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이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2026학년도 의대 모집인원 조정 방향 브리핑을 마친 뒤 인사하고 있다. 김영원 기자 [email protected]
정부가 2026학년도 의대 모집 인원을 증원 이전인 3058명으로 되돌리며 ‘의대생 2000명 증원’이 1년 만에 사실상 무산됐다. 의대생들의 계속된 수업 거부에 정부가 한시적 동결 카드를 꺼내며 물러난 것이다. 2027학년도부터는 의료계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수급추계위원회에서 정원을 논의할 예정이어서, 향후 정원을 둘러싼 의정 갈등이 재연될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다.
17일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브리핑에서 “증원을 기대했던 국민 여러분께 의료 개혁이 후퇴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를 끼치게 된 점에 대해 진심으로 송구하다”며 “의대 증원을 포함한 의료 개혁은 여전히 필요하다고 보지만, 의대 교육을 정상화해 더 이상 의사 양성 시스템이 멈추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정부는 지난해 19년간 묶여있던 의대 정원을 2000명 늘린 5058명으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의료계는 전공의 사직과 의대생 휴학 등 집단행동으로 반발했다. 그럼에도 정부는 정원을 5058명으로 늘리되, 2025학년도 모집인원은 1509명을 늘려 4567명을 뽑는 식으로 증원을 강행했다.
의정 대립이 1년 넘게 강 대 강 양상으로 이어지자 상황은 점차 정부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의료 공백으로 환자의 피해가 커진 것은 물론이고, 의대생들이 학업을 중단하며 의사 배출에 차질이 생겼기 때문이다. 현재 의대 본과 4학년의 수업 참여율은 35.7%에 불과해 1200여명이 내년 의사 국시를 볼 것으로 예상된다. 269명에 그친 올해보다는 많지만 여전히 적은 규모다. 여기에 올해는 신입생까지 수업에 들어오지 않으며 24·25 ·26학번 1만여명이 동시에 수업을 들어야 하는 상황까지 예고됐다.
결국 정부는 별다른 해법이 없다는 판단하에 ‘증원 0명’을 결정했다. 지난달 정부는 의대생 ‘전원 복귀’를 조건으로 정원을 3058명으로 돌리겠다고 밝혔으나, 의대생들은 제적을 피하기 위해 등록만 한 뒤 수업을 거부했다. 복귀율은 25.9%에 그쳤다. 김홍순 교육부 의대교육지원국장은 “정부가 마지막 카드인 ‘3058명 확정’을 내놨는데도 학생들이 안 돌아오면 어떻게 하냐는 고민이 있었다”며 “정부의 결단이 학생들에게 신뢰를 줘 수업 복귀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2027학년도부터는 정부 직속 의료인력 수급추계위원회가 의대 정원을 심의하게 된다. 3058명으로 돌아간 건 내년도 모집인원이고, 정원은 여전히 5058명이지만 증원된 정원이 유지될지는 불투명하다. 추계위에 참여하는 전문가 중 과반이 증원에 부정적인 의료계 추천 인사이기 때문이다. 정부의 이번 후퇴로 ‘버티면 된다’고 학습한 의료계가 증원을 찬성하는 쪽과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갈등을 빚을 가능성이 크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논평에서 “정부의 정원 동결은 집단행동이면 정부도 이길 수 있다는 의료계의 비뚤어진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했다”며 “의대 증원은 물론 국민 중심으로 개혁하던 의료정책 추진이 불투명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정부는 의대 모집인원 조정과 별개로, 기존 의료개혁 정책은 계속 추진한다는 입장이다. 앞서 발표된 1·2차 의료개혁 실행안에는 상급종합병원(3차병원)의 병상 감축과 중증 환자 집중, 지역 거점 종합병원(2차 병원) 기능 강화, 의료사고 안전망 강화, 건강보험 비급여 관리 개편,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 등이 포함됐다. 의료계는 원점에서 다시 논의하자고 요구하지만, 앞서 박민수 보건복지부 제2차관은 “의료개혁 과제들을 착실히 추진해 나가겠다”며 선을 그었다. 다만 의사면허제도 개편, 재택 의료, 미용 의료 관리 등이 담길 예정이었던 3차 실행방안은 조기 대선과 맞물리며 추진이 어려워졌다.
의료계는 이번 발표를 고무적으로 받아들였다. 대한의사협회(의협)는 입장문을 내어 “만시지탄이나 이제라도 정상으로 돌아가는 한 걸음을 내디딘 것으로 평가한다”면서 “새 정부가 들어서기 전에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고 정상으로 돌아가는 발판이 마련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반면 의대 증원을 지지해왔던 환자·시민·노동단체들은 “대국민 사기극”이라며 반발했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는 “정부가 국민과 환자 앞에서 약속했던 의사인력 증원과 의료개혁의 근본적인 방향을 뒤집는 배신행위”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