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보이는 4000만원대 자동차들
| 정우성현대 펠리세이드
약 10년 전, 자동차를 고를 때 가장 재미있는 가격대는 3000만원대였다. 1000만원 전후로는 경차를 살 수 있었다. 2000만원대에서는 아반떼로 대표되는 현대차·기아의 준중형 세단을, 올해로 출시 40주년을 맞이한 쏘나타도 2000만원대에서 시작했다. 3000만원대로 넘어가면 조금씩 화려해졌다. 쏘나타에 모든 옵션을 넣거나 그랜저를 고를 수도 있었다. 몇몇 수입차들도 3000만원대에서부터 구매할 수 있었다. 추억의 3000만원대. 실용과 취향 사이에서 한껏 쇼핑할 맛이 나는 가격대였다.
‘풀옵션’ 유혹에 휩쓸리지 말고
기본 팰리세이드의 ‘공간’ 누리길
국산·수입 콤팩트 전기 SUV 중엔
볼보 EX30·기아 EV3 눈에 띄어
과소평가된 르노 그랑 콜레오스와
폭스바겐 골프도 안정적 주행성능
이제 강산도 변했고 자동차는 비싸졌다. 지금 가장 살 만한 경차인 캐스퍼의 가격은 어찌어찌 옵션을 고르다 보면 2000만원을 넘는다. 아반떼는 3000만원, 쏘나타는 3000만~4000만원대까지 간다. 3000만원대에서 느끼던 일종의 재미는 이제 4000만원대에서 누릴 수 있게 됐다. 참 다양한 국적과 장르의 자동차들이 그 가격대에 몰려 있다. 그래서 몇 대만 추려봤다. 최근 출시해 경험했던 모델 중, 가장 돋보이는 개성과 쓸모로 추천할 만한 4000만원대 자동차들.
욕심을 버리면, 신형 팰리세이드
현대자동차가 팰리세이드 풀체인지를 내놓은 건 지난 1월15일. 12월25일 사전계약 첫날 3만3567대가 계약됐다. 2월9일에는 4만5000대를 기록했다. 역대급 흥행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이 가격에 이런 공간과 편의와 감각까지 누릴 수 있는 차가 없어서다.
디자인은 진일보했다. 직선을 과감하게 쓰고 수직적인 면을 더해 기함다운 격을 갖췄다. 크기도 더 커졌다. 전장은 65㎜, 전폭은 5㎜, 전고는 55㎜, 휠베이스는 70㎜나 늘었다. 여기서 집중해야 하는 수치는 휠베이스 70㎜다. 앞바퀴와 뒷바퀴 사이 거리를 휠베이스라고 하는데, 이 수치가 곧 실내공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게 7㎝나 길어진 덕에 팰리세이드의 실내는 그야말로 광활한 수준이 됐다. 그 공간을 일종의 거실 삼아 시트를 놓으니 7인승과 9인승 모델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 완성도 높은 인테리어 디자인은 그야말로 팰리세이드의 백미다.
좀 괜찮은 옵션으로 팰리세이드를 가지려면 5000만원을 훌쩍 넘게 써야 하는데 왜 4000만원대 운운하고 있냐는 생각이 든다면 두 가지 조언을 하고 싶다.
첫째, 욕심을 버리고 둘째, 다수가 선택하는 옵션에 휩쓸리지 말고 자기 필요에 집중해야 한다. 한국 시장은 호사스럽다. 팰리세이드를 구매하는 사람의 60%가 최상위 트림인 캘리그래피를 산다. 7인승 2륜 모델 캘리그래피 트림은 무려 5794만원부터 시작하는데도. 4륜은 6034만원이다.
그러니 진정하고, 여기서는 7인승 2륜구동 모델의 기본형 트림인 익스클루시브에 주행보조장치 옵션과 전동 시트, 천연가죽 시트 등을 포함한 패키지에 정품 블랙박스인 빌트인캠 옵션만 더해 4866만원에 끊어보기를 추천하고 싶다. 그래도 본질에 가까운 팰리세이드를 누릴 수 있다. 핵심은 공간이라서다. 현대가 그것 하나만은 기가 막히게 준비했으니 안락하게 누리시라는 뜻이다. 풀옵션이 아니라도 이미 알차다.
콤팩트 전기 SUV 시장의 각축전
이 시장에서는 좀 기묘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국산차와 수입차가 뒤섞인다. 실용, 감각과 재미 사이에서 더 첨예하게 고민해야 한다.
볼보 ex30
일단 볼보의 승부수, EX30의 존재감이 또렷하다. 상위 트림인 EX30 울트라의 가격이 5000만원대 초반인데 보조금을 더하면 4000만원대 후반에 안착한다. 인증 주행가능거리는 351㎞지만 실제로 달려보면 400㎞ 정도를 거뜬히 소화한다.
승차감은 최상급이다. 달리는 맛도 상당하다. 이 크기의 전기 SUV에서 흔히 기대하는 정도를 우습게 초월하는 감각을 완성해냈다. 여기에 내외관에 짙게 새겨져 있는 지속가능성의 북유럽 감각까지. 이 매력을 알아본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지난 3월, 유럽 수입차 중 판매 1위가 바로 EX30이었다.
