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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필사, 독방서 문장 연마하던 과거와 다른 결
필사한 문장으로 자신 드러내고 타인과 연결 도모
전문가, ‘필사 붐’과 ‘필사 책 붐’은 구별해서 봐야
오프라인 필사 모임에 참여해 함께 필사하는 20대 여성. 필사 모임에 참여하는 이들은 대부분 여성이다. ‘인팩트’ 제공

“내가 이번주 내내 일기를 안 쓴 것은 윤석열 탄핵 판결문을 필사하기 위함이었다.” “판결문 필사해야지 (…) 제일 이쁜 만년필과 잉크 꺼낼 거야.” “출판사, 빨리 움직여서 헌재 판결문 필사 책 내주세요.”

지난 4일 오전 11시25분.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고 선언한 지 3분 만에 엑스(X·옛 트위터)에는 헌재 결정문을 필사하러 가겠다는 글들이 속속 올라왔다. 빈말이 아니었다. 그날 저녁부터 엑스에는 결정문 일부 혹은 전체를 손으로 베껴 쓴 사진이 게재됐다. 결정문 전문을 A4용지 크기 격자무늬 종이 5장에 빼곡히 적은 한 이용자는 “오기가 있어 종이를 (덧)붙인 건 비밀”이라고 했고, 또 다른 이는 “2시간30분이 걸렸다, 손이랑 등허리가 너무 아프다”는 후기를 남겼다.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윤석열 대통령 파면 같은 국가적 ‘경사’를 ‘필사’로 기념하는 일은 이제 자연스러운 풍경이 됐다. 과거 필사는 작가 지망생의 단골 글쓰기 훈련법이었다. 흠모하는 작가의 작품을 통째로 노트에 베껴 쓰며 문장에 대한 감각을 몸으로 익혔다. 요즘 필사는 다르다. 2030 청년들은 필사를 예고하고, 필사 인증샷과 함께 짧은 소회를 공유하며 ‘연결감’을 느낀다. 따라 쓴 문장으로 나의 정체성, 감정, 인식, 지향점을 드러내고 타인과 연결을 도모한다. 과거 ‘고독한 연마’에 가까웠던 필사가 ‘사회적 연결’이라는 새로운 층위를 지닌 행위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에스엔에스(SNS)에서 ‘필사스타그램’을 검색하면 수십만건의 게시물이 뜨고, ‘필사 모임’ 멤버를 모집하는 글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파면이 결정된 이후 엑스에 올라온 헌법재판소 결정문 필사본. 노트 9장을 빼곡히 채웠다. 엑스 갈무리

“혼자 쓰고 읽으면 작가와의 대화에 머무르지만, 함께하면 타인과 대화까지 할 수 있잖아요. 다른 사람이 어떤 문장을 수집하고, 어떤 문장을 스킵(skip)하는지 알면 자기 시야를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미현(26)씨는 온·오프라인 필사 커뮤니티 ‘인팩트’(inpact)를 1년째 운영하고 있다. 필사 모임 참여를 희망하는 이들을 4~5명씩 그룹으로 묶어 주 1회 2개월 동안 모임을 이끈다. 참가자들은 모임 전날 자정까지 필사 인증사진과 함께, 이 문장에서 뽑아낸 질문 2개를 제출한다. “보통 자기 상황과 맞닿아 있거나, 감정을 대신 표현해 주는 문장들을 필사하잖아요.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기의 감정이나 사고를 드러내게 되고, 이에 대해 대화를 나누다 보면 더 깊은 사유로 나아가게 되는 것 같아요.”

이씨가 서비스를 론칭한 건 지난해 4월10일. 필사하는 경험을 타인과 나누고 싶어서였다. 직장을 관두고 떠난 9개월간의 세계여행에서 발견한 건 필사라는 세계였다. “여행 중에 홀로 있을 땐 주로 전자책을 읽었는데, 좋은 글귀들이 그냥 날아가는 게 아쉬웠어요. 실물로 남겨두고 싶어서 노트에 적기 시작했죠. 나중에 보니 이 노트가 저라는 사람의 ‘유산’이 되더라고요. 문장을 따라 적을 당시 나의 마음, 내가 처한 상황, 나를 성장하게 만들어준 글귀들이 모인 거니까요. 혼자 해도 이렇게 좋은데, 함께 하면 얼마나 더 좋을까 싶었어요.”

