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반도와 남중국해 등 주요국 전략자산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현장의 다양한 에피소드를 흥미진진하게 전달해드립니다. 이일우 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이 격주 화요일 풍성한 무기의 세계로 안내합니다.지난달 포항·포천·파주 일대 훈련장에서 실시된 '25-1차 KMEP 연합보병·제병협동훈련'에서 한미 해병대 장병들이 공격작전 간 경계를 하고 있다. 해병대사령부 제공
지난 16일 필리핀 루손섬 북부 카가얀 노스 국제공항에 미군 수송기가 연이어 착륙했다. 수송기에서는 방수포로 감싼 여러 대의 차량이 하역됐는데, 이들은 하와이에서 날아온 미 제3해병연대 소속 차량들로 4월 21일부터 5월 9일까지 실시되는 연례 연합 군사 훈련인 ‘발리카탄(Balikatan)’ 훈련에 참가하기 위해 필리핀에 전개된 병력이었다. 이들은 분명 ‘해병대’였지만, 공기부양정이나 장갑차를 타고 적의 해안에 상륙하는 전통적인 개념의 해병대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장비와 편제를 취하고 있었다.
'적 해안 상륙'하는 전통적인 모습에서 변화한 미 해병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해병대의 모습은 거대한 상륙함을 타고 적 해안 근처까지 이동한 뒤, 상륙돌격장갑차와 공기부양정, 헬기 등을 타고 적 해안을 덮쳐 교두보를 만들고, 후속해 들어오는 아군 병력들과 함께 내륙으로 밀고 들어가며 전투를 벌이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 동안 있었던 쌍룡훈련이나 KMEP 훈련에 참가한 미 해병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생각해온 ‘전통적인 해병대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지난해 쌍룡훈련 때 미군은 대형 강습상륙함 아메리카함을 보내기는 했다. 그러나 당시 훈련에서 내륙으로 진공하는 미군 전차나 장갑차는 없었다. 3,000여 명 이상의 병력을 상륙시킬 수 있는 상륙준비전단(ARG)도, 우리에게 익숙한 육중한 상륙돌격장갑차도 없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미 해병대는 지난 2020년, 대대적인 편제 개편에 따라 전차부대를 없애 현재 단 1대의 전차도 가지고 있지 않다. 거의 1개 소대가 탑승할 수 있었던 육중한 상륙돌격장갑차 AAV7A1은 1개 분대가 겨우 탈 수 있는 차륜형 장갑차 ACV로 바뀌었고, 이제는 이런 장갑차를 편제에 둔 부대도 얼마 남아있지 않은 상태다. 이는 미국이 중국과의 패권 경쟁 상황에 맞춰 해병대라는 조직을 ‘상륙작전부대’에서 ‘해상봉쇄부대’로 바꾸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미 해병대는 기존의 상륙작전용 부대를 미사일전 부대인 해병연안연대(MLR) 편제로 바꾸고 있다.
유사시 한미연합사령부를 지원하는 군단급 부대인 제3해병원정군 예하 제3해병사단은 예하 3개 연대 중 2개를 이미 MLR 편제로 바꿨다. 이들을 공중에서 지원하는 제1해병항공단 역시 공중 화력 지원 수단인 AH-1Z 공격헬기와 UH-1Y 다목적헬기 전력을 대폭 감축했다. 이는 앞으로 우리 군이 북한 후방 지역에 대규모 상륙작전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 됐을 때, 미군이 옆에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지난달 실시된 '25-1차 KMEP 연합보병·제병협동훈련'에서 미 해병대 장병들이 슈퍼스텔리온(CH-53E) 헬기에서 내린 뒤 목표 지점으로 이동하고 있다. 해병대사령부 제공
미군의 최우선 임무는 동맹국 지원 아니라 중국 견제
미국이 해병대를 대대적으로 개편한 이유는 더 이상 전통적인 개념의 대규모 상륙작전을 할 일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미국은 동맹국이 대규모 전면전 상황에 처했을 때, 동맹국의 요청에 따라 여단~사단급 규모의 해병대를 신속하게 파견해 상륙함과 상륙부대를 지원할 수 있는 전력을 갖춰놓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미군의 최우선 임무는 동맹국 지원이 아니라 미국의 패권을 위협하는 중국을 견제하고 격퇴하는 것이 됐다. 그리고 중국과의 싸움은 지상전이 아니라 해전과 공중전이 될 것이기 때문에 미국 입장에서는 굳이 큰돈을 들여 대규모 상륙부대를 유지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번에 필리핀에 전개된 제3해병연안연대 역시 필리핀 본토를 지키거나 필리핀이 중국에 빼앗긴 섬을 되찾아주는 훈련을 해주기 위해 온 전력이 아니다. 필리핀과 대만 사이의 바닷길, 즉 바시해협을 지대함·지대공 미사일로 틀어막아 중국 함대의 서태평양 진출을 차단하기 위한, 다시 말해 미국의 필요에 의해 필리핀에 배치된 전력이라는 것이다.
