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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바람의 손자' 이정후

편집자주

최근 가장 '핫'한 스포츠 이슈를 찾아 주요 인물의 스포츠 인생을 정리해보는 코너입니다. 프로 무대의 스타플레이어를 비롯해 아마추어 '신성', 지도자, 체육단체장 등 하루하루 숨 가쁘게 변화하는 스포츠 세상 속에 사는 인물들을 다양한 관점에서 들여다봅니다.

샌프란시스코 이정후가 지난달 31일(한국시간)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그레이트 아메리칸 볼파크에서 열린 2025 메이저리그 신시내티와 경기에서 8회초 내야 안타를 친 후 1루로 달리고 있다. 신시내티=AP 뉴시스


'바람의 손자' 이정후(27·샌프란시스코)가 돌아왔다. 지난해 5월 어깨 부상 후 긴 휴식을 가졌던 이정후는 올 시즌 시범경기부터 타격감을 끌어올리더니 18일 현재 시즌 타율 0.348로 맹타를 휘두르고 있다. 9개월간 그라운드를 밟지 못한 아쉬움을 털어버리기라도 하듯 메이저리그 전체 2루타 부문 1위(10개)에 오르는 등 연일 방망이를 매섭게 돌린다. 현지에선 이미 타격왕을 점치는가 하면 최우수선수(MVP) 후보로도 거론하고 있다.

아버지 '바람의 아들' 이종범 KT 코치의 후광에서 벗어나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세계 최고의 무대에 우뚝 선 이정후를 '이달의 스포츠 핫 피플'에서 훑어봤다.

2016년 휘문고 3학년 이정후가 제44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8강전에 출전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떡잎부터 달랐던 이정후


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 배트를 잡은 이정후가 처음 언론의 주목을 받은 건 2014년 휘문고 1학년 시절 출전한 한국일보 봉황대기에서다. 1학년은 으레 벤치를 지키기 마련인데, 이정후는 달랐다. 실력으로 주전 자리를 꿰차더니 타율 0.330을 기록하며 휘문고의 창단 첫 봉황대기 우승에 큰 역할을 해냈다. 특유의 콘택트 능력과 빠른 발, 탁월한 작전 수행 능력은 이때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휘문고는 2년 뒤 또 한 번 봉황대기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는데, 대회를 통해 자신의 가능성을 엿본 이정후는 대학 진학이 아닌 프로 진출을 택했다. 이정후는 훗날 이때를 돌아보며 "(봉황대기가) 대학 갈 생각만 했던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들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2017년 1차 지명을 통해 넥센(현 키움)에 입단한 이정후는 '고졸 즉시전력'으로 급부상했다. 프로 입단 후 보통 퓨처스리그(2군)에서 적응 기간을 거치는 통과의례 따윈 그에게 필요없었다. 데뷔 첫해 개막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더니 고졸 신인 최초로 시즌 전 경기(144경기)에 출전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냥 뛰기만 한 게 아니다. 타율 0.324 2홈런 47타점 111득점으로 신인 최다 득점을 기록한 건 물론이고, 역대 신인 최다 안타 신기록(179개)도 갈아치웠다. "19살이 마치 베테랑처럼 야구를 한다(김태형 당시 두산 감독)"는 찬사가 쏟아진 이유다.

그해 신인상은 자연스레 이정후의 몫이 됐다. 고교 졸업 후 입단 첫해 신인상을 받은 건 2007년 임태훈(당시 두산) 이후 10년 만이다.

2010년 당시 KIA 소속 이종범과 아들 이정후가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KIA 제공


'바람의 아들'을 뛰어 넘은 '바람의 손자'


이때까지만 해도 아버지의 후광이 더 컸다. 어딜 가나 '이종범 아들'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하지만 이정후는 담담했다. '아버지의 그늘이 부담스럽지 않으냐'는 질문에 이정후는 늘 "장차 아버지를 뛰어 넘는 선수가 되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혔다.

다짐은 현실이 됐다. 이정후는 '야구인 2세들은 아버지를 뛰어넘기 어렵다'는 정설을 시원하게 깨부쉈다. 데뷔 2년 차에 생애 첫 골든글러브를 꼈고, 3년 차인 2019년엔 팀의 한국시리즈(KS)행을 이끌며 플레이오프 최우수선수(MVP) 영예를 안았다. 한국야구위원회(KBO) 사상 첫 '플레이오프 부자(父子) MVP' 탄생을 알리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이종범 코치는 1993년과 1997년에 한국시리즈 MVP를 받았다.

2021년 12월 2일 서울 호텔 리베라에서 열린 2021 제9회 한국프로야구 은퇴선수의 날 시상식 행사에서 키움의 이정후(왼쪽)가 아버지 이종범 한국프로야구 은퇴선수협회 부회장으로부터 '최고의 선수상'을 받은 뒤 기념촬영하고 있다. 뉴시스


2021년엔 한층 더 성장했다. 이정후는 그해 10월 아버지도 하지 못한 사이클링히트(한 경기에서 단타, 2루타, 3루타, 홈런을 모두 기록하는 것)를 쳐내는 진기록을 세웠고, 홈런 15개를 쳐내며 장타력을 과시했다. 그렇게 데뷔 5년 만에 타격왕(0.360)을 거머쥐었고, '세계 최초 부자 타격왕' 타이틀을 완성했다. 이종범 코치는 데뷔 2년 차였던 1994년 해태에서 타율 0.393으로 타격왕에 올랐다. 당시 이정후는 "아버지의 이름표를 떼고 내 이름으로 야구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다"는 소감을 밝혔다.

