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관세 전쟁' 전면전을 벌이고 있는 중국의 새로운 무기로 '짝퉁'이 떠올랐습니다. 지금까지는 조롱의 대상이었지만 이제는 미국 소비자들이 열광하는 명품마저, 실은 중국 없이 만들 수 없다는 걸 일깨우는 무기가 됐습니다. 이중 철문 속 철저한 보안에 가려졌던 중국 짝퉁 시장 취재 경험담부터 관세 전쟁에서 짝퉁의 역습이 갖는 의미까지, 두 편에 걸쳐 풀어보겠습니다. |
"가방이랑 구두 있어요. 한번 볼래요?"
이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앳된 청년이 조심스레 다가와 말을 걸었습니다. 검은색 반소매 티에 크로스로 맨 조그마한 가방은 모서리 부분이 해졌고, 슬리퍼는 때가 탔습니다. 그런데도 브랜드 로고는 선명했습니다. '구찌'였습니다.
기자가 청년을 만난 것은 지난해 중국 남부 광저우의 한 이름난 짝퉁 쇼핑몰 앞 골목이었습니다.
밤늦은 시각이라 이미 쇼핑몰은 불이 꺼진 지 오래였고, 행인 사이를 뚫고 갈지자로 지나는 '도로의 무법자' 오토바이 소리만 요란했습니다.
바짓단이 더러워질까 내내 손으로 잡아 올리고 다녀야 할 만큼 담배꽁초와 쓰레기가 즐비한 거리 모습까지 겹쳐 조금씩 불쾌해지던 찰나 이 청년이 슬쩍 다가온 겁니다.
휴대전화 속에는 각종 유명 브랜드의 명품 가방 사진이 가득했습니다.
기자가 짝퉁 취재를 시도한 중국 광저우 잔시루(站西路)의 낮 전경. 날이 어두워지면 비밀의 방으로 손님을 데려가려는 호객꾼들이 하나둘 나타난다. (사진 출처 : 바이두)
요리조리 골목길에서 몇 번 방향을 틀어 한 오래된 상가 건물에 들어섰습니다.
1층에서는 시계를 파는 점포들이 영업을 끝내고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가자 어스름한 복도 한쪽에 낡은 철문들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가방 판매점이 아니고 꼭 오래된 공단 사무실이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청년은 자기도 열쇠가 없다며 잠시 기다리자고 하더니 동료에게 열쇠를 건네받은 뒤에야 문을 열어줬습니다.
'이제 저 안에 짝퉁 가방이 있는 건가? 좋은 건 명품 브랜드 직원도 구별 못 한다던데….'
그런데 정작 모습을 드러낸 건 고대하던 '비밀의 방'이 아닌 또 다른 철문이었습니다.
이중 철문이라니. 스산한 분위기에 '괜히 왔나' 후회되려는 찰나, 두 번째 철문을 열자 그제야 환한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정면에는 각종 명품 브랜드별 짝퉁 가방이, 왼쪽으로 돌아 들어가자 짝퉁 신발이 보였습니다.
남미계로 보이는 외국인들이 이 신발 저 신발 신어보는데 푹 빠져 있었고, 사람을 보니 그제야 스산한 기분이 좀 가셔 본격적으로 물건을 훑어봤습니다.
신발은 쳐다볼 가치가 없을 정도로 조악했지만, 짝퉁 '가방'으로 특히 유명한 광저우답게 가방은 그럴듯해 보였습니다.
디올, 구찌, 루이비통, 에르메스, 미우미우, 셀린느……진품이라면 수백만 원부터 천만 원을 호가하는 유명 브랜드의 인기 모델들이 색깔별로 갖춰져 있었습니다. '명품'에 문외한이긴 하지만 로고나 장식의 만듦새는 제법 정교해 보였고 가죽도 질이 괜찮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덜컥 집어 들어선 안 됩니다. 짝퉁에도 '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자가 이른바 '비밀의 방'을 찾아가면서까지 꼭 취재해 보고 싶었던 건 바로 'S급' 물건이었습니다.
"이거 너무 티 나요. 더 좋은 거 없어요?"
"여긴 S는 아니에요. S 보고 싶어요? 그런데 더 비싸요."
'S급'은 진짜 정품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다는 최고급 짝퉁을 뜻합니다.
'명품'의 '명'도 모르지만 일단 티가 난다며 배짱을 부려봤습니다. 여기서도 가방 하나당 1,000위안에서 2,000위안(우리 돈 20만 원 ~ 40만 원) 정도였으니 결코 저렴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S급이라는 걸 봐야겠다 싶었습니다.
"일단 S급 보여주세요."
기자가 휴대전화로 몰래 찍은 짝퉁 ‘비밀의 방’. 별다른 취재 장비 없이 갔지만 경계는 예상보다 삼엄했다.
몸을 돌려 나가려 하니 들어올 때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 하나 눈에 띄었습니다. 철문 밖을 비추는 여러 개의 CCTV 화면이었습니다.
내부를 찍는 CCTV는 놀랍지 않은데 외부를 비추는 화면이 있다는 게 의아했습니다.
