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년 전 간첩죄로 21세기 간첩 활동 처벌
“간첩이라 못 부르는 소위, 홍길동법” 지적
민주당 권한남용·인권탄압 우려 진척 없어
“간첩이라 못 부르는 소위, 홍길동법” 지적
민주당 권한남용·인권탄압 우려 진척 없어
공중 훈련을 위해 이륙하고 있는 FA-50 전투기. 사진 제공=공군
[서울경제]
최근 10대 중국인 고교생들이 한국 공군 전투기를 무단으로 촬영하다 적발됐지만 중국 정부와의 연관성을 입증하더라도 ‘입법 공백’으로 간첩죄 기소는 어렵다 지적이 나와 논란이 일고 있다.
법조계에 따르면 경기남부경찰청 안보수사과 등 수사당국은 10대 후반의 중국인 2명을 군사기지 및 군사시설 보호법(군사기지법) 위반 혐의로 입건해 수사 중인 상태다. 이들은 관광비자로 입국해 미 군사시설과 주요 국제공항 부근을 돌아다니며 DSLR 카메라로 수천 장의 사진을 촬영한 혐의를 받고 있다.
문제는 이들의 범행 동기는 수사를 통해 밝혀지겠지만, 만약 중국 정부의 지시를 받고 군사상 정보 수집 목적으로 촬영했다고 하더라도 간첩죄로 처벌하긴 어렵다는 점이다.
1953년 제정된 간첩법이 ‘적국’을 위한 간첩 행위만을 처벌토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적국’은 북한으로 한정되기 때문에 그 외 다른 국가를 위해 간첩 활동을 하더라도 간첩죄로 처벌할 수 없는 실정이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현행 형법은 ‘간첩을 간첩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소위, 홍길동법’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온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국 중 간첩죄를 적국에만 한정한 나라는 대한민국 뿐이다.
외신들도 의아해 하는 반응이다. 미국에 본사를 둔 반(反)중 성향 매체 에포크타임스 소속 한 기자는 유튜브를 통해 “한국에서는 중국 첩보요원이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다”며 “한국에서는 중국 등 외국 간첩을 처벌할 법 조항이 없다”며 이해할 수 없다는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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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ECD 중 간첩죄를 ‘적국’ 한정, 한국 뿐
최근 간첩죄 관련 적발이 빈번해지면서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특히 근 중국 국적의 관광객이 국내 안보 시설을 촬영하다 검거되는 일이 연달아 발생하고 있다. 하지만 모두 사건이 간첩죄 적용이 어려워 처벌 수위는 낮은 상황이다.
지난해 11월에는 국가정보원 건물을, 지난 1월에는 제주국제공항을 각각 드론으로 촬영한 중국인이 경찰에 검거됐다. 부정한 의도가 드러나더라도 북한과 연관성을 입증하지 못하면 현행법상 간첩죄로 처벌하긴 어렵다. 수사 당국은 이 같은 범죄들을 군사기밀보호법, 군사기지법 혐의 등을 적용해 기소하고 있다.
군사기지법에 따라 군사기지·군사시설을 무단 촬영하면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는 수준이다. 최소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는 간첩죄 보다는 법정형이 낮아 억제력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이 같은 이유다.
지난해 수사 당국은 2018년 해외에서 활동하는 정보관 명단을 5년간 일본 등 외국에 팔아넘긴 전직 군 간부들을 적발하기도 했지만 징역 4년에 그쳤다. 이 역시 군형법상 간첩죄 처벌 대상이 아니어서 형량이 낮은 ‘일반이적죄’가 적용된 탓이다.
작년 7월엔 대법원 1부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영국 방산업체 한국지사장 A씨에게 징역 2년 6개월을, 국내 방산업체 기술본부장 B씨에게 징역 1년 6개월 선고하는데 그쳤다. 외국 기업의 이익을 위해 국내 군사 기밀을 유출한 범죄이지만 간첩죄 처벌 범위에 들어가지 않아 군사기밀보호법만 적용했기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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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법, 되레 간첩활동 보장” 시각도
상황이 이렇게 된 이유는 입법 공백 때문이다.
1953년 제정된 형법 조항으로 처벌해야 하는데, 그동안 정치사회 환경과 IT산업의 급속한 발전으로 간첩 활동의 수단과 방법이 고도화하고 있다. 그러나 72년 전의 간첩죄 조항을 가지고 21세기 간첩활동에 대응하고 처벌해야 하는 지경이다. 적국은 대법원 판례상 북한 뿐이라 다른 나라를 위해 간첩 행위를 해도 간첩죄로 처벌할 수 없다.
지난해 국군정보사 소속 군무원이 ‘블랙 요원’의 신분 등 군사 기밀을 중국 측에 넘겼지만, 북한과 직접적인 연결 고리가 확인되지 않아 간첩 혐의를 적용하지 못한 게 대표적 사례다. 심지어 윤석열 전 대통령은 탄핵심판 과정에서 이 형법 개정안을 더불어민주당이 반대했다고 주장하며 12·3 계엄 선포의 배경의 하나로 거론하기도 했다.
이 같은 처벌 우려를 메우기 위해 간첩죄의 ‘적국’을 ‘외국 또는 외국 단체’로도 확대하는 형법 개정안이 여러 건 발의됐다. 지난해 11월 13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제1소위원회에서 관련 형법 개정안이 의결됐지만, 이후 거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갑자기 반대 입장으로 돌아서면서 별다른 논의의 진척을 보이지 않고 있다. 반대 이유는 ‘권한 남용과 인권탄압’이 될 수 있어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논리다.
현행 간첩 법제는 간첩 활동을 차단하는 게 아니라 되레 보장해 준다는 시각도 있다. 이번 대선 과정에서 또다시 이슈화될 간첩 법제 개정 여부가 어떻게 판가름 날 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