500명이나 되는 백성이 사형수의 이름으로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또한 한번쯤 되짚어야 할 세종 시대의 역사가 아닌가.

이후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은 7월21일 17명, 8월11일 20명, 10월10일 30명 등 그동안 체포된 강·절도범이 <대명률>에 의해 사형에 처해진다. 이후 세종이 승하하는 1450년까지 ‘사형’ 기사가 줄을 잇는다.


■사면은 ‘소인의 다행, 군자의 불행’

마지막으로 <대명률>에서 지금의 내란죄에 해당되는 조항만 찍어 재차 소개한다. 즉 ‘종묘와 사직을 위태롭게 한 모반·모대역죄는 주범과 종범을 가리지 않고 모두 능지처사에 처한다’는 것이다.

극형은 본인에게만 끝나지 않았다. 아버지와 아들(16세 이상)은 모두 교수형을 받았다. 15세 이하의 아들이나 어머니와 딸, 처첩, 조부와 손자, 형제자매는 물론 아들의 처·첩까지 노비로 전락했다.

<대명률>은 내린죄나 강상죄, 고의살인, 강도, 강간 등의 중범죄인에 대해서는 사면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면이 군자에게는 불행, 소인에게는 다행”이라는 당 태종의 언급을 신줏단지 모시듯 했다.


그 뿐인가. ‘모반·모대역죄’ 같은 내란죄는 당연하고, 강상죄, 고의 살인, 강도 등의 중죄는 사면의 대상이 될 수도 없었다.(‘명례율·십악’ 및 ‘상사소불원’)

세종이든 누구든 <대명률>의 ‘중죄인 사면 불허 조항’을 건드린 군주는 없었다.

1401년(태종 1) 12월5일 대사헌 이지(?~1414)의 언급이 심금을 울린다.

“당 태종(626~649)이 ‘사면은 소인의 다행이요, 군자의 불행’이라 했습니다. 사면이 잦으면 악한 짓의 마음이 고쳐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면날만 손꼽아 기다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온갖 악행하는 풍속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기사를 위해 김창배 경기북부경찰청 광역수사1반장, 정제규 국가유산청 상임 전문위원, 조지만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조병인 <세종치세 도둑 대학살> 저자, 김병연·이연재 국가유산청 학예연구관이 도움말과 자료를 보내주었습니다.) 히스토리텔러 [email protected]

<참고자료>

조병인, ‘세종시대 도둑과의 전쟁에 관한 연구’, <형사정책연구> 30권2호,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2019

조병인, ‘세종이 민본주의 형사정책연구’, <고궁문화> 9호, 국립고궁박물관, 2016

이성무, ‘경국대전의 편찬과 대명률’, <역사학보> 125호, 역사학회, 1990

배종대, ‘세종의 형법사상’, <고려법학> 59권, 고려대 법학대학원, 2010

한국고전번역원, <대명률 직해>, 한상권·구덕회·심희기·장경준·김세봉·김백철·조윤선 옮김, 2018

박현모, ‘세종의 법 관념과 옥사 판결 연구’, <한국정치연구> 23권1호, 서울대 사회과학원구원, 2014

조지만, ‘경국대전 형전과 대명률-실체법 규정을 중심으로’, <법사학연구> 34권, 한국법사학회, 2006

국가유산청, ‘2016년 문화재위원회 제3차 동산분과 회의자료’, 2016년 6월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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