"요즘 들어서 경찰 단속이 엄청나게 심해졌어요. 저희 제품은 진짜랑 똑같거든요. 브랜드 직원도 못 알아볼 만큼 똑같아서 단속이 심해요."
청년의 말을 듣고 마침내 왜 이중 철문까지 필요한지 이해하게 된 순간, 문밖에서 한 중국인 남성이 물건을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청년은 의외로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요즘 기자들이 가방 사려는 척 몰래 접근해서 저런 사람들은 못 들어오게 해요."
"......"
사실 내가 진짜 기자인데……
왜인지 모를 양심의 가책과 함께 내외부를 고루 비추는 CCTV, 이중 철문, 낙후된 건물 내부가 어지러이 떠오르며 여기서 장비 없이 어설프게 휴대전화로 몰래 촬영하다가 들키면 집에 못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국 짝퉁 시장 '비밀의 방'을 둘러싼 보안이 얼마나 철저한지 실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왼편은 기자가 구매한 짝퉁, 오른편은 브랜드 공식 홈페이지에서 캡처한 정품 사진. 가품임에도 더스트백과 취급 주의서(?) 등을 꼼꼼하게 챙겨준다. 기자도 명품 문외한이어서 정품과 얼마나 비슷한지 평가하기는 어렵다.
"이거 얼마예요?"
"2,900 위안이에요."
"너무 비싸요. 1,000위안 이상은 안 돼요."
"그럼 안 팔아요."
"그럼 안 사요."
막상 몸을 돌리니 카운터를 보는 여성이 한 번 더 흥정했습니다. 2,300위안에서 다시 1,800위안으로, 거기서도 1,000위안을 고집하자 또 가격을 내렸습니다.
"1,300위안"
"1,000위안이면 살게요"
"하…1,000위안에 가져가요 그럼."
그러고는 회색 비닐봉지에 가방을 담아 대충 묶어서 건네줬습니다.
거래가 성사되는 순간까지 치열한 탐색전은 끝나지 않습니다.
결제하는 척 사기를 치는 손님이 종종 있는지 QR코드를 스캔해 결제하는 모습을 보고도 계좌에 실제로 돈이 들어왔는지 확인한 후에야 물건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가격은 우리 돈 약 20만 원. 참고로 정품 가격은 340만 원이니 1/17밖에 되지 않는 가격에 구매한 셈입니다.
소심한 성격에 배짱을 부려 호가를 1/3로 깎았지만, 왠지 더 깎으려면 깎을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S급이라는 말을 믿기 어려웠습니다.
밖으로 나와 안내 해 준 청년을 다시 닦달했습니다.
"솔직히 S급 아닌 거 아는데 광저우 놀러 온 기념품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산 거예요. 솔직히 이거 얼마에 팔아요?"
"......사실 A급이에요. 보통 1,400위안 받고 팔아요.
"......"
"진짜 S급 보러 갈래요? 그런데 비싸요."
"......"
아무래도 탐색전에서 진 건 저였나 봅니다.
S급 취재는 실패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 일단 또 따라가 봤습니다. 이번에는 가격을 5,900위안(우리 돈 115만 원), 심지어는 8,900위안(우리 돈 173만 원)까지 높여 불렀습니다.
이전 매장에서는 볼 수 없었던 덜 대중적인 모델들이 진열되어 있었던 점이 눈에 띄었고, 진짜 S급이라는 말을 들어서 그런지 손가락으로 쿡쿡 눌러본 가죽도 더 부드럽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진짜 S급이었을 가능성은 0에 가깝습니다.
중국인 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로는 짝퉁의 도시 광저우에서 전설처럼 전해지는 S급 짝퉁은 아무에게나 보여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손님 스스로도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하는 건 물론, 행여나 발각되면 경찰 조사를 받게 되는 만큼 판매자와의 사이에 신뢰가 쌓여야 '진짜 S급' 물건을 판다는 겁니다.
중국 관영 CCTV가 짝퉁 산업 사슬을 취재해 폭로한 뉴스 영상. 산업 사슬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짝퉁의 존재는 공공연한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짝퉁을 만들어 판다는 것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사진 출처 : CCTV 보도 화면 캡처)
이처럼, 중국이 짝퉁의 천국이라는 걸 누구나 안다고 해서 업자들이 드러내놓고 당당하게 짝퉁을 팔았던 건 아닙니다.
법적인 문제도 있거니와 '중국에서 만드는 건 전부 가짜다'라는 국제적인 불명예를 안긴 원흉으로 자국 내에서도 비난의 눈초리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최근 미·중 관세 전쟁의 파고가 높아진 사이, 업자들이 당당하게 전 세계를 상대로 짝퉁을 홍보하기 시작했습니다.
비밀의 방을 찾아가서도 볼 수 없었을 만큼 꽁꽁 베일에 가려놨던 S급 짝퉁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가짜를 만든다'고 중국을 조롱했던 미국 소비자들을 향해 중국 짝퉁을 사라고 홍보에 나섰습니다.
'가짜'라는 불명예는 사라지고 '제조 강국' 중국의 존재감을 선전하는 상징으로 신분 상승한 겁니다.
짝퉁의 역습.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2편에서 더 풀어보겠습니다.
(그래픽 권세라)
■ 제보하기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email protected]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네이버, 유튜브에서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