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4월 20일 장애인의 날 ]
발달장애인 투표 참여율 50%대 불과
투표 보조 제한에 투표 포기 사례 속출
그림투표용지·공적 조력인 도입 필요
15일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발달장애인자립생활센터 피플퍼스트서울센터에서 발달장애인 당사자와 센터 관계자들이 ‘모두를 위한 투표용지’를 제안하며 직접 고안한 그림투표보조용구를 소개하고 있다. 센터를 방문한 어린이(오른쪽 아래에서 두 번째)도 함께 손을 내밀었다. 하상윤 기자


“우리 아들 같은 발달장애인(지적·자폐성 장애)도 꼭 투표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정치인들이
발달장애인의 목소리를 듣는 시늉이라도 할 테니까요.”


중증 발달장애인 류인서씨는 스무 살이던 2022년 대선부터 지방선거, 지난해 총선까지 한 번도 투표를 거르지 않은 성실한 유권자다. 선거철마다 어머니 복성옥씨가 실제 투표지와 똑같은 연습용 투표지까지 만들어 인서씨에게 투표하는 방법을 맹훈련시킨 덕분이다. TV에 후보들이 나오면 이름과 특징 등을 반복적으로 알려줘서 인서씨가 후보들을 인지하도록 도왔다.

“대통령 후보는 몇 명 안 되니까 아들이 기표 칸에 도장을 잘 찍었는데, 지방선거에선 후보가 워낙 많은 데다 투표지도 시장, 시의원, 구청장 등 여러 개라 헷갈렸는지, 엉뚱한 곳에다 찍고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투표소에는 온 가족이 총출동한다. 낯선 공간을 두려워하는 인서씨가 돌출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칠까 봐 걱정돼서다. “저런 애가 무슨 투표를 하냐”며 대놓고 혀를 끌끌 차는 사람이 적지 않아 가족들은 상처받곤 한다.

자폐성 장애,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ADHD)를 동시에 가진 아들 류인서씨와 그의 어머니 복성옥씨의 모습. 복씨 제공


발달장애인 투표율 저조... 제도적 지원 절실



보건복지부가 실시한 ‘2023년 장애인실태조사’에 따르면 ‘2022년 (20대) 대선에서 투표했다’는 응답 비율은 청각장애, 지체장애, 신장장애, 시각장애, 호흡기장애에서 모두 80%를 넘겼지만, 발달장애에 속하는
지적 장애(55.1%)와 자폐성 장애(53.7%)만 50%대
에 그쳤다.

그래픽=이지원 기자


발달장애인의 투표 참여를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곧 다가오는 대선에서는 발달장애인 참정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할 수 있도록 투표 지원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성인이 된 발달장애인은 엄연히 투표권이 있지만, 인서씨처럼 가족이나 주변인 도움 없이는 투표소 문턱을 넘기 어렵다. 글을 읽지 못하거나 복잡한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글자를 알아도 투표지에 글자(이름)와 숫자(기호)가 섞여 있으면 혼란을 겪는다. 소근육 발달이 안 돼 폭 1.5cm 칸에 기표하는 일도 어려워한다.

선거관리위원회는 문해력이 부족한 사회적 약자를 위해 공약 등을 읽기 쉬운 글과 형식으로 구성한 ‘이해하기 쉬운 선거공보’ 제작 방법을 후보들에게 안내하고 있지만, 제작·배포가 의무는 아니라서 발달장애인을 위한 정보 제공도 충분하지 않다. 비장애인과 똑같은 한 표라도 투표 환경은 결코 평등하지 않은 셈이다.

투표지에 사진과 정당 로고 있으면 선택 쉬워져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관계자들이 지난해 12월 18일 서울 서초구 법원 앞에서 ‘발달장애인의 공직선거 정보접근권 보장을 위한 차별구제청구소송 2심 판결선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참가자들이 후보 사진과 정당 로고 등이 들어있는 그림투표용지 모양 손팻말을 들고 있다. 뉴스1


발달장애인과 가족들, 장애인단체가 요구하는 건
①그림투표용지 제공 ②투표 보조인 동반
허용
등 크게 두 가지다. 그림투표용지는 후보 사진과 정당 로고, 색깔을 넣어 글자나 숫자를 모르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게 만든 투표지다. 이미
대만, 홍콩, 영국, 이집트 등 여러 나라에 도입
돼 있고, 한국도 1960년대에 사용한 적이 있다.