1년 뒤엔 고대했던 정규시즌 MVP까지 섭렵했다. 국내 선수가 시즌 MVP를 받은 건 2018년 김재환(두산) 이후 4년 만이다. 신인왕과 시즌 MVP를 모두 수상한 것도 류현진(2006년 신인왕·MVP), 서건창(2012년 신인왕·2014년 MVP)에 이어 역대 3번째다. 덕분에 국내 프로야구 최초 '부자 MVP'라는 새 역사도 썼다. 이정후는 시상식에서 "오늘부터 '이종범 아들'이 아닌 이정후로 살겠다"며 아버지의 그늘에서 완전한 독립을 선언했다.

이정후가 2023년 10월 10일 키움에서 마지막 경기를 뛰고 있다. 키움 제공


KBO 출신 선수 사상 최대 몸값으로 MLB 진출


6년간 KBO리그를 집어삼킨 이정후는 2023년 MLB 진출을 선언했다.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그가 MLB 진출을 선언한 지 하루도 안돼 메이저리그 시장이 엄청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인 MLB닷컴은 톱을 이정후로 장식했고, 그를 'KBO 최고의 퓨어 히터(타율이 높고 삼진을 잘 당하지 않는 타자)'라고 소개했다. 콘택트 능력에 대해선 MLB의 전설적인 '배드볼 히터' 블라디미르 게레로에 비견된다고 평가했다.

메이저리그 샌프란시스코에 입단한 이정후가 2023년 12월 19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 후 취재진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뉴시스


이정후의 미래 가치를 가장 먼저 알아본 곳은 샌프란시스코다. 구단은 이정후에게 6년 1억1,300만 달러(약 1,485억 원)를 투척했다. KBO리그 출신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면서 받은 계약 액수로 역대 최대 수준이다. 메이저리그에 입성한 아시아 출신 선수 연봉 총액으로도 역대 두 번째다. 샌프란시스코는 이정후가 4시즌을 뛰면 남은 계약을 해지하고 새 행선지를 찾을 수 있는 '옵트 아웃' 조항까지 살뜰히 넣었다. "계약 금액을 보고 다리가 풀렸다"던 이정후는 "(MLB 진출에 대한) 부담보다는 기대가 크다"며 대담한 면모를 보였다.

샌프란시스코 이정후(가운데)가 2024년 5월 1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의 오러클 파크에서 열린 2024 메이저리그 신시내티와 경기에서 펜스에 부딪쳐 어깨를 다친 뒤 교체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AP 뉴시스


최고의 순간에 찾아온 '부상 악령'


이정후의 메이저리그 데뷔는 순조로웠다. 2024년 개막전에서 첫 안타와 첫 타점을 올리며 멋진 신고식을 치렀고, 샌디에이고와 치른 개막 4연전 3번째 경기에선 메이저리그 첫 홈런을 쳤다. 이후 잠시 주춤하는 듯싶었으나 다시 11경기 연속 안타 행진을 이어가며 한국인 타자로는 메이저리그 데뷔 시즌 기준 최다 연속 경기 안타 기록을 새로 썼다.

그러나 최고의 순간을 향해 달려가던 이정후의 불방망이쇼는 얼마 안 가 중단됐다. 작년 5월 신시내티전 1회초 2사 만루에서 상대 홈런성 타구를 잡으려다 펜스에 부딪히며 어깨를 다친 것. 초반엔 열흘짜리 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데 그쳤지만, 정밀검사 결과 수술을 피하기 어려워지자 구단은 그를 데뷔 50일 만에 '시즌 아웃'시켰다.

미국에서 수술 후 한동안 재활을 거친 이정후는 지난해 10월 씁쓸한 표정으로 귀국했다. 한국에 있는 동안 방송 출연 제의가 많았지만 모두 거절했고 오로지 회복과 재활에만 집중했다. 두문불출했던 그가 다시 나타난 건 올해 1월이다. 스프링캠프에 합류하기 위해 떠나는 그의 발걸음은 유독 가벼웠다. MLB닷컴도 돌아오는 이정후를 향해 '증명해야 할 게 남은 2년 차 선수'라면서도 올 시즌 그의 타율을 0.294로 예측하며 '슈퍼 스타' 오타니 쇼헤이(LA다저스·0.280)보다 높게 잡았다.

샌프란시스코 이정후가 16일 미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의 시티즌스뱅크 파크에서 열린 2024 메이저리그 필라델피아와 경기에서 5회 초 2루타를 치고 있다. 필라델피아=AP 뉴시스


못 말리는 이정후, 이번엔 MLB 전설에 도전


돌아온 이정후는 올 시즌 MLB에서 가장 먼저 두 자릿수(18일 기준 10개) 2루타 고지를 밟으며 범상찮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현 기량을 유지한다면 1936년 찰리 게링거 이후 89년째 깨지지 않고 있는 2루타 60개 벽을 깰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좀 더 나아가면 MLB 전설 얼 웹이 1931년 기록한 역대 빅리그 단일 시즌 최다 2루타 기록(67개)에도 다가갈 수 있다. 2025년 이정후가 또 한 번 판을 뒤집고 대이변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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