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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칠 교수의 일기는 1993년 〈역사 앞에서〉란 제목으로 창비에서 출간됐다. 이 일기는 1945년 11월 29일자 뒤쪽부터 남아 있었는데, 그 앞의 일기가 사라진 것으로 보였다. 유물을 보관하고 있던 필자의 아들 김기목(통계학·전 고려대) 교수가 사라진 줄 알았던 일기를 최근 찾아냈다. 1945년 8월 16일에서 11월 29일(앞쪽)까지 들어 있다. 중앙일보는 이 일기를 매주 토요일 원본 이미지를 곁들여 연재한다. 필자의 다른 아들 김기협(역사학) 박사가 필요한 곳에 간략한 설명을 붙인다.



10월 27일 개다. (토)


어제는 의림지에서 붕어 일곱 마리를 사 가지고 늦게 그곳을 떠나서 강행보로 30리 길을 되돌아서 집에 오니 여덟 시가 지났었다.

신녕조합 김 이사가 서울 갔다 오는 길에 들렀다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연합회 간부는 전부 구금돼 있다는 것이며 지난 15일에 후임 인선표를 당국에 제출했다는 것이며 하(河) 씨 이하 내가 상경하기를 고대하고 있더란 이야기를 들려주고 김 씨도 하루바삐 상경하기를 거듭 권했다. 그러나 나는 중앙에 나가는 것보다도 지방에 있고 싶다는 것이며 그 까닭은 중앙에 나가서 금융조합의 전체적인 향방을 틀어줄 이는 나보다도 나은 분이 얼마든지 있을 터이니 나는 지방에서 단위조합의 운영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금융조합이 새로운 상황에 있어서 가장 잘 살아나가는 것일까를 시범하고 싶다는 내 의욕을 말하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는 나는 중앙에 나갈 만한 그릇이 못 된다고 생각함으로써이다. 왜 그러냐 하면 중앙에 나가서 전선(全鮮) 조합을 지도할 이는 이념만 가져서는 안 될 것이고 그 이념을 실지의 조합 생활을 통해서 여과시킨 원숙 노련한 분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조합 생활의 초년병이니 아무리 혼돈한 과도기이고 조합계에 인재가 적다 할지라도 아직 나에게 있어선 중앙 진출이 시기상조가 아닐까 생각한다. 더욱이 이러한 혼란통에 겯고 틀고 나서서 자기의 실력 이상의 지위를 하나 얻어 보려고 덤비는 친구들이 많음을 생각해볼 때 나도 거기 한 몫 끼이는 것 같아서 아무리 무딘 내 양심일지라도 도저히 그러할 수는 없다고 말하였다.

[해설 : 〈역사앞에서〉 2009년 개정판의 해제에서 정병준은 일제 강점기 금융조합의 성격 및 위상(412-418쪽)과 해방 후의 변화(422-428쪽)를 해설하면서 그 안에서 저자의 위치와 역할을 설명했다. 고위직을 맡아 온 일본인들이 제외되는 상황에서 학식과 문필력으로 두각을 나타내던 저자가 중앙회 요직으로 발탁되는 상황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지금 여러 가지 좋은 길이 우리들의 앞길에 환하게 트였으니 녹록하게 금융조합을 고수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좀 더 보람있는 길로 나아가서 조국의 새 건설에 이바지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제안에 대해선 (그것도 일리 없는 바는 아니지만) 오늘날 조선사람이 비단 조합인만이 아니고 모두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회의 혼란이 조장되고 공소부허(空疏浮虛)한 기풍이 충일(充溢)하는 것이라고 나는 본다.

왜 그러냐 하면 사회의 안정기에 있어서도 어떤 개인이 직업을 바꾸려고 할 때 비록 보다 좋은 길로 나아가는 경우일지라도 마음에 다소의 불안을 느끼는 것은 피치 못할 사실이요 또 새 직장에 가서 자리가 제대로 잡힐 때까지 몇 달 혹은 몇 해 동안은 항상 불안정한 기분이 따르고 새 일이 몸에 배일 때까지는 일의 능률도 저하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오늘날 조선사람은 한두 사람만이 그런 게 아니고 모두가 직장을 바꾸고 직위가 움직여지고 또 그리되려고 애쓰고 어찌할까 하고 망설이고 하기 때문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또 사회 전체가 불안정한 동요 상태를 지속하고 민족 전체의 능률이 저하되고 있다. 이것은 이러한 격동하는 과도기에는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유감스러운 일이다.


