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이유 있는 외면
전 세계 韓에만 있는 '가상번호' 제도
휴대폰 '010' 번호→'050' 바꿔 제공
선거여조기관·정당 가상번호 초토화
"사흘간 전화 40통, 국민들 전화 노이로제"
전 세계 韓에만 있는 '가상번호' 제도
휴대폰 '010' 번호→'050' 바꿔 제공
선거여조기관·정당 가상번호 초토화
"사흘간 전화 40통, 국민들 전화 노이로제"
편집자주
의심은 가는데 확신은 할 수 없다. 수상한 여론조사 얘기다. 민심의 바로미터라던 여론조사는 불법계엄 사태 이후 미심쩍은 결과물로 신뢰성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과연 여론조사는 조작이 가능한 것일까. 한국일보는 지난 두 달 여론조사 시장의 실태를 파헤치며 정치권과 조사기관의 불법 편법 공생 관계를 확인해봤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으로 치러지는 21대 대통령 선거가 6월 3일로 확정된 지금, 각종 여론조사의 결과를 다시금 경계하고 조사 이면을 냉철하게 들여다볼 때다.지난해 4월 총선을 앞두고 선거여론조사에 시달린 시민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린 사진.
"하루에 선거여론조사 전화만 17통이 왔네요. 전화로 항의해 봐야 소용이 없어요."
22대 총선을 앞둔 지난해 3월 22일. 전남 순천에 사는 김모씨는 지역 인터넷 카페에 이런 글을 남겼다. 원치 않는 여론조사 전화 폭주에 대한 불만이었다.
본보 기획팀은 지난 총선 기간 동안(2023년 10월~2024년 4월) 지역별 인터넷 카페 검색을 통해 선거여론조사에 대한 시민들 반응을 살펴봤다. 서울을 제외한 전 지역 사이트를 검색했고, 선거여론조사 관련 총 89개의 게시물을 확인했다.
게시물은 대부분 부정적 반응이었다. "여론조사 전화 소름 돋을 정도로 많이 오는데 신고할 수 없나", "일한다고 바빠서 오후 6시 전화를 못 받았더니 8시에 오고 밤 10시에도 오네요. 원래 이렇게 늦은 시간에 오나요?", "수신거부 했더니 다른 번호로 오네요", "사람 같으면 한 소리 하겠는데 자동응답(ARS) 시스템이라 열 낼 수도 없고 화가 납니다"와 같은 글이다. 경북 안동에 사는 이모씨는 사흘 동안 42통이 걸려왔다면서, 부재중 전화가 찍힌 화면을 찍어 올렸다.
한국은 선거여론조사를 하기 좋은 나라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휴대폰 가상번호' 제도 때문이다. 이용자 개인정보를 노출하지 않는 조건에서 '010' 번호를 '050' 형태로 바꿔 선거여론조사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전화에 의존하는 선거여론조사도 머지않아 명을 다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조사기관들이 공유재인 '가상번호'를 무분별하게 사들이고, 조사를 남발하면서, 시민들의 불만과 불신이 극에 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 역시 통신사가 제공하는 가상번호 개수를 제한하는 등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고 조언한다.
전 국민 번호 다 쓰였다
그래픽=송정근 기자
본보가 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여심위)에 정보 공개를 청구해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이동통신 3사가 선거여론조사 기관에 제공한 가상번호는 2,650만 건(중복 포함)에 달했다. 2020년부터 최근 5년 동안 제공된 가상번호는 총 8,793만 건. 전 국민 휴대폰 번호가 한 번씩은 선거여론조사에 사용됐다고 해도 무방할 만한 수치다.
가상번호가 도입된 2016년 당시엔 당내 경선 등에 제한적으로 이용됐다. 하지만 이듬해 법이 개정되면서 공표 목적 선거여론조사에도 활용할 수 있게 됐다. 업계에서는 2017년을 선거여론조사 역사에 획을 긋는, 상징적 한 해로 받아들인다.
선거여론조사는 전국 인구의 성별·연령·지역별 비율에 따라 표본을 할당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유권자 전체(모집단)를 조사할 수 없기 때문에, 성별·연령대(5개: 20·30대 등)·권역(8개: 서울, 인천·경기, 강원 등)을 기준으로 표본을 배분한 뒤, 이에 맞춰 1,000명의 응답자를 선정한다.
과거엔 조사기관들이 임의(엑셀 활용)로 전화번호(RDD 방식)를 생성, 표본 기준(예: 서울 20대 여성)에 맞는 응답자가 나올 때까지 무작위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이 방식으론 표본을 채우는 것조차 어려웠다. 정확성도 물론 떨어졌다.
보완책으로 등장한 게 바로 가상번호다. 이동통신사들이 성별·연령·지역 기준에 맞춰 가상번호를 제공해주면서 표본의 대표성은 일단 향상됐다. 휴대폰 가상번호로 집 전화가 없는 젊은 층이나 집을 비우는 직장인들 응답도 쉽게 받을 수 있게 됐다.
사흘에 42통, 뿔난 시민들
지난해 4월 총선을 앞두고 선거여론조사에 시달린 시민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린 사진.