지난 2일 밤 9시30분 화상채팅으로 진행된 필사 모임에서는 ‘두려움’에 대한 진솔한 대화가 오갔다. 창업을 앞둔 한 20대 참여자는 “최근 한달 동안 모닝 페이지(아침 일기)를 봤더니 이틀 빼고는 전부 ‘두렵다’로 시작하더라”라며 “그래도 이 모임 덕분에 책을 읽으면서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고민할 수 있었다”고 했다.

최근 취업한 또 다른 모임원 정윤경(25)씨도 “요즘 ‘무섭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막 직장에 들어간 터라 실전에서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며 “(용기란, 두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보는 것’이라는 문장을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다”고 했다. 반년 가까이 필사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그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어느 순간 ‘삶’ 자체에 대한 생각을 아예 안 하고 (사고의) 진공 상태로 살아가고 있더라”라며 “필사 모임을 하다 보면 베껴 쓸 문장을 찾아야 하니 책을 뒤적이게 되고, 그렇게 삶의 의미나 작은 깨달음에 관한 문장을 찾으면 직접 손으로 써보면서 ‘이 문장대로 살아야지’라고 다짐한다”고 했다. 그는 “이제야 머리에서 (삶에 대한 생각이) 뽀글뽀글 기포가 올라오는 상태”라고 했다. 이날 모임에서 참여자들은 두려움을 돌파했던 경험과 소소한 노하우, 이와 관련한 문장들을 밤이 깊어가도록 공유했다. 한 참여자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나만 두려운 건 아니구나!’ 싶어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고 했다.

지난 1년간 이 모임을 거쳐 간 이들은 80여명. 연령대는 스물세살부터 서른여덟살까지로 80%는 직장인 20%는 프리랜서라고 한다. 역대 남성 참여자는 단 한명뿐일 정도로 여성이 절대다수다. 이씨는 “독서 시장도 그렇고 요즘 모든 이벤트나 모임은 2030 여성이 압도적이라고 하더라”고 했다. 각자가 자유롭게 책과 문장을 고르는 방식이어서 소설, 철학 등 다양한 장르의 책들이 다뤄지지만 ‘필사책’(짧은 문장과 함께 필사할 공간을 따로 마련한 책)을 가져오는 이들은 의외로 많지 않다고 한다. 실제 올해 이 모임에서 다뤄진 책 가운데 ‘필사책’은 없었다.

참여 인원 가운데 30%가량은 재등록자. 이씨는 “서비스 개시 이후부터 최근까지 싱가포르에서 꾸준히 참여한 직장인도 있다”며 “필사는 나를 더 나은 삶으로 데려다준다, 문장을 흘려보내지 않고 곱씹으면서 더 나은 태도를 다짐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프라인 필사 모임에 참여해 함께 필사하는 20대 여성. 필사 모임에 참여하는 이들은 대부분 여성이다. ‘인팩트’ 제공

청년들은 왜 필사를 할까. 이들의 끄적임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어내야 할까. 유튜브·팟캐스트 ‘정신과의사 뇌부자들’을 운영하는 김지용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우리 사회가 저성장으로 진입하고 최근엔 정치·경제적 혼란도 극심하면서 ‘불안’이 우리 사회의 지배적 정서가 됐다”며 “이들이 필사하는 문장에는 불안에 대처하는 방법에 관한 것들이 있을 것이다. 일종의 ‘자기 처방’인 셈”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글쓰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며 부정적으로 흘러가(‘재앙화’)는 생각을 끊어줄 수 있는 방법”이라며 “필사는 일단 긍정적인 문장들을 접하기 때문에 그것 자체로도 좋고, 몰입을 유발해 도파민·세로토닌을 분비시켜 뇌과학적으로도 유익하다”고 설명했다.

