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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상주시 사벌국면의 한 과수원에서 배꽃에 수술을 묻히는 인공수정 작업을 하고 있다. 천권필 기자
" 난자가 없는데 정자를 아무리 찍어본들 어쩌겠어요. "
15일 경북 상주시 사벌국면의 한 과수원. 이미숙(54)씨는 하얗게 핀 배꽃에 꽃가루를 묻히면서 이렇게 말했다. 배꽃을 자세히 보니 가운데 암술 부분이 마치 불에 탄 듯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갑작스러운 봄 추위에 꽃이 마치 동상에 걸린 것처럼 피해를 본 것이다. 이 씨는 “30년 넘게 배 농사를 지었는데 배꽃이 이렇게 많이 얼어 죽은 건 올해가 처음”이라고 했다.

경북 상주시 사벌국면에 하얀 배꽃이 활짝 폈다. 천권필 기자
사벌국면은 전국에서 면 단위로는 배 생산량이 가장 많은 곳이다. ‘상주 배’의 절반이 이곳에서 난다. 이 마을에 재앙이 찾아온 건 지난달 말이었다. 30일 아침 기온이 -5.2도까지 기온이 내려가면서 꽃봉오리 속 암술머리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검게 녹아 버렸다. 이런 꽃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경북 상주시 사벌국면의 한 과수원에 핀 배꽃. 이상저온으로 인해 가운데 암술이 검게 변하는 고사 현상이 나타났다. 천권필 기자
사벌국면은 전체 농가의 피해율이 90% 이상인 것으로 추산했다. 여기에 지난 13일부터 다시 기온이 급락해 서리가 맺히고, 눈발까지 날리면서 뒤늦게 핀 배꽃도 열매를 맺기 어려운 상황이다. 설사 열매를 맺더라도 기형과가 될 가능성이 크다. 박종욱 사벌국면장은 “보통 1년에 500억 원 규모의 배를 생산해 판매하는 데 올해는 10분의 1인 50억 원도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순식간에 여름서 겨울로 바뀌니 속수무책”
갑작스러운 저온 현상으로 배주(밑씨)가 검게 변했다. 오른쪽은 피해를 입지 않은 배꽃의 배주 모습. 천권필 기자
올봄에 유독 피해가 컸던 건 극단적인 기상 변화 때문이다. 3월 중순에 30도에 육박할 정도로 이상고온 현상이 이어지면서 배꽃이 평년보다 일주일 정도 일찍 개화했는데, 이후 기온이 영하권으로 급격히 떨어진 탓에 암술이 고사하면서 수정을 못 하는 ‘불임’ 꽃이 된 것이다. 서리 피해를 막기 위해 뜨거운 바람을 불어넣는 열풍 방상팬도 설치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경북 상주시 사벌국면의 한 과수원에 핀 배꽃들. 이상저온으로 인해 가운데 암술이 검게 변했다. 천권필 기자
이성대 사벌농협 수출배 공선회장(62)은 “불임 배꽃이 99%에 달할 정도로 피해가 심각한 농가도 있고, 귀농해서 빚을 내고 배 농사를 하는 청년 농부들은 망연자실한 상태”라며 “순식간에 여름에서 겨울로 날씨가 바뀌다 보니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이어 올해도 기후 인플레이션 가능성
13일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서 시민들이 장을 보고 있다. 연합뉴스
개화기를 맞은 복숭아 등 다른 과일들도 변덕스러운 봄 날씨에 직격탄을 맞았다. 충북 지역에는 14일까지 545건의 농작물 냉해 신고가 접수됐는데, 복숭아가 210건으로 가장 많았고 사과는 126건, 자두는 68건이었다. 사과의 경우 최근 경북 산불로 인해 재배 면적이 줄어든 상황에서 저온 피해까지 확산하면 수급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

이상기후로 인한 작황 악화가 물가 인상으로 이어졌던 지난해의 악몽이 올해에도 되풀이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지난해 폭염과 폭우 등 기상이변의 여파로 과일과 채솟값이 폭등하면서 물가 상승의 주범으로 지목됐다. 배 가격은 생산량이 크게 줄면서 전년보다 71.9%가량 뛰었고, 귤(46.2%)과 사과(30.2%)도 높은 상승률을 보였다.

기후 전문가들은 특히 봄철 이상기후가 작황 부진으로 이어지면서 물가 상승을 유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온난화로 인해 과일나무의 꽃피는 시기가 빨라지면서 저온에 쉽게 노출돼 피해가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수종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과거에는 온난화로 개화 시기가 빨라지면 농작물 생산성이 증가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봄 냉해 피해가 더 커지면서 오히려 생산성이 악화하고 있다”며 “농작물 생산량 감소는 밥상 물가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실화된 기후재난 피해 대책 시급”
9일 경북 안동시 길안면 만음리 한 사과 농장에서 작업자들이 개화를 앞둔 사과나무에 퇴비를 주고있다. 뉴시스
농민들도 재난 수준의 기후변화 피해에 대한 연구와 대비책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독일과 미국 등 해외에서는 극한기상 발생 시 보험료를 지급하는 지수형 기후보험을 출시해 기후 변화에 대처하고 있다. 국내에도 농작물 재해보험이 있지만, 가입률이 절반 수준에 그치고, 냉해 피해에 대한 보상은 일부만 받을 수 있다.

정 교수는 “탄소를 감축하기 위한 정책도 중요하지만, 기후변화로 인해 이미 현실화 되는 농가 피해를 줄이고, 인플레이션에 대비하기 위한 기후 적응 대책이 정부와 국회 차원에서 우선적으로 마련돼야 한다”고 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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