민족 흥망의 분기점에 놓인 이러한 중대한 과도기일수록 우리는 한층 더 마음을 도사려서 새 건설의 업에 나아갈 사람은 나아가고 또 나아가야 할 계제가 이르면 누구나 즐겨서 나아가되 그렇지 않은 일반 사람은 지극히 침착냉정한 태도로 직장을 지켜서 자기의 맡은 직장이 혹은 자기의 몸담아 있는 직장이 전에보다도 훨씬 원활하게 운영되어 나가고 또 [설사 자기의 실력에 비추어 걸맞지 않는 것이라 생각되더라도 조금도 마음의 움직임이 없이 지극히 평정한 태도로 그 직장이] 새로운 사태에 적응해서 좋은 새 길을 찾아서 견실하게 나아가도록 해야 하고 이러한 기풍이 조선 전체를 움직여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판국에 이 계제에 어디 좋은 할 일은 없을까 하는 생각을 버리고 일의전심(一意專心) 직장에 버티고 서서 어찌하면 직책을 완수할 수 있을까를 염원해얄 것이다. 보다 나은 날, 자기의 소질에 맞는 길은 이 어수선한 통에 찾으려고 애쓸 것이 아니고 지금은 어디까지라도 자기의 맡은 일에 최대의 능률을 발휘함으로써 새 조선의 건설에 이바지하기로 하고 새 전환, 새 출발은 이 격동기가 지나서 사회가 안정한 후에 서서히 도모하는 것이 진실로 조선을 사랑하는 길이고 참으로 조선을 위한 가장 좋은 길일 것이다.

아침에는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 선생의 이야기.

강 군과 김 씨와 함께 구학공원행.

가는 길엔 농민조합과 이 지방의 정세에 관한 이야기. 공원에 앉아서 폭포 밑 물소용돌이치고 다시 바위에 부딪혀서 부서지는 걸 보니 보면 볼수록 무한한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탁사정(濯斯亭)에선 김 씨가 한자 전폐 운동에 대한 위구(危懼)를 말하기, 나는 장지영(張志映) 씨 이하의 주장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왜 그러냐 하면 문자는 문화의 초석에 지나지 않는데 한문에의 길은 초석을 쌓기에 절대(絶大)한 노력과 시간을 낭비하고 말게 되니 이걸 국민 전체로 본다면 여간한 손실이 아닐뿐더러 문화 건설에 있어 남에게 뒤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하는 중대한 사태에 이를 것이다. 한글에의 길은 아주 쉽사리 굳건한 초석을 쌓고 곧 문화전당의 건설에 착수할 수 있으니 국민 한 사람에게 5, 6년의 한문 학습 기간을 단축함만 하더라도 이루 측량할 수 없는 막대한 이익이고 단기간에 주춧돌을 놓아버릴 수 있음으로 해서 언제든지 남에게 한 걸음 앞설 수가 있다. 또 문맹 퇴치도 한문으로써 하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지만 한글로써 하면 아주 용이한 일이다.


이것은 문화에 있어서의 봉건사상의 지양과 계급 장벽의 철폐를 의미하는 것이며 다시 한 걸음 나아가 문화의 해방과 보급으로 말미암아 흙 속에 묻혀버릴 숨은 천재를 찾아내는 기연이 되어서 우리 새 문화 건설에 끝없는 영행(榮幸)이 약속되는 것이다. 한문과 한글의 남의 것이고 내 것임이 지금과 반대일지라도 오히려 이러해야겠거늘 하물며 불편한 남의 것을 버리고 빛나는 제 보배를 찾아 가짐에서랴.

또 한 가지 일본에 있어서의 한자 전폐 운동의 실패를 비추어서 걱정하나 그건 일본 가나와 우리 한글이 본질적으로 다름을 모르기 때문이다. 가나는 본시 완전한 문자가 아니고 따라서 그것만으로써는 도저히 완전한 기술(記述)을 읽어나갈 수 없고 또 읽어낼 수도 없는 것이다. 즉 문화의 완전한 초석일 수 없다. 그러나 한글은 그와 반대로 비단 완미(完美)한 문자이고 문화의 초석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문자 중에서도 가장 조직적이고 과학적이어서 어떠한 기술이라도 가능함은 물론, 가장 좋은 문화를 이룩할 초석일 수 있음은 내외 학자의 공인하는 바이요 또 우리가 일상 이를 써보아서 잘 아는 사실이다.