2012년 대만 총통 선거 투표용지. 로이터·연합뉴스


다만 투표지 양식을 바꾸려면 공직선거법을 고쳐야 하고, 전국의 수많은 전자개표기도 교체해야 해 당장 시행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바로
③그림투표보조용구
다. 투표지를 본뜬 보조용구는 후보별 사진과 정당 로고가 담겨 있고 기표 칸은 구멍이 뚫려 있어서, 보조용구 안쪽에 기존 투표지를 끼워 구멍에 기표한 뒤 투표지를 빼내면 된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투표보조용구와 똑같은 방식이다.

발달장애인 동료지원가로 활동 중인 박경인 씨가 지난 15일 서울 영등포구 피플퍼스트서울센터(발달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후보자 사진과 정당 로고 등이 들어간 그림투표보조용구를 소개하고 있다. 하상윤 기자


법원도 보조용구 필요성을 인정했다. 지난해
12월 서울고법
은 발달장애인들이 선관위를 상대로 제기한 차별구제청구 소송에서 “확정 판결일로부터 1년 뒤
문자를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을
위해 보조용구를 제공하라”고 판결
했다. 잘하면 내년 지방선거부터 그림투표보조용구가 도입될 수 있었지만, 선관위가 공직선거법에 관련 조항이 없다는 이유로 상고하는 바람에 기약 없이 미뤄지고 말았다.

장애인차별금지법 27조
에 ‘장애인의 참정권을 위해 장애의 유형 및 정도에 적합한 기표방법 등 선거용 보조기구 개발 및 보급, 보조원 배치 등 정당한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선관위는 공직선거법 조항을 우선으로 하고 있다.

이승헌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장추련) 사무국장은 “신체장애인은 손목에 감거나 입으로 무는 기표용구를 사용할 수 있고, 청각장애인은 화상 통화로 수어 통역도 제공받는다”며 “하지만
발달장애인을 위한 투표 지원은 전무
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법원은 그림투표용지도 타당하다고 봤으나 현실적 여건을 고려해 보조용구라도 주어져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라며 “
그림
투표용지는 문해력이 부족한 이주민과 노인, 느린 학습자 등 사회적 약자의 참정권 확대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고 말했다.

발달장애인 투표 보조 제한은 또 다른 차별

2022년 5월 27일 지방선거 사전투표 첫날 서울 용산구 원효로제1동 주민센터에서 발달장애인들이 가족의 도움을 받아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투표 보조인이 돕는 방법
도 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장애 유형에 따라 보조원 배치 등을 할 수 있게 돼 있지만, 선관위는 이 역시 공직선거법에 규정이 없다고 거부하고 있다. 공직선거법 157조에는 ‘시각 또는 신체의 장애로 자신이 기표할 수 없는 선거인은 그 가족 또는 본인이 지명한 2인을 동반해 투표를 보조할 수 있다’고만 명시됐다는 이유다.

2016년까지는 발달장애인도 투표 보조인과 함께 기표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선관위가
2020년부터 ‘시각 또는 신체의 장애’라는 문구를 글자 그대로 엄격히 해석하면서 발달장애인
중 장애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람은 투표 보조를 받지 못하게 됐다.


현장에선 극심한 혼란이 빚어졌다. 갑자기 혼자 투표하게 돼 당황하는 바람에 손떨림 증상이 심해져 실수를 했다거나, 보조인과 기표소 동반 입장을 제지당해 아예 투표를 포기했다는 신고가 장애인단체에 쏟아졌다. 발달장애인 이윤호씨의 어머니 김남연씨도 당시 다른 장애인 가족들과 투표소로 몰려가 항의했다.

남연씨는 “예컨대 투표지가 길면 비장애인은 투표지를 조정해 기표하지만, 발달장애인은 끈으로 고정된 기표용구만 계속 잡아당긴다.
옆에서 간단한 도움만 줘도 투표하기 쉬워진다
”며 “신체장애인은 보조인이 허용되는데 발달장애인만 제외되는 건 또 다른 차별”이라고 강조했다.

자폐성 장애와 지적 장애를 가진 아들 이윤호씨와 그의 어머니 김남연씨의 다정한 모습. 김씨 제공


부정선거 우려? 공적 조력인 도입 검토해야



지난해 10월 서울중앙지법과 올해 1월 부산고법은 ‘선관위 투표 관리 지침에 발달장애인을 위한 투표 보조를 해야 한다는 문구를 포함하라’고 주문했다. 발달장애도 중추신경계 등의 이상으로 촉발되는 만큼,
넓은 의미에서 공직선거법상 투표 보조 대상인 ‘신체장애’로 볼 수 있다
는 장애인단체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장애인차별금지법의 투표 보조원 배치 조항도 판단의 근거가 됐다.