기아 EV3
하지만 EX30이 눈에 들어왔다면 기아 EV3를 외면하기도 힘든 게 현실일 것이다. EV3 롱레인지의 주행가능거리는 무려 501㎞에 달한다. 한국 시장에서 (이상하게) 중요시하는 서울~부산 거리를 넉넉히 주파할 수 있다. 가격은 트림에 따라 4000만원대 초반부터 5000만원대 초반까지 포진해 있다. 보조금을 고려하면 4000만원대에 충분히 살 수 있는 가격. 디자인은 요즘 부쩍 과감해진 기아차 라인업 중 가장 안정적이다. 비교적 작은 장르지만 앉아보면 충분하고, 200마력을 살짝 넘는 힘도 어디서나 모자라지 않다. 승차감은 푹신하기까지 해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을 것이다. 이 정도로 두루두루 대중적인 감각을 완성할 줄 아는 것도 기아차의 저력일 것이다.
미니 에이스맨
이런 시장에 미니는 에이스맨이라는 이름으로 출사표를 던졌다. 에이스맨은 미니 최초의 전기차 전용 모델이자 일종의 크로스오버. 전통의 해치백인 미니쿠퍼 3도어와 SUV 컨트리맨 사이에서 꼿꼿하게 균형을 잡는다. 미니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에이스맨을 ‘애있으맨’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야말로 ‘애(가)있으면’ 살 수 있는 미니라는 뜻이다. 그럴 법한 별명이다. 뒷문도 있고 뒷좌석 공간도 인색하지 않아서다. 미니 특유의 재미와 흥분을 고집스러운 수준으로 구현해냈다. 세계 최초로 장착한 원형 OLED 디스플레이는 삼성의 것. 지름은 무려 24㎝에 달하고, 그 안에서 펼쳐지는 그래픽과 기능의 향연도 단연 흥미롭다. 주행보조기능과 스피커 등의 기능이 빠져 있지만 이 느낌 그대로 즐길 수 있는 트림의 가격이 4000만원대 후반부터 시작이다.
뉴 르노 그랑 콜레오스
개성과 실속을 동시에 챙기고 싶다면?
최근 시장에서 확실한 두각을 보이는데 과소평가받는 모델들을 특별히 언급해두고 싶다. 일단 르노의 야심작 그랑 콜레오스. 현대 싼타페와 기아 쏘렌토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장에서 특유의 침착함으로 시장을 넓혀가는 중이다. 그랑 콜레오스의 감각은 놀라운 수준의 중용에 가깝다. 경쾌함보다는 성숙함. 푹신하지도 단단하지도 않지만 프랑스 회사 특유의 주행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정도의 승차감이 그야말로 안정적이다. 가격도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욕심을 버리면 3000만원대에서도 고를 수 있다. 가장 최근에 출시한 최상위 트림의 블랙에디션인 에스프리 알핀 누아르에 옵션을 넣어봐도 4000만원대 중반을 넘지 않는다. 하이브리드를 골라도 4764만원 정도. 이 가격에 이런 주행성능과 디자인을 누릴 수 있다? 그랑 콜레오스가 유일하다.
폭스바겐 골프
마지막으로 폭스바겐 골프 8.5세대(8세대 페이스리프트 모델)의 존재감을 외면할 수 없다. ‘해치백의 교과서’ 같은 말은 굳이 꺼낼 필요도 없다. 골프는 지난 50년 대대로 훌륭하지 않았던 역사가 없었으니까. 그 모든 역사를 기반으로 가장 새로운 모델인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다. 여전히 정확하다. 어디 하나 넘치지 않고 간결해서 오래 보면 볼수록 예쁘다. 유일한 장벽은 디젤엔진뿐일 텐데, 그건 디젤엔진 자체의 잘못이라기보다 요즘 유행이 가솔린과 하이브리드이기 때문이다. 폭스바겐 골프의 2.0 TDI 엔진은 유로 6의 엄정한 환경 기준을 충족하면서도 놀라운 연비와 힘을 뽑아낸다. 시내 주행이 보통인 소비자라도 강변북로나 올림픽대로를 잠깐만 달려보면 ℓ당 20㎞를 우습게 넘는 수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굽잇길에서의 조향 감각과 주행성능까지 시시각각 느끼고 나면 아마 나름의 기준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차’의 존재감이란 이런 거라고, 폭스바겐 골프가 50년째 가르친다.
자동차는 많고 지갑 사정은 (언제나) 제한적이다. 갖고 싶은 차를 다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으니 상한선을 정해두고 최대 행복을 좇는 편이 지혜로울 것이다. 다만 너무 많은 말을 듣지는 말 것. 마음이 가는 몇개의 선택지를 골라 직접 보고 서두르지 말 것. 마음에 쏙 드는 재킷 한 벌을 고르는 마음으로 한 대 한 대 경험해볼 것. 그렇게 고를 수 있을 것이다. 오래오래 나와 함께할 단 한 대의 자동차를.
▲정우성
유튜브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더파크’ 대표, 작가, 요가 수련자. 에세이집 <내가 아는 모든 계절은 당신이 알려주었다> <단정한 실패> <산책하듯 가볍게>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