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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깃발이 분명해야 한다. 깃발이 분명하면 결국은 이기게 되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남긴 말이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 대변인을 맡았던 윤태영의 『기록』에 나와 있다. 정치의 언어는 국민의 마음을 읽어내고 움직이게 해야 한다. 정치 리더라면 깃발을 들고 있어야 한다. 깃발은 국민과 국가가 가야 할 곳을 가리킨다. 깃발의 다른 이름은 시대정신이다.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오는 6월 3일 대통령선거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우리나라에서 총선거·지방선거와 비교해 대선이 갖는 의미는 사뭇 다르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시대정신에 있다. 시대정신이란 과거와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모색하는 가치의 집약이다. 우리 사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은 후보자들이 높이 든 깃발, 곧 시대정신이 사회적 토론을 거쳐 국민적 동의를 형성해가는 과정이다.

대선, 시대정신의 국민적 동의 과정
올 대선으로 두 겹 세계와 결별 주목
‘87년 체제’와 ‘97년 체제’ 극복하고
지속가능 성장·민주주의 제시해야

시대정신이 저 홀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와 사회 안에 놓여 있고 주조된다. 앞서 말한 과거와 현재의 진단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시대정신이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나라가 걸어왔고 서있는 자리에 대한 냉철한 인식이 요구된다. 그 인식은 그릇된 ‘소음’을 거르고 의미 있는 ‘신호’를 찾아내는 과정이다. 2025년 현재,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우리 사회가 익숙했던 ‘두 겹의 세계’와의 결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첫째는 ‘87년 체제’다. 12월 3일 비상계엄부터 4월 4일 대통령 파면에 이르기까지 국민 다수의 시선을 잡아둔 것은 제왕적 대통령제의 그늘이다. 역설적인 것은, 두 차례의 대통령 탄핵에서 보듯 ‘87년 체제의 한계’를 ‘87년 체제의 힘’으로 저지했다는 사실이다. 87년 체제에는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 제2항 국민주권의 시민적 에토스가 담겨 있다. 이 에토스가 한국 민주주의의 저력을 이뤄 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87년 체제의 명암은 사회과학의 고전적인 ‘구조와 개인’ 문제를 숙고하게 한다. 87년 체제가 민주주의의 위기를 낳았다면, 그 원인에는 승자독식이라는 제도적 요인과 리더십 빈곤이라는 주체적 요인이 결합돼 있다. 87년 체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차원의 ‘87년 헌법’ 개정과 주체적 차원의 관용과 타협의 리더십이 함께 요구된다. 권력 분산을 위한 헌법 개정을 더 이상 미룰 순 없다. 동시에 민주적 리더십 및 정치문화 구축 또한 못지않게 중요하다.

둘째는 ‘97년 체제’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경제를 이끌어온 것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였다. 97년 체제에도 명암이 존재한다. 세계화된 신자유주의 질서는 대외적으로 개방 전략이 불가피한 우리 국민경제에 성장의 조건을 제공한 반면, 대내적으로는 경제적·사회적 격차를 증대시킨 불평등의 원인을 이뤘다. 대외적 개방의 이익을 대내적 복지의 자원으로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의 선순환은 정부 정책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97년 체제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두 가지 도전에 마주해 왔다. 하나가 소득과 자산의 양극화였다면, 다른 하나는 자유무역 시대에서 신보호주의 시대로의 전환이었다. 미국 트럼프 정부 발 ‘관세 전쟁’은 신보호주의 국제질서의 새로운 단계를 예고하고 있다. 6월 4일 출범할 새 정부의 정책의 중심에는 성장과 분배는 물론 개방과 복지의 ‘이중적 선순환’, 그리고 미·중 패권 경쟁 시대에 적극 대처하는 국익 중심의 통상 및 외교정책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이번 대선에서 내가 기대하는 바는 새로운 국가와 사회를 향한 시대정신이다. 87년 체제와 97년 체제를 동시에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속가능한 민주주의와 경제모델을 마련해야 한다. 이 과정은 다론 아제모을루와 제임스 로빈슨이 개념화한 ‘좁은 회랑’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좁은 회랑은 오만한 정부와 무정부적 사회 사이에 존재하는 통로다. 경제·문화 선진국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좁은 회랑 안에서 국가와 시민사회가 생산적이고 협력적인 균형을 이뤄야 한다.

지속가능한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에 담아야 할 목표는 분명하다. 첫째, 성장 없이 복지 없다. 끝없는 과학기술혁명에 대응해 새로운 성장을 일구기 위한 산업 생태계와 사회 대타협의 청사진을 내놓아야 한다. 둘째, 민주주의는 제도와 문화가 함께 가는 시스템이다. 권력 분산을 위한 87년 헌법 개정과 국민통합을 위한 정치문화 혁신의 개혁안을 제시해야 한다. 우리 사회를 지탱해온 두 개의 기본적인 힘, 곧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에 대해 후보자들은 자신들의 시대정신을 밝혀야 한다.

깃발의 또 다른 이름은 목소리다. 목소리의 진정한 주인공은 국민이다. 미래를 향해 시민들이 간절히 외치는 희망의 목소리를 정치 리더들이 대의하고 대표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본령이다. 복수의 목소리가 경쟁하고 투표로 선택받는 과정이 바로 대선이다. 분명한 깃발,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는 시대정신을 기다리는 이, 결코 나만은 아닐 것이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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