하지만 선관위는 이 판결에도 또 항소, 상고했다. 선관위 관계자는 “투표 보조는 비밀투표 원칙을 일부 훼손하는 일이라, 선거인이 원하는 후보가 분명히 존재하나 물리적으로 기표하기 어려운 상황에 한해 극히 예외적으로 허용돼야 한다”며 “발달장애인의 경우 가족이나 시설 관계자가 후보 선택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고 실제로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로부터 자신이 자녀 대신 찍겠다는 민원이 많이 들어온다”고 해명했다.

1월 9일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 내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가 개최한 모의투표 행사에서 한 장애인이 투표 보조인의 도움을 받으며 투표하고 있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제공


이는 부모의 보조가 아닌 ‘공적 조력인’을 도입하면 해결될 문제이다. 송효정 피플퍼스트서울센터 사무국장은 “발달장애를 잘 이해하는 공적 조력인이 배치되면 비밀투표가 가능해져 부정선거도 방지된다”며 “발달장애인 당사자의 의사 결정권도 강화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국회에는 발달장애인용 선거 공보 제작, 그림투표보조용구 제공, 투표 보조인 동반 허용 등을 담은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여럿 발의돼 있다. 이승헌 장추련 사무국장은 “현행 공직선거법은 권리 확대보다 부정선거 예방에 초점을 두고 있어 시대적 변화를 따라오지 못한다”며 “대통령 후보들을 대상으로 법 개정 약속, 발달장애인 맞춤 공보물 제작 등을 요구하는 활동을 펼칠 계획”이라고 전했다.

한국일보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46220 "샤넬 아니었네?"...제니·장원영·카리나가 사랑한 '중국 브랜드' 랭크뉴스 2025.04.20
46219 안철수 “나경원·김문수·홍준표, 전광훈당으로 가라” 랭크뉴스 2025.04.20
46218 "복권 2580만장 사서 823억 1등"…美로또 '당첨확률 구멍' 있었다 [세계한잔] 랭크뉴스 2025.04.20
46217 이달 들어 18배 오른 이재명 테마주, 하루아침에 급락한 이유는 랭크뉴스 2025.04.20
46216 ‘곡우’ 봄비 그친 뒤…낮 최고 27도 이른 더위 랭크뉴스 2025.04.20
46215 '오마카세' 대신 '애슐리'가요...잘파세대도 달라졌다 랭크뉴스 2025.04.20
46214 안철수, 나경원·김문수·홍준표 겨냥 “전광훈과 아직도 함께하냐” 랭크뉴스 2025.04.20
46213 식당 열려거든 ‘쉬운 일’만 찾지 마세요, 모방당하기도 쉽습니다 랭크뉴스 2025.04.20
46212 이재명 부활절 메시지 “제대로 쓰임 받는 참된 일꾼 될 것” 랭크뉴스 2025.04.20
46211 제네시스 최초 '오픈카' 양산 초읽기…"기술적 문제 없어" 랭크뉴스 2025.04.20
46210 검찰 개혁이 바로 내란 종식이다 랭크뉴스 2025.04.20
46209 검찰 ‘김건희 공천개입 의혹’ 김상민 전 부장검사 조사 랭크뉴스 2025.04.20
46208 “백종원과 이상한 소문이 많아서”…'연돈' 사장 직접 입열었다 랭크뉴스 2025.04.20
46207 [르포] “1년에 200만번 테스트로 셋톱박스 오류 잡는다”… LGU+ 대전 R&D센터 가보니 랭크뉴스 2025.04.20
46206 "나라가 안하면 나라도 하자"…싱크홀 지도, 시민들이 직접 만들었다 랭크뉴스 2025.04.20
46205 "핸들 조작 미숙?"…상가 2층에 매달려 있는 SUV, 무슨 일? 랭크뉴스 2025.04.20
46204 국민의힘 경선 흔드는 ‘보이지 않는 손’? 랭크뉴스 2025.04.20
46203 푸틴, 30시간 '부활절 휴전' 일방 선언... 우크라 "30일 휴전해야" 랭크뉴스 2025.04.20
46202 "평소보다 귀가 잘 안들린다면"…나이들수록 '이것' 발병 위험 커진다 랭크뉴스 2025.04.20
46201 동두천 주택서 화재…10대 숨진 채 발견 랭크뉴스 2025.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