지난 1월 20일 취임 당일부터 엄청난 양의 행정명령들을 쏟아내며 철저한 미국 우선주의 정책을 취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사업가’라는 평가를 듣는다. 그는 모든 국제관계를 이익의 관점에서 보고, 손해가 나는 관계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정치학적으로 볼 때 그의 동맹관은 냉전 이후 미국의 전통적 입장이었던 ‘자치안보교환모델’보다는 ‘국력집합모델’에 가깝다. 즉, 미국에 이익이 되지 않는 동맹은 얼마든지 끊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지난달 실시된 '25-1차 KMEP 연합보병 제병협동훈련'에서 한미 해병대 장병들이 마린온(MUH-1)과 슈퍼스텔리온(CH-53E) 헬기를 이용해 공중돌격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해병대사령부 제공
트럼프 대통령의 이 같은 입장 때문에 그의 취임 후 유럽은 그야말로 비상이 걸린 상태다. 미국이 유럽 주둔 미군 철군은 물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탈퇴까지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이 같은 위협은 유럽이 더 많은 국방비를 지출하고, 더 많은 미국제 무기를 사도록 유도하기 위한 외교적 수사가 아니다. 트럼프 측 인사들은 미국이 왜 유럽에 막대한 규모의 병력을 배치해놓고 유럽 국가들을 보호해 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지속적으로 표출해 왔다. 과거 미국이 소련과 패권 경쟁을 하던 시기에 유럽은 미국의 중요한 대소련 전진기지였지만 러시아가 더 이상 미국의 상대가 되지 않는 나라가 된 이상, 이제 유럽은 미국이 대규모 병력을 배치하고 보호해 주어야 할 만큼의 가치가 없는 지역이 됐다. 이 때문에 미국은 현재 약 8만4,000명 규모에 달하는 유럽 주둔 미군, 그중에서도 지상군을 감축할 준비를 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유럽 주둔 미군 철군 거론
이달 3일 미국 군사전문지 ‘밀리터리닷컴’은 3명의 미 국방부 관계자를 인용해 미국이 최대 9만 명의 육군 병력 감축을 추진 중이라고 보도했다. 현재 45만 명 규모인 육군 현역 병력을 36만~42만 명 수준으로 줄이고, 이에 맞춰 편제도 대대적으로 개편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유럽에는 독일을 중심으로 약 4만1,000명의 상시 배치 병력과 6,000명의 순환 배치 전력이 있다. 이 부대들은 모두 미국 본토 안보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오로지 유럽 보호를 위해 존재하는 전력이다. 미 육군 병력 감축이 시작되면 최우선 감축 대상이 될 수 있는 곳이 바로 유럽주둔군이다.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니다. 주한미군은 유럽보다 감축 가능성이 더 높은 지역이다. 이라크 전쟁 발발 전까지 주한미군은 완편 기계화보병사단 편제의 중무장 지상군을 갖추고 있었지만, 현재는 경량 차륜형 장갑차로 구성된 스트라이커 여단 전투단 1개와 이를 지원하는 포병·항공·정보·방공부대들만 배치돼 있을 정도로 전력이 줄어들었다. 스트라이커여단은 저강도 분쟁에 대응하기 위한 경장갑차부대로 한반도에서 전면전이 벌어지면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는 전력이다. 그리고 이들은 북한 장사정포 타격권 안에 배치돼 있어 생존성이 극히 취약하다. 앞서 언급한 유럽 주둔 미군만큼이나 미국 본토의 안보에 기여하는 바가 없고, 생존성까지 취약하다면 미국 입장에서는 이들을 유지해야 할 이유가 없다. 즉, 미 육군 감축 작업이 본격화되면 주한미군은 유럽 주둔 미군보다 먼저 병력 감축 작업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2019년 9월 오산기지에서 열린 '에어파워데이 2019' 미디어데이에서 미 공군 요원들이 A-10 대전차 공격기에 무기를 장착하고 있다. 연합뉴스
주한미군 병력 감축에 대비해야
미국은 지난달 미 본토와 대만 방어를 최우선 순위로 삼고, 이를 위해 차순위 지역의 리스크는 기꺼이 감수한다는 국방장관 명의의 잠정 전략 지침을 전군에 하달한 바 있다. 이는 한국 정부가 주한미군을 대북 임무용으로만 묶어두려는 입장을 고수할 경우, 주한미군의 대대적인 감축이나 철군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미국의 이러한 입장은 트럼프 행정부가 좀 더 과격하고 급할 뿐이지 4년 뒤에 민주당으로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미국 민주당 역시 미국의 세계전략에 협조하지 않는 한국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고, 바이든 행정부 때부터 서태평양 안보 동맹의 중심축을 한미동맹에서 미일동맹으로 바꾸는 작업을 해왔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바이든 행정부는 주한미육군 편제를 일부 바꾸고, 1개 비행대를 철수시키는 등 실질적인 주한미군 감축 조치를 취해왔다. 한반도 전면전 상황에서는 쓸모없는 부대인 스트라이커 부대가 순환배치부대로 지정되고, 오산기지에서 A-10C 24대가 철수·퇴역하는 상황에서도 우리 정부는 “한미동맹은 철통같다”는 말로 국민들을 속이기에 바빴다.
대한민국은 지금 기로에 서 있다. 미국이 동맹의 성격을 철저한 상호주의에 입각한 국력집합모델 성격으로 바꾸고 있는 지금, 주한미군이 우리 안보와 경제에 기여하는 만큼, 우리도 미국의 안보에 기여하는 나라로 탈바꿈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트럼프 임기 중 주한미군 대규모 감축 또는 철군과 이로 인해 무너지는 안보를 보게 될 수도 있다.
이일우 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