하지만 선거여론조사에 피로감을 호소하는 시민들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불만을 단순히 엄살로 치부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인구가 적은 시·군 단위의 지역구 선거여론조사의 경우 표본 기준은 500명이다. 전국 단위 조사(1,000명), 광역단체장 선거(800명)에 견줘 수가 적다. 조사기관은 표본의 30배까지 가상번호를 받을 수 있다. 가령 인구가 15만 명 수준인 경북 안동시에서 선거여론조사를 한다고 가정하면, 기관은 표본 500명을 채우기 위해 총 1만5,000명의 가상번호를 요구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문제는 응답 거부자들이 많다는 점이다. 1만5,000명에게 전화를 돌려 성별·연령·지역에 따라 할당된 응답자를 채우게 되는데, ARS 조사는 협조율(응답자·조사대상자)이 5% 안팎 수준이다. 대략 1만4,250명으로부터 답을 듣지 못한다는 의미다. 조사 기관은 표본 수를 채워야 하기 때문에 전화를 받을 때까지 돌린다. 전화면접 조사 역시 낮은 협조율 탓에 조사에 상당한 애로를 겪긴 마찬가지다.
한 ARS 기관 대표는 "선거철엔 여러 기관이 동시에 여론조사를 하기 때문에 인구가 적은 지역은 하루에 동일인에게 40~50통씩 전화가 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게다가 최근엔 가상번호로 제공되지 않는 알뜰폰 사용자와 여론조사 수신 거부자가 늘면서, 수신을 차단하지 않은 이용자에게 전화가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정당도 공유재 초토화에 한몫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정당도 경선이나 자체 판세 조사를 위해 가상번호(비공표 목적)를 사용할 수 있다. 지난해 정당들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가상번호를 요청한 건수는 500건 안팎으로 확인된다. 제도가 도입된 2017년 이후 두 번째로 많다.
이는 중앙당이 요청한 수치이고, 각 지역별 시도당 수치까지 합치면 1,000건에 육박할 것으로 추산된다. 지난해 54개 선거여론조사기관이 요청한 건수(1,439건)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이다. 업계에선 정당에 제공된 가상번호가 못해도 1,500만 개는 웃돌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한 업계 대표는 "정당은 하루이틀 만에 판세 조사를 마치려고 원래 기준(30배)보다 더 많은 수의 가상번호를 선관위에 요구하는 걸로 알고 있다"며 "국민들로선 선거여론전화가 지긋지긋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1.1%만 참여하는 전화조사
가상번호 남용은 선거여론조사에 대한 불신을 높이고, 이에 따른 문제는 고스란히 우리 사회로 전가된다. 수신거부자가 급증하면서 전화를 이용한 선거여론조사는 점점 한계에 내몰리고 있고, 당연히 선거여론조사 신뢰성도 담보할 수 없다.
지난해 여심위가 연구용역을 의뢰해 나온 결과 보고서를 보면, 2023년(1~10월) 조사기관들은 약 8,000만 명에게 전화 접촉을 시도했고, 비적격사례(결번 등)를 제외한 6,100만 명 중 단 68만 명(1.1%)이 조사에 참여했다. 연구진은 "조사기관의 수많은 조사 요청과 조사대상자의 거절, 아주 소수의 조사참여자로 운영되는 실정"이라며 "정확한 선거여론조사를 수행하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고 짚었다.
선거여론조사에 응하는 이들이 줄면 그만큼 조사의 신뢰성 역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선거여론조사는 보통 사람들의 생각을 폭넓게 파악하는 게 목적인데, 일부 정치 고관여층들만 조사에 응할 유인이 커지기 때문이다. 특히 ARS 조사는 "응답해야 할 뚜렷한 이유가 있는 사람만 답변하는 아주 고약한 조사 방법"(박종희 서울대 정치데이터센터장)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전화에만 의존하는 한국식 조사
전화조사 방식이 한계에 다다랐음이 명확한데도, 정부와 선거여론조사 기관 모두 대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지 않고 있다. 한 대형 전화면접 회사 임원은 "일단 정부가 판을 깔아줘야 하는데 새 방식에 적극적이지 않고 새 방식을 도입하려 해도 규제가 심해 선보이기 어려운 구조"라고 지적했다.
새로운 대안으로 전환할 시기를 이미 놓쳤다는 비판도 나온다. 미국, 영국은 일찌감치 상업용 조사 때 ARS 방식을 쓰는 걸 법으로 금지했고, 최근엔 선거여론조사도 본인들이 확보한 패널을 대상으로 인터넷 조사를 하는 방식으로 넘어가는 추세다.
학계에서는 선거 전 일정 기간 동안 ARS 조사 공표를 금지하거나 가상번호 단가를 인상해 여론조사 수요 자체를 조정하는 방안과, 응답자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동일 번호 제공 횟수를 제한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에서는 선거 여론조사 비용이 건당 5,000만 원에 달할 정도로 비싸, 한국처럼 가상번호를 통한 무분별한 조사 의뢰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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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1화 검은 커넥션
- • "600만원이면 돌풍 후보로" 선거 여론조사 뒤 '검은 커넥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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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② 2화 '꾼'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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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③ 3화 불신의 책임자
- • 여론조사 공천 OECD 중 한국이 유일한데…'어디 맡기고' '어떻게 조사하고' 죄다 깜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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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④ 4회 이유 있는 외면
- • 의심은 커지는데 제재 건수는 줄었다?...여심위 조사 인력 달랑 4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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