‘아무튼, 명언’(위고, 2025)을 펴낸 하지현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건국대)는 필사 열풍을 일종의 “반작용”으로 규정했다. 하 교수는 “빠르고, 방대하고, 효율적인 것 중심으로 흘러가던 삶에 지친 현대인들이 비효율을 의도해 적은 정보량을 취하는 현상”이라고 했다. 쉴 새 없이, 실체 없이 스쳐 가는 정보 속에 방치된 한국인들이, 한 줌이라도 실체가 확실한 것을 갈구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젊은 세대의 필사에 대한 관심을 얼어붙은 출판 시장을 덥히는 군불로 활용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대형 오프라인 서점은 아예 ‘필사책’ 코너를 전면에 배치했고, 민음사는 올해 처음으로 ‘세계문학 일력 앱’을 선보이면서 모바일 필사 기능을 주요하게 홍보했다. 출판사들은 백리스트를 활용한 ‘필사책’ 제작에 뛰어들었다. 실제 한겨레가 온라인 서점 예스24에 의뢰해 뽑은 데이터를 보면, 필사책 출간 종수는 2023년 113종, 2024년 181종으로 1년 만에 60.1% 증가했다. 올해도 3월25일까지 96종이 출간돼 이미 지난해의 절반을 넘겼다. 같은 기간 전체 신간 발행 종수가 6만2865종(2023)에서 6만4306종(2024)으로 소폭(2.3%) 늘어난 데 견주면(대한출판문화협회), 필사책 출간만 큰 폭으로 늘어난 것이다.

지난달 서울의 한 대형 오프라인 서점에 차려진 ‘필사책’ 매대. 최윤아 기자 [email protected]

전문가들은 필사책 쏠림 현상을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홍순철 비씨(BC)에이전시 대표는 “장기화된 출판 시장 불황으로 기획 비용을 아끼려는 출판사가 너도나도 필사책 발간에 뛰어들고 있다”며 “장기적으로 보면 출판계 스스로 기획력을 저하시키는 자충수가 될 수 있다”고 했다. 필사책 출간 붐은 우리나라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현상이라는 점도 짚었다. 홍 대표는 “국외 저작권사한테 ‘필사책’의 개념을 설명하는 데 애를 먹었다”며 “공책을 사서 필사하면 되지 도대체 ‘필사책’이 왜 필요한 거냐고 자꾸 되묻더라”고 했다.

국내외 책방을 두루 방문하며 ‘유럽 책방 문화 탐구’(2024) 등의 책을 펴낸 한미화 출판평론가는 “유럽, 일본의 여느 책방에서도 필사책을 본 적이 없다”며 “일본에는 ‘질문 책’(독자 스스로 질문에 답하게 만든 책) 같은 일종의 워크북이 있지만, 필사책처럼 일방적으로 따라 쓰는 형태는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특정 책이 유행하면 출판사가 우르르 따라서 내고, 깊이 없는 내용에 실망한 독자가 떠나는 패턴이 출판계에서 반복돼왔다”며 “한 권의 책 안에서 독자가 작가의 문장을 재해석하고 스스로 메시지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필사가 이뤄져야 의미 있는 것이지, ‘좋은 말’만 나열된 필사책이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지 회의적”이라고 했다. 독서가 선행되지 않은 필사가 독자 저변 확대로 이어질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어린이 필사책은 정말 ‘재앙’”이라며 “아이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문장만 나열되어 오히려 독서에 흥미를 반감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두 출판평론가가 언급한 것처럼 최근의 필사 열풍은 우리나라에서만 포착되는 독특한 현상이다. 한국의 필사 열풍을 다룬 몇몇 외신 기사에서 마땅한 어휘를 찾지 못해 필사를 소리 나는 대로 ‘pilsa’로 옮길 정도다. ‘transcription’ ‘copying’ ‘handwriting’ 같은 단어들은 필사라는 행위를 정확히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구글에서 ‘pilsa’를 검색하면 ‘책의 특정 단락을 손으로 써보는 한국인의 행위’라는 설명이 뜬다. 한국인은 왜 필사하는가. 필사책은 정녕 필사를 더 풍요롭게 하는가. 한국인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필사의 고민’은 이제 막 시작됐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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