이러한 의미로 보아서 일본은 아무리 정치적, 경제적으로 독립했달지라도 문화적으로는 영구히 중국의 식민지임을 면할 수 없지만 조선은 이와 반대로 설사 정치적, 경제적으론 남에게 예속될지라도 우리의 마음가짐에 따라선 문화적으론 언제든지 완전한 독립국일 수 있다. 세계에서도 문화적인 독립국은 그리 많지 못하지만 동양에 있어선 인도와 중국과 조선 뿐이다. 그중에서도 조선의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좋다고들 하니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선 앞으로 문화적으로 세계를 뒤덮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과거에 한문을 하도 숭상하고 한문만으로 문화를 닦아 왔기 때문에 이제 갑자기 한문을 전폐하면 다소의 혼란과 불편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신중한 기술적 조치로써 혼란을 최소한도로 막을 수 있을 것이며 공사(公私) 생활상의 과도기의 불편은 앞으로의 빛나는 새 문화 건설을 위하여 참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내려오는 길엔 금후의 신조선 건설엔 일본의 유신사(維新史)가 좋은 참고가 되리란 말 끝에 강 군이 그 방향의 깊은 온축(蘊蓄)과 정곡(正鵠)한 의견의 개진이 있고 이어서 메이지유신의 성공은 외국세력의 핍박에 의한 국내의 대동단결에 말미암은 것이라고 볼 수 있으니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 38도 문제도 조선사람의 대동단결을 촉진하는 기연이 된다면 전화위복일 것이다. 북조선에 있어서의 소련군의 진주와 거기 따르는 여러 가지 불미한 풍설과 심지어 공장 기계의 반거(搬去) 등 사실은 조선사람에게 공산주의에 대한 반성의 기회를 준 것이고 또 그후 미국(美國) 내지 미병(美兵)에 절대숭앙의 기분이 많았는데 최근 각지에서 들리어 오는 다소의 불상사는 물론 우리 약소민족의 뼈저린 슬픔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러한 일로 해서 외국 내지 외인 숭배열에 대한 한 첩의 청량제가 되었으면 좋겠고 이러한 수난과 시련을 거쳐서 조선사람이 충심으로 외국 의존의 사상을 버리고 진정한 자주독립의 열의를 품게 된다면 그보다 더 다행한 일이 없을 것이다.

[해설 : 이 무렵 일기에서 미국, 미군, 미병의 표기에는 일제 강점기의 용례대로 ‘米’ 자를 썼는데, 이 대목에서만 ‘美’ 자를 썼다.]

낮차로 뜻밖에 이선호 군이 왔다.

여러 해 동안 생각다 못해 하는 수 없이 취한 방책인데 아내는 그런 무리한 짓은 하지 말고 설사 일이 늦어지더라도 일을 바로잡아 나가라고 한다. 그가 의(義) 아닌 일을 싫어하기 때문이겠지만 또한 나를 아낌이리라. 공연히 눈물겨워진다. 기봉이와 이 일기책을 그에게 맡기고 닥쳐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려던 것이 이렇게 그가 먼저 문제를 제기하고 보매 말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저녁에 강 군이 앞으로의 우리 두 사람의 협력에 대해서 진지한 태도로 논의하기를 요청하나 내일에 어떠한 변란이 있을지 모르는 나로선 아무래도 적극적인 의욕을 보여줄 수 없다. 강 군은 내 모호한 태도가 너무도 안타까워서 전에 없이 격앙하기까지 하나 내가 이 세상에서 가지는 유일한 동무에게도 심중을 털어놓고 말치 못하는 내 슬픔이여.

그러나 이 일은 내가 일부러 그에게 숨기려고 의도한 것도 아니다. 나는 그에게 펴지 못할 아무런 뜻도 없다. 어제 의림지 다녀오며 말하려던 것이 그가 끊이지 않고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내기 때문에 겨를을 얻지 못했고 오늘 제천행 기회를 만들어서 이야기하려던 것이 김 이사가 와서 중지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고 그러다가 이 군이 와서 사태는 더 핍박하게 내 몸에 느껴졌고 공교로이 그 판에 강 군은 논의의 적극적인 전개를 요청하니 나로선 흘미주근한 태도를 지닐 수밖에 없이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저편이 강 군인지라, 그가 아무리 격한대도 내 골나지 않고 또 내가 아무리 올차지 못하더라도 그가 나를 의심치 않을 테니 이러한 점으로 보아 어떠한 지경에 이르더라도 그와의 수작에는 마음의 여유를 갖고 나갈 수 있음이 기쁘다. 내 편 사정 모르는 제3자의 눈에는 내 태도가 지나치게 유들유들하게 비쳐질는지 모르나 나는 여기에 우정의 극치를 반추하고 내 모든 슬픔을, 갈수록 형극에의 길로 벗어나지 못하는 내 생애에 대한 가슴 저린 니힐을 잠시 잊을 수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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