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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릴리 댄시거 '여자의 우정은 첫사랑이다'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스틸컷.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여섯 살 때, 처음으로 러브레터를 보냈다."

미국 작가 릴리 댄시거의 '첫사랑'은 한 살 차이 사촌동생 사비나였다. 사비나가 사는 뉴욕에서 약 5,000㎞ 떨어진 샌프란시스코로 이사할 때는 "첫 실연을 겪었다"고 할 정도였으니. 2010년 댄시거는 사비나를 영영 잃고 만다. 당시 스물한 살 생일을 앞두고 사비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던 이웃 사는 18세 남성에 의해 강간 살해당한다. 이후 수년간 댄시거는 사비나에 대해 뭐라도 쓸 준비를 차렸다.
"마침내 사비나에 관해 쓰려고 자리에 앉았을 때 흘러나온 이야기는 살인 이야기가
전혀 아니었다. 그건 사랑 이야기였다."


"내 관심은 살인자 아냐"



댄시거가 최근 펴낸 에세이집 '여자의 우정은 첫사랑이다'는 사비나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 그것으로 끝맺는다. 상실의 끝에서 사랑을 기억하기 위해 쓴 가장 문학적인 에세이다. "비극은 우리로 하여금 한 사람을 더욱 사랑하게 만들"기에 당연한 귀결이었다.

처음에 댄시거는 훗날 자신이 살인 사건 회고록을 쓸 것이라 확신하고 관련 서적을 사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깨달았다. 살인범의 어린 시절이나 그가 범행을 저지르는 동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알고 싶지 않다는 것을. 대부분의 범죄 실화 속에서 살인자는 능동적으로 존재하면서 오히려 독자들을 매혹시키곤 한다.

반면 피해자는 이미 죽어버린 뒤다. 글로 아무리 잘 옮겨낸들 납작하고 수동적인 인물로 그려질 수밖에 없다. "내가 사비나를 그저 남성의 폭력을 다룬 이야기 속 죽은 소녀로 축소하지 않고 그 애에 대해 쓸 수 있을까?"

여자의 우정은 첫사랑이다·릴리 댄시거 지음·송섬별 옮김·문학동네 발행·292쪽·1만7,500원


'여자의 우정'... 세상 가장 다정하고 복잡한 관계



사비나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깊은 상실감에 빠진 댄시거는 여자친구들과의 우정을 되짚어 나간다. "나는 친구들에게 늘 보호 본능을 느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을 지켜주는 일이라는 걸 나는 늘 알고 있었다." 그는 "사랑하는 여자들을 가까이 끌어당겨 꼭 안고, 그들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도록 내 시야에 두고 싶었다"고 털어놓는다.

12세 때 헤로인 중독자였던 아버지를 잃고 방황하던 시절에도 그의 곁엔 친구들이 있었다. 친구들은 학교 수업을 빠지고 약에 취하기도 했던 그를 무릎 위에 앉히고 눈물을 닦아줬다. 그는 "친구들끼리 엄마 노릇을 해주는 형태의 돌봄은 내가 십 대 시절 공원에 죽치고 지내던 친구들과 서로 돌보던 시절 배운 사랑의 방식이었다"고 돌이켰다.

"지구 반대편에 있어도 우리는 같은 달을 바라볼 거야" "너는 내 피고, 가족이고, 최고의 친구야"라며 열렬하던 관계도 때로는 모질게 끝나버리기도 했다. 저자와 학창 시절 일탈의 공모자였던 헤일리는 결국 각자의 길을 가게 되는데, 오로지 서로에게만 강렬히 집중하던 시기를 통과한 이후 삶의 변화에 서로 적응하지 못한 탓이었다.

릴리 댄시거. 댄시거 홈페이지 캡처


"첫사랑은 다른 사랑들 곁에서 계속돼"



책은 사적이고 내밀한 경험을 넘어 십 대 소녀들의 관계를 둘러싼 편견을 깨고, 문화 비평도 시도한다. 실비아 플라스(1932~1963), 아나이스 닌(1903~1977) 등 영원한 청춘의 아이콘이 된 여성 예술가들이 이들의 감수성 형성에 미친 영향에도 주목하면서다. 댄시거와 친구들은 플라스의 자전적 소설 '벨 자'와 시집 '에어리얼'을 신봉했다. 닌이 프랑스 파리에서 쓴 일기를 읽었다. 어디를 가든 몸에 노트를 지녀 소설과 시를 쓰고 돌려봤다. 여백에는 서로 감상과 응원도 남겼다. 플라스 이전에 버지니아 울프와 에밀리 디킨슨, 브론테 자매가 있었다면, 이후에는 팝의 아이콘인 피오나 애플, 셜리 맨슨, 코트니 러브로 이어지는 그 계보다.

"낭만적 사랑에는 한 번에 하나의 사랑만 한다는 기대가 담겨 있다. 그러나 자매애는 다수를, 겹침을, 맞물림을 허용한다. 사랑의 기준이 되는 첫사랑은 그 뒤를 따르는 모든 다른 사랑들 곁에서 계속된다." 나의 첫사랑은 누굴까 떠올리게 된다. 교환 일기를 쓰고, '우정은 날개 없는 사랑의 신이다' 따위 경구를 눌러쓴 편지를 주고받던 그 시절 소녀들이라면 특히 더 공감할 책이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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