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부처 간 합의조차 못하고 주먹구구…‘예견된 실패’
의대생들에 잇달아 예외 허용…‘버티면 된다’ 선례 남겨
의료계는 수업 혼란 자초…24·25·26학번 한 교실 쓸 판
의대생들에 잇달아 예외 허용…‘버티면 된다’ 선례 남겨
의료계는 수업 혼란 자초…24·25·26학번 한 교실 쓸 판
수업 제대로 받을 수 있을까 정부가 2026학년도 의대 모집인원을 증원 이전 규모인 3058명으로 확정했다고 발표한 17일 광주의 한 의과대학에서 학생 등이 걸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가 17일 2026학년도 의대 모집 인원을 증원 발표 1년 만에 원점으로 되돌린 것을 두고 ‘예견된 정책 실패’라는 평가가 나온다. 정부가 대화와 타협을 외면한 채 정책을 강행하고, 의료계 역시 한발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집단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다. 의료공백의 피해는 오롯이 환자와 시민 몫이었다. 정부가 집단행동에 나선 의대생에 대해 잇따라 원칙을 허물고 예외를 허용함으로써 의대 증원 철회까지 몰렸다는 지적도 나온다.
의대 증원은 2023년 하반기부터 대통령실과 보건복지부 주도로 추진됐다. 복지부는 지난해 2월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보정심)에서 의대 정원을 2000명 늘린다고 발표했다. 당시 정부 내에서도 “어떻게 2000명으로 정해졌는지 모르겠다”는 의문이 나왔다.
증원 결정 이후 정부와 의료계는 ‘강 대 강’으로 대치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과 정부는 2000명 증원은 과학적 근거에 기반했다며 의료계에 “과학적 근거를 갖고 오면 논의하겠다”고 했다. 의료계는 “정부의 증원 결정이 과학적이지 않다”고 맞섰다. 정부와 의료계는 각각 증원과 정원 유지가 ‘과학적’이라고 주장하며 대치를 풀지 않았다.
윤 전 대통령은 12·3 비상계엄 포고령에 ‘현장에 복귀하지 않는 의료인을 처단한다’는 내용을 넣었다. 의료계를 대화 상대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의대생이나 전공의는 “대규모 증원으로 의대 교육이 이뤄지기 어렵다”거나 “전공의의 열악한 환경을 개선해달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미래 소득을 보장해달라’는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정부 내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점도 정책 실패의 방증이다. 교육부는 올해 초부터 의대생 복귀를 위한 마지막 정책 수단으로 증원 철회를 검토했지만 대통령실이나 복지부의 반발이 거셌다. 이날 교육부 주도로 이뤄진 증원 철회 발표에도 복지부는 불만을 드러냈다. 복지부는 “의대 학사일정이 완전히 정상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교육 여건을 감안한 조치라고 생각된다”면서도 “지난달 초 발표한 2026년 의대 모집 인원 결정 원칙을 바꾸게 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했다.
교육부가 지난해부터 원칙을 하나씩 허물며 의대생에게 예외를 허용한 점도 패착으로 꼽힌다. 교육부는 지난달 7일 의대생의 수업 ‘전원 복귀’를 전제로 증원 철회를 내걸었지만 수업 복귀율이 25.9%에 그친 상황에서 정원 회귀를 발표했다. 그러면서도 이주호 교육부 장관, 양오봉 전북대 총장 등은 “(의료계에) 물러서는 것이 아니다”라거나 “유급에 대한 학칙은 엄정히 지킨다는 것이 원칙”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교육부는 의대생 동맹휴학 불허 방침을 밝혔다. 그러나 지난해 10월 각 대학이 자율적으로 의대생 휴학 승인을 할 수 있도록 하면서 ‘동맹휴학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대면수업 대신 동영상 강의 수강 허용 등 각종 학사 유연화 조치도 용인했다.
교육부는 원칙을 어길 때마다 입시일정, 의대 교육과 의료 인력 수급을 고려한 조치라고 했다. 하지만 이런 행태는 의대생들에게 “버티면 이긴다”는 좋지 않은 인식만 심어줬다는 비판이 나온다. 수도권 소재 병원의 A원장은 “처음부터 규정에 어긋나는 행위를 불법으로 정해두고 원칙을 적용했어야 한다”며 “정부가 의료계에 다 양보한 상황에서 이제는 증원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됐다”고 말했다.
정부는 의료 인력 수급추계위원회를 신설해 2027학년도 의대 정원부터 이 위원회에서 논의토록 했다. 하지만 갈등이 재연될 가능성은 다분하다. A원장은 “모집 인원 회귀로 추계위도 동력을 잃게 됐다”면서 “의료계는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으면 다시 집단행동에 나설 텐데, 지금부터라도 원칙을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의료계를 향한 비판도 크다. 의대생·전공의 강경파는 ‘우리가 유급되면 의료 인력 배출에 공백이 생기고 정부는 항복할 것’ 등의 메시지를 의대생들에게 전파하고 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의대 1학년이 대거 유급되면 내년에는 24·25·26학번 1만여명이 한꺼번에 1학년 수업을 들어야 한다. 대학 내에선 “증원에 따른 의대 교육 여건을 개선해달라”고 주장했던 의대생들이 수업 여건 악화를 자초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수험생 혼란이 가중될 것이란 우려도 있다. 대학 입시는 보통 전년도 학과별 입학 성적, 지원 추이를 기반으로 이뤄진다. 2026학년도 의대 모집 인원이 다시 바뀌면서 수험생들은 판단 기준이 사라졌다. 김병진 이투스 교육평가연구소장은 “입시 환경이 유사하다면 전년도 결과와 비슷한 경향이 나타날 것을 가정해 입시를 준비할 수 있다”며 “올해 적지 않은 수험생들은 구체적 근거와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지원을 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